동은의 복수가 아주 오랜 시간을 기다렸듯, 시청자들도 <더 글로리 파트 2>를 보려면 꽤나 인고의 시간을 겪어야겠다. 지난해 끝자락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파트 1>이 2주 넘도록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학교 폭력 피해자의 복수극이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재도 김은숙 작가의 손을 거치니 새롭다. 송혜교·염혜란·임지연·박성훈 등 주조연 막론한 출연진 연기도 구멍 없이 탄탄하고 무엇보다 이야깃거리가 풍성하다. 창작 계기부터 실제 사건과의 유사성, 포스터에 담긴 비밀까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다 보면 어느새 <파트 3>가 공개되는 3월이 코앞이기를.
<더 글로리> 쓰게 된 계기와 제목의 의미는?
“근데 엄마, 내가 누굴 죽도록 때리고 오면 더 가슴 아플 거 같아, 아님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 아플 거 같아?”
학부모의 딜레마, 그리고 창작의 불길을 일으킨 한 마디. 딸과 대화 도중 위의 질문을 받은 김은숙 작가는 잠시 충격에 휩싸여 있다가 ‘엄마 작업실 좀?’ 하고 일어나 <더 글로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고등학생 딸을 둔 그에게 학교폭력은 언제나 “가까운 화두”였다. 작가가 그동안 했던 생각과 고민들이 딸의 질문을 통해 “눈앞으로 확 펼쳐졌”고, <더 글로리>의 씨앗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목은 왜 ‘영광’을 뜻하는 ‘글로리’인가? 작품을 만들며 실제 사례를 찾아보던 김은숙 작가는 피해자들 간 공통점을 발견하는데. 이는 피해자들이 금전적 보상보다는 “가해자의 진심 어린 사과”를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작가가 보기에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 되찾아지는 것은 결국 폭력을 당할 당시 상실한 “인간적 존엄, 명예, 영광”이었다. 작품의 제목인 <더 글로리>는 피해자들이 다시 영광을 되찾길 바란다는 작가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고데기, 점집..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이제 뻔한 관용구가 되어버린, “영화보다 현실이 더하다”는 말. <더 글로리>에도 해당된다. 제작진이 특별히 모티브 삼았다고 언급한 것은 아니나, 작중 주요하게 배치된 사건에 대응하는 실제 사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청주 여중생 ‘고데기 폭행사건’
<더 글로리>의 가해자 리더 ‘박연진’은 “고데기의 온도를 체크” 한다는 명목으로 ‘문동은’의 팔, 다리를 비롯한 온몸에 화상을 입혔다. 고데기가 없을 때는 다리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 ‘박연진’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걸 배웠을까. 어쩌면 우연히 17년 전의 신문을 봤을지도 모른다.
2006년 5월 청주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 3명이 약 20일에 걸쳐 동급생 한 명을 폭행한 일이 있었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금품을 요구했고, 응하지 않은 경우 고데기나 머리핀 등으로 집단구타했다. 심지어 당시 주동자로 지목된 K 양이 피해자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수사에 혼선이 일기도 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주동자 K 양은 구속되고 학교와 교사들은 행정처분을 받았다고 알려졌으나, 가해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폭행을 저지른 데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것도 유사점이다. 청주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거짓말을 한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등을 빌미로 삼았는데, <더 글로리>에서 ‘박연진’ 무리가 ‘문동은’을 괴롭히는 데도 특별한 계기가 없다. 이전의 희생양이던 ‘윤소희’가 사라지자 그 타깃을 다음 약자인 ‘문동은’으로 바꾼 것뿐이다.
대구 ‘점집 성매매 강요 사건’
<더 글로리>에서 ‘박연진’과 그의 모친이 집보다 자주 드나드는 장소, 만나는 사람이 있다. ‘박연진’의 모친은 무속인도 아니면서 툭하면 점집을 찾는다. 그것도 전직 경찰서장과 함께. ‘박연진’을 미행하기 위해 ‘문동은’이 ‘강현남’을 보내 점집을 살펴본 결과, 이상하리만치 “젊은 여자들만” 찾아오고 뭔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카메라가 비치는 것은 고가의 핸드백, 그리고 그 핸드백의 주인과 모텔방에 있는 전직 경찰서장까지. 아직 점집과 ‘박연진’ 모친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성매매 알선을 떠올리는 것은 가능한 추론 아닐까.
점집과 성매매라는 키워드를 공유하지만 더 심각한 강도의 사건이 있었다. 2002년, 20대 A 씨는 대구에 있는 한 점집에 방문했다가 무속인에게 ‘굿을 하고 제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후 A 씨는 무속인에게 빌린 돈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약 5년간 성매매를 강요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무속인과 그의 일가족 7명이 가로챈 돈은 10억이 넘는다.
‘점집 성매매 강요 사건’은 2009년에야 세간에 알려졌는데 특히 논란이 된 원인 중 하나로는 현직 경찰관이 성매수자 리스트에 있었기 때문이다. 무속인을 통해 성매수를 시도한 500여 명의 남성 가운데에는 대구시내 경찰서의 지구대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대구 경찰서에서 근무하다가 음주운전으로 해임된 경찰관 한 명도 재직 당시 성매수를 시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턱을 드냐, 마냐! 포스터만 잘 봐도 절반은 예측 가능?
제목 ‘글로리’에는 피해자 영광의 복권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나팔꽃(모닝글로리)이라는 상징도 있다. 나팔꽃의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작중 기쁜 소식, 즉 복수를 꿈꾸는 세 인물 ‘문동은’, ‘주여정’, ‘강현남’이다. 포스터에서 보이듯 이들의 나팔꽃은 새하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형태다.
반면 학교 폭력의 가해자이자 심판의 대상인 ‘박연진’, ‘전재준’, ‘최혜정’, ‘손명오’, ‘이사라’의 나팔꽃은 빛바랜 베이지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또 한 가지 차이점은 나팔꽃 줄기가 마치 뱀처럼 이들의 목을 감싸고 있다는 것인데. 다시 위로 올라가서 ‘문동은’의 포스터를 보면, 그 역시 나팔꽃 줄기를 목에 휘감고 있다. 이는 ‘문동은’이 가해자들을 처벌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그들과 함께 추락하는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하게 한다. 한편 ‘문동은’과 같은 편인 ‘주여정’, ‘강현남’의 목에는 이 줄기가 없어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들이 동은과 함께 갈 수 없을 것임을 암시한다.
인물들의 자세도 두 편을 가르는 포인트다. ‘주여정’과 ‘강현남’은 냉엄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데 반해 가해자 5인방은 전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크게 뜨거나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다만 이들 간에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박연진’, ‘전재준’, ‘손명오’, ‘이사라’가 턱까지 치켜들고 있는 것과 구별되게, ‘최혜정’의 턱은 내려가 있으며 시선은 그리 높지 않은 위를 향한다. <파트 2>에서는 그가 “죽을 때까지 네(문동은) 편”이 되지는 않아도, 어떤 도움을 주는 형태로 활약할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복수극의 판을 짠 ‘문동은’은 유일하게 위도 아래도 양 옆도 아닌 화면의 정중앙을 응시하며 구도를 2차원에서 3차원으로 확장한다. 시청자들에게 ‘당신들 의견은 어떠냐’고 자문을 구하는 것처럼.
미스터리한 것은 ‘하도영’이다. 작중 ‘박연진’의 남편이자 ‘문동은’의 바둑 상대, 또 복수를 위한 공략 대상인 ‘하도영’의 나팔꽃은 하얗지만(심판자) 고개를 떨구고 있으며(가해자) ‘하도영’ 자신도 위인지 아래인지 모를 애매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본인의 취향처럼 “심플”하지 않다. 이는 ‘하도영’이 ‘문동은’을 만나고 모든 것이 흑과 백,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심플한 세계에서 회색지대로 진입하게 될 것임을 보여준다.
김은숙 작가는 ‘하도영’이라는 인물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잘 따져보는 시선”이 필요해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런데 막상 ‘하도영’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을 쓰고 나니 그가 어떤 인물인지 보였다고 한다. ‘하도영’에게 사건으로부터 분리된 객관적 관찰자가 아닌 참여자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게 되는 대목이다.
허프포스트코리아/씨네플레이 유해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