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내망상은 제발 망상으로 끝! 넷플릭스 <끝까지 갈 걸 위원회>, 선택의 순간과 가능성

한 달 전 쯤이다. 대통령실 총무비서관 임명 과정에서 내정자가 과거 썼던 시(詩)가 화제로 부상했다. 20년 전 시집에 실린 시의 제목은 <전동차에서>.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 시의 부제는 ‘전철칸의 묘미’다. 그 공간에서 즐길 수 있는 묘미라 봐야 서 있는 내 앞의 자리가 생각보다 빨리 비워졌을 때 정도다. 그런데 시는 ‘짓궂은 사내아이들의 자유가 그래도 보장된’ 점을 전철칸의 묘미로 꼽는다. 여기서 자유란 일부러 ‘여자들의 가슴을 밀치거나 엉덩이를 만져 볼 수 있는’ 자유다. 또 그 자유가 박탈된 건 ‘여성전용칸’의 등장 때문이란다.

이 필력으로도 시집을 찍을 수 있다는 놀라움과 교과서에 예시로 실어도 될 왜곡된 성 인식의 참담함을 사람들은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국 문학의 크고 작은 장면들도 줄줄이 소환됐다. 부드러운 곡선 비슷한 것만 보면 ‘젖’가슴 등 부위별로 쪼갠 여체를 찾는 빈곤한 비유력은 예사다. 영취산의 진달래 밭을 보고 용두질을 운운하고 갑자기 생리가 시작된 소설 속 인물에게 “뜨거워. 몸 속에서 밀려 나와”라는 말을 시키는 식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중절모를 보고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떠올린 어린 왕자’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정작 보이는 건 눈에 ‘섹스 필터’를 끼운 채 세상을 집요하게 대상화하는 사람 뿐인데도 말이다.

넷플릭스 <끝까지 갈 걸 위원회(やれたかも委員会)>

드라마 <끝까지 갈 걸 위원회>는 인생에서 마주한 선택의 순간과 가능성들을 이야기한다. 단, 과거 이성과 만난 상황에서 성관계가 가능했는지 불가능했는지를 따진다. 원제는 <やれたかも委員会>. 좀 더 직역하면 ‘(섹스를) 할 수 있었을 지도 몰라 위원회’다. 그러든지 말든지 싶은 일에 심각하게 의미를 입히는, 일본 콘텐츠가 가장 잘 하는 걸 또 한 번 했다.

이건 언뜻 <전동차에서>처럼 ‘섹스 필터’를 투과한 세상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끝까지 갈 걸 위원회’는 의뢰인의 과거 사연 속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와 당시 섹스를 할 수 있었을 지를 판단해 주는 위원 3인으로 구성된 모임이다. 8개의 에피소드 중 7개가 남성의 과거 기억을 불러 온다. 10년은 훌쩍 넘어 현실적으로 이제 와선 별다른 진전을 기대할 순 없지만, 머릿속에서 도통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다. 각자 마주한 눈 앞의 미래로 걸음을 옮기지 못 할 만큼.

넷플릭스 <끝까지 갈 걸 위원회(やれたかも委員会)>

첫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마스다(마미야 쇼타로)는 의료 기구 업체에 다니는 32세 남성이다. 해외 부임이 결정된 그는 짐을 정리하다가 고등학생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만난 연상의 유미코(오구라 유카)와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그 여자와 잘 수 있었을 지가 신경 쓰여 일본을 떠나기가 찝찝한 그는 ‘끝까지 갈 걸 위원회’를 찾아 누운 뒷모습이 고향 산의 능선을 닮은 유미코의 추억을 꺼낸다. ‘고향 산의 능선’이란 비유가 필자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매우 곤란하다. 거짓말 같지만 드라마에선 정말로 누워 있는 유미코 위로 산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마스다의 기억은 이렇다. 마스다는 아르바이트생들과 유미코의 집에 초대받았다. 다른 친구들이 음식을 사러 나간 사이 유미코는 야한 영화를 틀고, 마스다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졸립다며 침대 위로 올라가 눕는다. 분명히 가까운 곳에 편의점이 있었는데 알려주지 않았고, 예정에도 없던 에로 DVD를 틀었다. 자, 마스다가 당시 마음을 먹었다면 유미코와 잘 수 있었을까?

냄새와 소리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고 말한 사진 속의 추억은 대개 미화된 것이었고 마스다 자신이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 하지만 위원회에서는 남성 2명이 ‘할 수 있었다’, 여성 1명이 ‘할 수 있었다고는 말 할 수 없다’라는 판정을 내린다. 즉, 당시 마스다가 침대 위의 유미코에게 다가갔다면 섹스를 할 수 있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넷플릭스 <끝까지 갈 걸 위원회(やれたかも委員会)>

다른 에피소드들도 진행 방식은 유사하다. 오늘날 이 시점을 사는 시청자들에게 첫 번째 에피소드는 불편해서 넘지 못할 산일지도 모른다. 최종화까지도 여자의 맨살을 관음적으로 비추는 카메라의 시선도 썩 유쾌하진 않다. 심지어는 각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젊고 아름답지만 남성들은 그렇지 않다는 점 역시 거슬린다. 세상 모든 것을 ‘섹스 필터’로 바라보는 여느 졸작들과 <끝까지 갈 걸 위원회>의 차이를 느끼지 못 할 법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고작 섹스를 하지 못한 하룻밤의 기억 탓에 인생을 망치기도 하는 이들의 궤변을 위원회의 입을 빌려 격파한다. 키스는 해도 섹스는 하기 싫은 상대의 의사를 이해하지 못한 남자, 여자의 완곡한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한 남자, 귀가길에 생쌀을 산 것이 섹스 허락의 신호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남자, 우연히 노래방에서 같이 논 여자를 14년 동안 찾고 있는 남자의 모든 자기중심적 기억 조작을 비판한다.

넷플릭스 <끝까지 갈 걸 위원회(やれたかも委員会)>

그럼에도 위원회가 내리는 결론이 ‘할 수 있었다’였던 이유는 뭘까. 그건 정말 가능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원회가 의뢰인의 뇌내 망상을 두들겨 패도 당시의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범죄 가해자들이 ‘그럴 만 했다’라고 뻔뻔한 억지를 부리는 경우와는 다르다. 하루 종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하지 않는 한 뱉은 적 없는 ‘이 사람과 자고 싶다’라는 생각에 죄는 없다. 그걸 입 밖으로 꺼내거나 상대를 괴롭힐 때 문제가 된다. 위원회의 ‘할 수 있었다’ 판정은 결국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어루만지며, 상대가 정말로 원하는 지 모를 때 현 상태 이상을 강제해선 안 된다는 상식을 조언한다. 그래도 그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라는 말과 함께.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그녀와 자지 못 해’ 현실에서 벌어지는 범죄와는 완벽히 유리돼 있다. 이 드라마가 나온 해 일본은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를 필두로 한 미투 운동이 시작됐다. 하지도 못한 섹스에 목을 매는 하찮음은 미화로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강조하자면 ‘그때 섹스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은 범죄가 아니다. 해 본 것보다 해 보지 못 한 게 아쉬운 건 대개 사실이다.

유미코의 누운 뒷모습을 보고 산의 능선을 떠올린 마스다의 비유적 심상은 분명 후지다. 이를 후진 것으로 만든 건 섹스 필터 장착자들이다. 그러나 <끝까지 갈 걸 위원회>가 다행히도 ‘섹무새’의 오명을 쓰지 않은 까닭은 피해자 없는 섹스 이야기에 선택과 가능성이라는 맥락을 부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라효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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