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까기, 뒷담화, 편가르기는 종특? 다시 본 <남산의 부장들>에서 우리 회사 사내 정치를 보다

직장이 정치의 공간이라는 것, 짧건 길건 직장 생활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것이다. ‘회사’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정치적 거래는 시작되고, 그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흐린 눈을 하고 최대한 이 거래에서 발을 빼보려 해봐도 사내정치는 상대를 향한 노골적인 비판, 은근한 돌려까기, 뒷말, 편가르기를 통해 매시, 매분, 매초 겪어내야 하는 현실로 다가온다.

코로나로 없어졌던 대면 회의, 회식이 다시 부활하더니 잠잠했던 부장 간 사내정치도 다시 도드라진다. 멀리서 관조하는 입장에서야, ‘그래봤자 같은 월급쟁이들, 뭘 저렇게까지?’ 유치하고 지질한 싸움에 실소가 터지지만, 당사자들은 사뭇 진지하고, 때론 지독하고 처절하다. 사내정치가 불씨가 되어 동료, 상사를 살해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의 주인공 김규평(이병헌)처럼 말이다.


내가 직장이고, 직장이 곧 나이다. 순교자형 직장인

김규평(이병헌)

김규평(김재규를 모티브로 한 인물, 이병헌 분) 중앙정보부장은 조직의 톱니바퀴 속에서 묵묵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순교자’ 유형의 직장인이다. 종종 주변에서 개인을 희생해 가며 조직에 투신하는 유형의 사람들을 만난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내가 직장이고, 직장이 곧 나이다’라는 태도를 견지하며, 대의명분을 진정으로 믿는 개혁가의 모습을 보인다.

김규평이 박통을 살해한 것은 단순히 돈이나 권력욕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욕심을 갖기에 그의 계획은 구체성이 없었고, 세를 규합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했는가? 살해의 단서는 박통을 향한 김규평의 질문과 최후진술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 속 김규평은 박통에게 ‘왜 비자금을 조성하셨습니까?’라고 묻는 대신 ‘왜 혁명하셨습니까?’를 지속적으로 질문하며 5.16 혁명에 대한 배신을 따져 묻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최후진술에서는 자신의 살인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주장한다. 어떤 행동이 개인적 목표에 해가 되더라도 업무상 대의명분 달성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수행하는 순교자형 직장인의 모습이다.

이런 유형들은 번아웃을 겪을 만큼 과도하게 일에 매몰되며, 비밀스러운 문제들을 털어놓고 신뢰를 내비치는 상사의 감언이설에도 잘 속아 넘어간다. 김규평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임자 곁엔 내가 있잖아’라는 박통의 말에 상기되어 친구이자 혁명 동지이며 자신의 길을 먼저 걸어간 박용각(곽도원 분) 전 중정부장을 살해하면서까지 상사에게 충성한다.

하지만 이들은 대개 마지막에는 김규평처럼 인정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원망하는 태도를 보인다. 자기희생의 화신인 본인을 제치고 ‘(곽상천같은) 버러지 같은 새끼를 옆에 끼고 정치를 하시니까 나라가 이 모양 이 꼴 아닙니까!’라고 절규하며 박통에게 총을 겨누는 김규평의 최후는 순교형 직장인들이 가슴에 품어야 될 장면이다.

분노 유발 얼간이형 직장인

곽상천(이희준)

김규평이 순교자적 직장인의 표본이라면 곽상천(차지철을 모티브로 한 인물, 이희준 분)은 자기 파괴적인 동시에 조직에도 해가 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얼간이 유형의 직장인이다. 곽상천은 본인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상사를 치켜세우고 경쟁자를 깎아내리는, 모든 회사에 한 명쯤은 있는 분노유발자다.

그의 얼간이적 면모는 부마항쟁의 진압 방법을 두고 부각된다. 부마항쟁에 대한 대응책으로 김규평은 야당과의 대화를, 곽상천은 계엄령 선포와 공수부대 파견을 주장한다. 그는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밀었는데, 부산·마산 시민 100만, 200만 명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라는 앞뒤 안 가리는 감언이설로 대통령의 신임을 얻는다. 상황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시도들로 인해 순교자형 직장인 김규평은 역설적이게도 얼간이 곽상천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뺏기게 된다.

A부장의 주장이 훨씬 합리적이고 조직을 위해 더 적절한 대안처럼 보이지만, B부장의 말이 채택되는 경우가 왕왕 있다. 내가 체득한 사회적 믿음을 뒤엎는 조치에 절망감이 밀려오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되뇐다. ‘직장은 민주적인 체제가 아니며, 권력자가 모든 일을 주관으로 결정하며, 고로 공평함은 기대할 수 없다. 직장은…’. 김규평도 나처럼 흐린 눈 렌즈를 장착하고 곽상천을 대했으면 살해라는 극단적인 방법은 택하지 않았으리라.

얼간이와 순교자를 가스라이팅 하는 소시오패스형

박통(이성민)

영화에서 박통(이성민 분)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경우 발아래 권력자들에게 달콤하게 속삭인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하고 싶은 대로 해’. 이 말은 ‘네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준다’라는 뜻을 내포하지만, 그는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모든 책임을 일을 벌인 상대에게 전가하고 가차 없이 버린다. 김규평이 박통을 위해 절친했던 박용각을 제거랬음에도 그의 죽음에는 무감각한 태도를 보이며 ‘박용각이 빼돌린 재산은 어딨냐고’ 태연히 묻는 장면은 소시오패스의 일반인과 다른 사고 구조를 보여준다.

이렇게 직장 내 소시오패스 유형들은 자신의 필요나 욕구, 요구사항에만 관심을 가진다. 소시오패스들은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없어서 만사에 거리낌이 없다. 일반인이라면 도덕적 잣대 때문에 주저하는 일도 개의치 않고 실행한다. 덕분에 그들은 경쟁 사회에서 결단력을 가진 유능한 리더로 평가받으며, 성공한 리더로 회자되는 이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소시오패스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소시오패스적 특성을 가진 사람이 리더가 되면 회사를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영화 속 박통은 스위스 계좌로 비자금을 빼돌리고, 아래 사람들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죄책감 없이 희생시키면서 대한민국을 큰 혼란으로 몰고 간 사건에 단초를 제공한다. 소시오패스적 리더들은 즉각적인 이득을 챙기는데 익숙하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그들이 정치적 승리자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그들의 개인적 사욕과 이기적 동기는 장기적 성공을 막는 요인이 된다. 박통이 자신의 오른팔에게 총을 맞고 결국 비명횡사한 것처럼 말이다.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

‘그 새끼들 세상이 언제 끝날까?’ 라는 박용각의 질문에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은 ‘세상이 바뀌겠어? 이름만 바뀌지’라고 답한다. 독재 정치의 좌절감에 대한민국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냉소로 일갈한 그녀의 말, 회사를 대입해도 성립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는 한 회사가 운영되는 방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회사의 이름이 바뀌고, 사장과 부장들은 교체되겠지만, 회사라는 본질이 그대로라면, 그리고 ‘정치’란 것이 목표, 관심사, 성격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일할 때면 언제나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현상이라면, 건강한 정치를 통해 <남산의 부장들>과 같은 파국만은 면하고 싶다.

이를 위해 회사 차원에서는 학연, 혈연, 흡연, 회식 등 사적 관계를 통한 네트워크 구축을 지양하며, 일부는 법으로, 법이 닿지 못 하는 부분은 사내 문화 조성을 통해 정화하며, 필요시 외부 감사기관을 둔다. 개인들은 직장에서 벌어지는 유형별 파워 게임에 대처하는 자기계발서를 구해 읽고 유튜브 영상을 챙겨 본다.

남산의 부장들과 한 명의 최종 보스

나의 경우는 동료, 상사와 사적 관계는 맺지 않으며 그 에너지를 일에 집중시킨다. 이와 동시에 ‘사내정치’에 주어지는 불명예는 대게 부도덕한 직원 몇몇 탓에 발생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 보려 애쓴다. 이것으로 부장들 정치질에 새우등 터져 집 나간 인류애가 되돌아 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현재 <남산의 부장들>은 넷플릭스, 왓챠, 웨이브, 시리즈온 등 OTT에서 볼 수 있다.


문화기획자 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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