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 같은 리얼리티와 ‘그저 예쁜 가난’ : 가난과 권력의 현대적 우화 <작은 아씨들>

이 포스터와 카피가 가장 좋다.

소설 원작과 드라마

1868년에 출판된 루이자 메이의 원작 소설 ‘작은 아씨들’의 자매들은 지나치게 친절하고 순종적이다. 만약 그녀들이 2020년대의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정서경 작가의 취향에서 ‘만약 살인사건의 현장마다 푸른 난초가 떨어져 있었다면 어떤 느낌일까?’ 라는 두 가지를 섞으면서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시작한다.

필자의 유년기엔 애니메이션 판이 최고였다.

아버지가 없는 아씨들

원작소설 ‘작은 아씨들’ 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빈자리에서 출발한다. 한 집안의 아버지가 미국의 남북전쟁에 참전한 이후 남겨진 엄마와 네 딸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경우는 인주 (김고은 분) 인경 (남지현 분) 인혜 (박지후 분) 세 자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어렸을 적 핏덩이 시절에 숨을 거둔 실질적 셋째의 존재를 생각하면 이 역시 네 자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아버지라는 자리는 관습적으로 규율과 원칙을 뜻한다. 만약 소설 속에서 아버지가 존재했다면 그녀들은 자신의 내면을 가꾸고 성장하는 일이 아니라 관행적 ‘여자로서’ 당연한 숙명이라고 할 수 있는 가문에 영광을 안기는 결혼자리를 알아보는 일에 힘썼을 것이다. 배우를 꿈꿨던 멕이나 작가를 희망한 조, 음악가가 되고 싶은 베스나 화가가 되려고 했던 에이미는 불안정한 일상에 안주하며 지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에선 그 자리는 누구나 대체 가능한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공석을 채우는 어머니와 고모는 자식에게 개척자의 면모에 있어 아버지에 뒤지지 않는 효력을 보여준다.

드라마의 그녀들 또한 아버지의 부재를 겪는다. 실은 생존해 있지만, 멀리 필리핀에서 망고를 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뿐, 그 존재 자체가 미미하다. 집에는 개미가 기어다니는 길이 있고, 한 번 열린 창문이 닫히지 않는 곳으로 벌레가 들어오지 않기 위해 불을 켜지 않으며, 천정이 낮은 화장실에서 샤워기의 물을 맞으려면 고개를 기울여야 한다. 심지어 엄마가 막내의 수학여행을 위한 비용 250만원을 훔쳐 달아남으로써 <작은 아씨들>의 대서사가 시작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소설 속 자매들처럼, 드라마 속 자매들에게도 고모(할머니)가 있다.(오혜석 – 김미숙 분) 소설 속 고모님은 부유층과 결혼하려는 넷째 에이미를 가장 좋아한다. 그러면서 체제에 반항하고 반골기질의 글이나 써대는 둘째, 조에 대해서는 매섭게 대한다. 드라마 속의 고모 또한 지나치게 철들어 버린 첫째 인주보다는 고모 자신의 과거에 비추어 더 필요한 심성을 지닌 둘째인 인경에게 애정을 쏟는다. 물론 조카들을 향한 사랑이란 동일하지만, 작품속 기득권인 정란회에 결부된 자신과 과거의 행태를 회개하는데 있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괴물이 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본능적인 답이었을 것이다.

속물이지만 천박하진 않다. 김미숙 배우가 잡아낸 초목표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장르물로써의 속도감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4화 정도까지만 보고 나면 일반 16부작 9부 정도까지는 본 것 같은 속도감이 든다. 그만큼 진행이 빠르고, 조밀하다. 이혼녀에 흙수저 타이틀을 달고 건설사에서 왕따를 당하는 경리, 인주는 친하게 지내던 또 다른 경리인 화영(추자현 분) 의 자살현장을 목격한다. 그러나 화영은 유력 대선후보 박재상(엄기준 분) 의 비자금 700억을 빼돌렸으며, 인주에게 20억을 남겼다. 그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던 인주는 어떤 인물을 의심하게 되지만 그 인물 조차 사고를 가장한 살해를 당한다. 이 커넥션에 엮인 대선후보를 쫒는 둘째 인경, 그리고 대선후보의 딸과 가깝게 지내는 셋째 인혜. 드라마는 단 2화만에 돈과 권력의 기원에 다가가는 능숙함을 보여준다.

일본 화장품 회사의 포스터를 표절했다가 사과하는 헤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가난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계급을 이야기하는 드라마 <작은 아씨들>처럼, 소설 또한 돈과 곤궁함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마치 드라마 속 인주를 보는 듯한 소설 속 첫째 멕은 소녀감성 특유의 중2병으로 부호들의 눈에 띄려고 노력하거나 자신의 신분과는 맞지 않는 파티에서의 모습을 보여주곤한다. 둘째인 조는 멋진 필력을 지녔지만 엄마의 노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긴 머리칼을 자르고 엉엉 우는 광경을 연출하기도 한다. 155년 전 숙녀들은 천민자본주의에 찌든 작금의 대한민국으로 치환되면서 그녀들의 오밀조밀하고 세부적인 이야기들은 우리 집단의 어둑한 측면과 만나 암울하지만, 그 밀도를 더 하게 됐다.

대중 미디어에서 다루는 가난

드라마는 첫 회부터 가난에 대한 송곳 같은 대사를 다루며 구체성과 리얼리티를 획득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드러난 가난은 그저 예쁘다. 일본 산문집 <홍차와 장미의 나날>에 나온 것 처럼 ‘호화로운 가난의 미학’ 처럼 보인다. 특별히 나쁜 습관없이 멀쩡한 직업을 지닌 두 언니는 이유없이 빈곤하고, 집의 상태는 주인이 손봐줘야 하는 수준이지만 그러지 않는 걸로 봐서는 자가이며, 보험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부유층의 고모(할머니)가 있다. 둘째의 직장 서랍안에 재어놓은 멕시코의 증류주는 병당 가격이 꽤 나갈것이다. 이는 완연하고 절대적인 수준의 극빈이 아니라 유념 속의 한탄이나 욕구의 실패에서 비롯된 가난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형차를 타는 사람이 스포츠카를 타지 못한다고 하여 발생하는 열패감을 가난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빈곤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극빈층은 그 순수한 감정만으로도 비관에 이룰 수 있다. 절망이 없는 인스타그램 속에서 돈을 자랑하는 자산가를 따라가지 못하면 ‘가난’의 계층에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실패한 삶을 의미하는 상향평준화적 패배감의 기시감이 들기도 한다.

실제 책 제목이기도 하다

정서경 작가

박찬욱 감독과 오랜 기간 동안 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는 정서경 작가는 자신에게 친숙한 ‘여자’ 라는 질료로 현대의 흥미로운 우화를 빚어내면서도 폭력이 없는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 고수임 (박보경 분) 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의 폭력도 엔터테인먼트를 위해 존재할 수 있다. 여성은 맞으면 안되는 존재처럼 그려지거나 혹은 성폭력으로 고통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행복만 가득한 말랑말랑한 이야기는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작가의 성향이 올곧이 드러난다. 사회적 약자로 구성된 대부분의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저항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지점은 그런데서 드러나는 것일게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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