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온전히 제 자신으로 살고 싶었던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세계는 모두가 임금의 여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누르고 살아야 하는 삶을 격렬하게 거부했던 궁녀들로 가득하다.

<옷소매 붉은 끝동>

“내가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빈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내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해 감히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죽음을 맹세하고 명을 따르지 않았다. 이에 나는 빈의 마음을 느끼고 다시는 재촉하지 못했다. 15년 뒤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는 빈에게 다시 승은을 내렸으나 거듭 사양했다. 이에 빈이 부리는 하인을 꾸짖고 벌을 내리자 빈은 비로소 내 마음을 받아들였다.”

정조가 직접 지은 의빈 성씨의 묘지명 ‘어제의빈묘지명’에는, 의빈 성씨가 승은을 거절하는 이유를 “내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노라 밝힌다. 15년 동안 두 번이나 정조의 마음을 거절한 이유는, 적통의 아이가 생산되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감히 그 순서를 어길 수 없다고 사양하는 마음이었노라 적은 셈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2021~2022)은 이 마음을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세손 산(이준호)은 궁녀 덕임(이세영)에게 귀하디 귀한 감귤을 준다. “하나 남아서” 준다는 무심한 말이 무엇인지 덕임이 모를 리 없다. “오다 주웠다”는 말이 정말로 오는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이 있길래 대수롭지 않게 주워 준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듯, 그 귀한 감귤을 하나 남았다는 이유로 가져다줄 리가 있는가. 덕임은 말한다.

“수라상에나 올리는 귀한 과일입니다. 감히 받들 수 없으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리 귀하다 한들 그저 과일일 뿐인데 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 순순히 받고 기뻐해라. 그러면 되질 않느냐.”

“귀한 것입니다. 소인에게는 과분한 것이지요. 하여, 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덕임은 굳이 덧붙인다.

“한낱 궁녀에게는 처음부터 사양할 자유조차 없는 것이옵니까. 부디 소인이 사양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남몰래 세손을 연모하고 세손 또한 자신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덕임은 그 마음을 받지 않는다. 애초에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선택이란 걸 하며 나로 살고 싶었던 덕임이었다. 소설을 읽고, 글을 필사하고, 생애 한 번 있는 계례식을 자신이 누릴 귀한 권리라 외치던 덕임에게 세손의 마음을 받는 것이 달가운 선택지일 리가 없다. 품계가 높아지고 지체 높은 신분이 된다 한들, 더 많은 법도와 규율과 제약 안에 갇혀 얼마 없는 자유마저 빼앗기면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그래서 덕임은 감히 일국의 세손에게 “사양할 자유”를 요구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세계는 모두가 임금의 여자가 되어 자기 자신을 누르고 살아야 하는 삶을 격렬하게 거부했던 궁녀들로 가득하다. 덕임과 벗들은 임금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는 미래 대신, 무사히 정년을 채워 출궁하고 나면 다 함께 모여 작은 집을 짓고 군밤이나 구워 먹으며 소설을 양껏 보는 노년을 꿈꿨다. 제조상궁 조씨(박지영)는 윗전들이 아무리 바뀐다고 한들 자신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이라며 아예 자신이라 왕실을 지탱하는 기둥이라 말한다. 심지어 덕임의 동무 영희(이은샘)는 자신이 은애하는 이의 여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발각되는 순간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선택을 주저치 않는다. 선역부터 악역까지, 이 세계의 궁녀들은 자기 자신으로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덕임이 정조를 연모했음에도 끝까지 정조의 마음을 받기를 꺼렸던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 자신이 정조의 마음을 받는 순간, 자신은 전부 사라지고 오로지 임금의 후궁이 되는 일만 남는다. 그러나 일국의 왕은 그럴 수 없다. 군주에게는 곁에 아끼는 여인을 하나 덧대는 일에 불과할 것이다. 그런 덕임의 걱정은 현실이 된다.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 덕임에게 정조는 말한다. 도성에서만 벌써 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죽었고, 우리만 아이를 잃은 것이 아니니 백성들 앞에서는 의연해야 한다고. 덕임은 제 배로 낳은 아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싶지만, 조선의 백성 모두를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고 아껴야 하는 소임을 진 정조는 그러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겠노라 내린 선택은,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을 아홉 개의 담장을 둘러싼 화려한 감옥 안에 가두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마치 정조 자신이 군왕의 책무 안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강미강 작가의 동명 원작소설이 그랬듯, <옷소매 붉은 끝동>은 오랜 세월 우리가 익숙하게 소비했던 로맨스 사극의 고정관념을 산산이 부순다. 왕은 궁녀를 사랑하지만, 궁녀는 그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한다. 어떻게 해서든 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원자를 생산해 권력을 손에 쥐려는 여인들의 서사 대신, 제 의사와 상관없이 궁에 들어와 자기 자신을 잃어야 했던 여인들의 탄식이 굽이굽이 수 놓인다. 서로 연모하는 마음을 확인한 왕과 궁녀가 마침내 정을 통하는 것은 해피엔딩이 아니며,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젊은 왕은 회한에 젖은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한다. “네가 여전히 궁녀였다면, 후궁이 돼라 강요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내가 널 너로 온전히 살게 두었더라면, 그랬다면.

작품의 마지막, 정조는 환상 속에서 다시 덕임을 본다. 자신이 일국의 군왕이 아니라 그저 덕임이라는 이름의 여인을 사랑하는 산이라는 이름의 사내로 살아갈 수 있는 순간을, 덕임이 그저 덕임인 채로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소설과 드라마 모두가 그 자리에서 끝나는 건 어쩌면 순리일지 모른다. 두 사람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비로소 산과 덕임이 온전히 제 자신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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