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주는 감동을 배가시키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출연 배우의 인생 연기,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그리고 마치 그 시대와 분위기를 그대로 구현한 듯한 공들인 미장센까지. 하지만 수많은 감동 요소 중에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는 것만큼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전쟁이라는 상황이 추가되면 영화가 주는 울림은 더욱 커진다. 인간이기를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은 자신만의 길을 선택하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 나감으로써 스스로를 증명해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최근 공개한 전쟁 배경 실화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1. 세계 최초의 흑인 파일럿, 제시 브라운을 아시나요? <디보션>
<디보션>(감독 J.D.딜러드)은 미국 해군 최초의 흑인 파일럿 제시 브라운(조너선 메이저스)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감동 실화를 그린 이야기다. 뭐? 최초의 흑인 파일럿이라고? 그런데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고? 그렇게 인종차별이 심했던 시대에 당당하게 파일럿이 되었다니! 라고 놀랄 수밖에 없는 제시 브라운의 이야기는 <디보션>의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서서히 탄탄하게 서사를 구축하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기서 잠깐. 미국은 1950년대 중반까지 버스 안을 흑인칸과 백인칸이 분리해 운영할 정도로 인종 차별이 심했다.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가 흑인 전용칸이 만석이어서 백인 전용칸에 앉았다가 ‘흑백 인종분리법’ 위반으로 체포되었고, 이 부당함을 시정하기 위해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주축으로 파업과 승차 거부 운동을 펼쳤던 역사적 사실도 이미 1955년에 일어났던 일이다.
<디보션>이 관객을 끌어들이는 첫 번째 힘인 실화는 당시 시대 배경이고, 그 한복판에 제시 브라운이 있다. 헌신적인 남편이자 딸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아버지인 제시 브라운은 1940년대에 흑인 최초로 미공군 파일럿으로 선발되었다. 대중들의 연대가 사회적 운동이라는 표현으로 일어나기도 전에 제시 브라운은 차별적인 제도 속에서 불평등과 맞서 싸워왔던 것. 모두가 인정하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뛰어난 조종 실력으로 그는 미국 해군 최초로 흑인 파일럿이라는 성취를 이뤄냈다. <디보션>에서는 그가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겪어야만 했던 고난들을 담담한 대사로 때론 격렬한 감정을 담아 보여준다.
두 번째 실화 감동 요소는 다름 아닌 한국전쟁이다. 미국에게는 수많은 전투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이 글을 읽는 한국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의 역사. 형제끼리 총을 겨눠야만 했던 상황은 우리만의 잘못이 아니었다. 세계사적 흐름에서 한국전쟁은 냉전 이후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기 위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 양상으로 치러졌던 것.
<디보션>에서는 한국전쟁 초기 UN군과 국군의 뼈아픈 후퇴를 초래한 장진호 전투 장면이 그려진다. 장진호 전투의 패배로 그 유명한 ‘흥남부두철수’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감독 윤제균, 2014)에서 이 장면을 애틋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다시 <디보션>으로 돌아가면 특히 제시 브라운이 비행기를 몰고 돌아가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장면에서는 절로 탄성이 나온다. <탑건: 매버릭>(감독 조셉 코신스키, 2022)의 공중전만큼 화려하진 않지만, 미그기를 비롯해 그 시대의 비행기를 사실적으로 구현했다는 점 그리고 그 비행기들로 충분한 전투씬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 제시 브라운의 인생 여정에서 뜨거운 우정을 보여주는 윙맨 톰 허드너 역은 <탑건: 매버릭>의 행맨 글렌 파월이 맡았다. 할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 용사라는 점도 이 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지점이다. 압도적인 고공 액션과 뜨거운 감동 스토리를 지금 경험하자!
2. 2차 세계대전을 살아내는 평범한 노르웨이 한 가족 이야기 <나르비크>
사상자 8,500명, 침몰 선박 65척, 격추된 비행기 86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첫 패배’로 기록된 나르비크 전투의 수치다. <나르비크>(감독 에리크 숄베르그)는 치열했던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나르비크에서 일어난 전투를 한 평범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전한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중소국들은 참전을 거부한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역시 중립을 선포한다. 하지만 중립국 선포는 힘이 있을 때 유효한 법. 국방력이 약한 노르웨이는 결국 독일의 침공을 받게 된다. 독일은 여러 도시 중에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던 항구도시 나르비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데, 그 이유는 스웨덴산 철광석이 나르비크 항구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수출되기 때문이었다. 군수 물자로 중요한 철광석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장기화할 전쟁에 대비할 초석이 된다는 것을 히틀러는 알고 있었고, 영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투를 치른다.
<나르비크>는 한 가족사를 통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고향을 되찾아, 독일에 2차 세계대전 최초의 패배를 안겨주는 이야기다. 1940년 벌어진 나르비크 전투라는 실화를 소재로 해 있었을 법한 가상의 인물들을 창조했다. 가정적인 아버지이자 노르웨이 군인인 군나르(칼 마르틴 에게스뵈)는 아내 잉리드(크리스티네 하르트겐)과 여섯 살 아들 올레 그리고 할아버지 아슬락(스티그 헨리크 호프)가 이야기의 주인공들.
군나르는 나라를 지킨다는 군인의 사명감으로 목숨을 걸고 영국, 프랑스 연합군 측에서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운다. 퇴각 중 독일군의 이동을 막기 위해 다리를 폭파한 후 포로로 잡히며 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는다. 아내 잉리드는 마을 호텔에서 독일 영사의 통역 일을 도우며 가정을 지킨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국 영사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면서, 독일의 군사기밀을 빼낸다. 영국의 폭격으로 잉리드의 아들이 크게 다치면서, 잉리드는 심정적으로는 연합군을 지지하지만,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독일 영사를 찾아가 아들의 치료를 부탁한다. 이 과정에서 독일 영사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다. 전쟁통에 약소국의 소시민 가정이 겪었을 법한 일을 매우 짜임새 있게 보여준다. 마치 일제강점기를 견뎌내야 했던 민중이 친일파와 독립군 사이에서 갈등해야 했던 것처럼.
나라를 구하는 것이 중요한가, 아들을 구하는 일이 중요한가? 나라를 구하러 온 연합군의 폭격으로 아들이 치명상을 입게 되었을 때, 엄마가 나치 독일에 도움을 요청한 것은 과연 비난받아야 할 일인가?(물론 모든 나치 부역자에게 이런 사연이 있다는 건 아니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군나르는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대의명분보다 제 가족 하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힌다.
<나르비크>에는 위에서 언급한 수치를 경험할만한 압도적인 스펙터클 전투씬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전쟁을 경험하는 한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의 엇갈린 선택을 미묘하게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와, 이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조율해준 연출의 힘이 크다. 아울러, 전쟁이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고민하게 해 주는 영화.
3. 전쟁 속에서도 꿈은 이루어진다 <더 스위머스>
헤엄쳐서 그러니까 수영으로 에개해를 건넌 사람이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더 스위머스>(감독 샐리 엘호세이니)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 이야기다. 수영 선수 마르디니 자매가 내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고국 시리아를 떠나,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결국 올림픽에 출전하기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2011년 시리아 다마스쿠스 근교. 수영장에서 잠수 대결을 하는 두 자매. 바로 사라(마날 이사) 유스라(나탈리 이사) 자매이다. 수영 선수 국가대표 출신인 아빠 덕에 어릴 적부터 수영을 익혔고 언젠가 아빠처럼 국가대표 수영 선수가 되어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아버지 역시 딸들을 수영 선수로 키우기 위해 수영 선수 펠프스의 접영 모습을 분석해 훈련하기도 한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자매. 하지만 내전이 시작되면서 친구들이 하나둘 목숨을 잃고, 집 밖으로 나서기가 무서워진다. 수영장을 가는 건 당연히 금지.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진 내전을 목도하며 결국 유스라와 사라는 떠날 결심을 한다. 우리의 꿈은 너희의 폭격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되뇌며.
난민의 탄생이다. 난민이라고 하면 나와는 무관한, 먼 나라의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더 스위머스>는 나라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을 때 국민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쟁통에도 사람들의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버는 사람은 있는 법. 먼저 독일에 도착해 가족들을 부르겠다는 당찬 자매는 브로커들에게 속아 작은 그리스행 보트에 탄 채 망망대해로 떠난다. 목숨을 위협받는 시리아를 탈출하려는 많은 사람이 보트에 몰리고 갓난아기까지 안은 엄마까지 타면서 그렇지 않아도 작던 보트가 더 비좁아진다.
설상가상으로 엔진이 고장나지면서, 두 자매는 바다로 몸을 던진다. 수영을 할 수 있는 우리라도 비켜줘야 남은 사람들이 더 안전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의지와 상관없이 난민이 되었지만, 그들도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 아니 어쩌면 최악의 상황에서 더욱 이타적일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난민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찾아오는 지점이다.
난민이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의 무게를 덜어주는 건 사라와 유스라의 통통 튀는 연기이다. 두 배우는 실제 자매로 찐 케미를 보여준다. 놀라운 사실은 영화 촬영 전까지 두 배우 모두 수영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점!
난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밝은 자매의 천진난만한 표정은 독일에 도착해서 더 빛을 발한다. 우여곡절, 천신만고 끝에 유럽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그들을 거부하는 독일 앞에서도 말이다.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사라와 유스라는 발랄함을 넘어 뻔뻔스럽게까지 느껴지는 표정으로 수영 코치 스벤(마티아스 슈바이크회퍼)에게 자신들에게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수영복도 없고, 수영모도 없는데 말이다! 황당해하던 스벤도 그들의 당당한 태도에 홀린 듯 강습을 시작한다. 그리고 수영 선수로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사라와 유스라에게 투영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들은 난민팀으로 리우 올림픽에 도전한다.
아직도 난민은 다른 세상 이야기라고 느끼고 있다면? 언젠가 뉴스에 등장했던 난민 소식 정도로만 난민을 알고 있다면? 넷플릭스 <더 스위머스>에서 밝고 정의로운 자매를 만난보자. 난민과 자신이 다른 것은 국가의 정상 기능 여부뿐이란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윤상민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