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의 기쁨과 슬픔>, 자기 앞의 진상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들의 직장 괴담을 듣는 데 소비하곤 한다. ‘우리들은 스마트하게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하면서 결재는 꼭 대면보고로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상사 이야기, ‘몸살기운이 있어 먼저 퇴근하겠다’고 했던 후배를 퇴근 후 클럽에서 마주친 이야기, 평소 입버릇처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궂은 업무는 단기 계약직들에게 다 떠넘기려는 오너 이야기…. 세상에 이상한 사람은 별처럼 많아서, 어느 직장을 가든 최소한 하나씩은 있는 모양이다.

“프리랜서로 살면 그래도 직장 상사한테 쪼일 일은 없으니 속은 편하겠네?” 친구들의 질문에 나는 그저 웃는다. 세상일이라는 게 대체로 비슷한 법이다.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라고 다르지 않다. 다짜고짜 전화해서 무슨 기사를 준비 중인데 멘트를 좀 부탁한다고 물어 놓고 거절하면 대놓고 기분 나쁜 티를 내는 기자, 원고료 대신 자기네 회사 매체 정기 구독권을 줄 테니 글 좀 써 달라는 매체, 저희 매체에 글을 쓰시면 작가님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며 공짜로 글을 달라는 매체, 앞에서는 지식소매상들의 사회적 역할과 시대에 대한 비장한 말들을 늘어놓으면서 뒤에서는 직원한테 손찌검을 하는 출판사 대표…. 이런 사람들과 매일매일 부대끼며 일해야 하는데, 이 업계라고 괴담이 없을까.

아니,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멀쩡한 척 일을 하고 살지? 매일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어쩌면 남들 눈엔 나도 도저히 함께 일 못 할 인간으로 보일지 모른다. 고질적으로 마감을 어겨 편집부의 퇴근 시간을 갉아먹는 지각 글쟁이,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지극히 제한되어 있어 매번 쓰는 글의 내용도 비슷비슷한 퇴물, 앞에서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척, 진보적인 척 이미지 메이킹 다 해놓고는 뒤에 가서는 제 고료 협상 악착같이 하고 남 흉보는 거 즐기는 속물…. 그래서 가끔은 웃으면서 업무 미팅을 하면서도 생각하곤 한다. 지금 우리는 정말 서로를 만나는 게 즐거워서 웃고 있는 걸까, 아니면 웃어야만 하는 ‘일’의 자리라서 웃고 있는 걸까?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함께 일 못 할 상대로 생각하면서도, 마지못해 웃고 있는 건 아닐까?

장류진 작가의 동명 단편소설을 단막극 드라마로 옮긴 KBS <일의 기쁨과 슬픔>(2020)은 ‘한국의 실리콘밸리’ 판교를 배경으로 한다. 판교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판교 스타트업 괴담’을 꾹꾹 눌러 담은 이 드라마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일이기 때문에 웃으면서 일해야 하는 이들의 슬픔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작품이다. 중고장터 오픈 마켓 어플인 ‘우동마켓’의 기획자인 안나(고원희)는 어느 날 대표 데이빗(오민석)으로부터 헤비 유저인 ‘거북이알’(강말금)을 만나고 오라는 지시를 받는다. 하루에도 100개 넘는 물건을 올려서 판교 지역 상품창을 도배하다시피 하는 ‘거북이알’이 혹시 악의를 가지고 서비스를 교란하는 어뷰저는 아닌지 알아보고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직거래를 빙자해 거북이알을 만난 안나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직장 괴담을 듣게 된다.

원래 UB카드 공연기획팀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북이알’은, 해외 유명 피아니스트의 내한공연을 추진하라는 UB카드 회장 조운범(류진)의 지시를 받고 혼신의 힘을 다 해 일을 성사시킨다. 고객들의 문의가 이어지자 ‘거북이알’은 아무 생각 없이 공연 일정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가, 이 일만 성사되면 승진시켜 주겠다던 조운범 회장의 격노를 산다. 자신이 먼저 SNS에 올려 하트를 받고 싶었던 조운범 회장의 심기를 읽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SNS에서 클래식 공연계의 큰손이자 인플루언서로 각광받던 조운범 회장의 자랑질을 방해했다는 죄로, ‘거북이알’은 1년간 월급을 돈 대신 카드사 포인트로 받는 형벌을 받는다. 절망의 늪에 빠졌던 ‘거북이알’은, 카드 포인트로 물건을 사서 우동마켓에 판매하는 것으로 포인트를 현금화하게 된 것이다.

‘거북이알’의 이야기를 들은 안나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그 웃음에는 겉으로 그럴싸하게 이미지 메이킹을 한 소셜 인플루언서의 비대한 자아를 훔쳐봤다는 즐거움도 포함되어 있지만, 나 혼자만 괴담을 겪는 게 아니라는 동지애도 서려 있다. 주인공 안나가 일하는 우동마켓도 이상하기로는 UB카드 못지 않으므로. 우동마켓은 수평적인 업무 환경을 만든답시고 서로를 직함이나 본명 대신 ‘데이빗’, ‘제니퍼’ 같은 영어 이름으로 부르기로 결의한 회사다. 그러나 직함과 본명만 사라졌을 뿐, 상급자를 호칭할 때는 “데이빗님께서…”라고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러운 지극히 한국적인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길어야 15분을 넘기면 안 된다는 실리콘밸리식 회의 ‘스크럼’을 30분 넘게 일장연설하는데 쓰는 대표 데이빗의 허장성세에 질린 안나는, 조운범의 허장성세의 직접적인 피해자인 ‘거북이알’과 함께 쓰게 웃는다. 이렇게나 이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우린 어떻게 웃으며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어떤 이들에게 <일의 기쁨과 슬픔>은 영 씁쓸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취업 준비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IT 스타트업 기업과, 고액연봉으로 모두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금융업계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울기에는 다소 애매한 수준의 고통만 겪는다. 일과 자신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이야기하는 고소득자들의 고충을 다룬 이 작품이 모든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생각한다. 모두가 선망하는 안정된 직장을 지닌 이들조차 이처럼 일이 끔찍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견딜 수 없는 세상이라니. 이만큼 우리가 사는 시대의 쓸쓸함을 잘 담아낸 작품도 흔치 않다고.

하루하루 일하며 만나게 되는 무례한 사람들을 견디기 힘들어질 때면, 나는 세상에 있을 수많은 진상과 괴담의 주인공들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이들도 ‘세상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많다’고 중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나를 진상이라고 기억하는 이들도 많을지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조금은 서글프지만 숨쉬기는 편해진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일 앞에 내던져진 모욕과 진상들을 저마다 견디고 치워가며 균형을 잡고 살아야 하는 존재들인 게 아닐까.

* 그동안 K-DRAMA 칼럼을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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