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인>, 장항준과 김은희가 가지 못한 길을 상상하다

나는 <싸인>이 미처 가지 못한 길을 상상해본다. 만일 두 사람이 원래 구상했던 전개대로 <싸인>이 흘러갔더라면 어땠을까.

최근 장항준 감독이 송은이의 부름을 받아 함께 만들고 있는 영화 팟캐스트 <씨네마운틴>은, 표면적으로는 ‘영화라는 산을 등정하는 팟캐스트’를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 팟캐스트의 묘미는, 영화 얘기를 하는 듯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기 일쑤인 장항준 감독의 입담이다.

그 날도 그랬다. 영화 <대부>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던 장항준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데뷔작 <디멘시아 13>의 시나리오를 일주일만에 쓰고 9일만에 촬영을 마쳤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은근슬쩍 자신이 SBS 드라마 <싸인>(2011)을 작업하던 때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눈 붙일 새도 없이 숨가쁘게 돌아가는 촬영현장과, 하마터면 대본이 펑크가 날 뻔한 상황을 김은희 작가와 함께 극복해 낸 이야기를 하던 장항준 감독은, 자신이 애초에 구상했던 <싸인>의 방향을 슬그머니 털어놓았다.

“원래 <싸인>의 내용은 뭐였냐면, 박신양씨와 제자인 김아중씨가 전광렬씨하고 대결을 하잖아요? 한 7~8부쯤에서 전광렬씨를 이겨요, 이기는데… 박신양이 전광렬하고 싸우면서 정말 저 거대한 세력을 이기기 위해 자기도 힘을 기르고 독해져요. 그러다 이 사람이 변질돼요. 이 사람도 이제 권력의 화신이 돼. 지키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을 해서, 이 사람이 변해요. 나중에는 제자인 김아중과 박신양의 싸움이 후반부에 펼쳐지는 얘기였어요.”

씨네마운틴 2부 “<대부> 희대의 명작이 탄생하기까지.. 그리고 희대의 토커 항준이가 탄생하기 까지”. 2020년 9월 14일. 컨텐츠랩비보.

맞다. 원래 장항준과 김은희가 구상했던 전개는, 이명한(전광렬)을 이기기 위해 이 악물고 싸우던 윤지훈(박신양)이 어느 새 자신이 싸우던 이명한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는 전개였다. 두 사람의 구상 속에서는 이명한도 이유 없이 악인이 된 것이 아니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더 잘 지키기 위해 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악인이 된, 자신만의 논리가 탄탄한 악인이었다. 처음부터 이명한과 윤지훈은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였던 셈이다. 마침 <싸인>이 방영되던 시기 아주 잠깐 대중문화매체 기자로 일했던 나는 두 사람을 인터뷰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는데, 그 인터뷰에서 장항준 감독은 이렇게 말했었다.

“극 초반 전광렬 씨에게 ‘가장 이명한을 닮은 사람은 윤지훈이다. 15년 전 이명한의 모습이 윤지훈이다’ 라고 말했고 박신양 씨에게는 ‘극좌와 극우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다.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순간 극좌는 곧바로 극우로 바뀔 수 있으니까. 그래서 원래 윤지훈도 10회쯤에 변하는 걸로 설정되어 있었다. 정병도 원장의 죽음을 보면서 힘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명한과 싸우다가 이명한처럼 되는 거다.”

텐아시아 “장항준, 김은희 ‘<싸인>을 본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비겁한 방관자’”. 2011년 3월 11일. 이승한 기자.

<싸인> 촬영현장의 박신양(왼쪽)과 장항준 감독.

물론 두 사람이 그렸던 구상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윤지훈이 압도적인 인기를 끄는 바람에 현실화될 수 없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 윤지훈은 어느새 흡사 이순신이나 안중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는데, 그런 인물이 변절하는 전개를 펼치려 보니 엄두가 안 났다는 것이다. 웃으면서 “그랬다간 우린 이민 가야 하는 거다”라며 너스레를 떨던 장항준 감독 옆에서, 김은희 작가는 웃으며 “드라마라는 게 그렇더라. 어느 순간 우리 손을 떠나더니 살아서 움직이고 스스로 진화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초인적인 영웅 윤지훈이 자기 희생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고, 그의 제자 고다경(김아중)이 그 유지를 이어받는다는 지금의 전개도 좋아한다. 그러나 동시에 두 사람이 애초에 구상했던 대로 작품이 흘러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9년 전에도, 9년만에 팟캐스트에서 다시 들은 지금도. 정말 두 사람이 분노한 팬들의 항의에 떠밀려 이민을 갔더라면 <시그널>도, <킹덤>도, <기억의 밤>과 <씨네마운틴>도 없었겠지만.

“거악과 싸우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그 거악과 닮은 꼴이 되어버린 일그러진 영웅” 서사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접하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때에 따라 불가피한 일이고, 그게 세상의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나. 세상 사람들도 너무 쉽게 “쓰레기를 치우다 보면 손에 오물도 좀 묻고 그러는 것”이란 말로 제 편의 변절을 옹호한다. 수단은 좀 보기 흉하지만 목적이 숭고하니까 괜찮다고, 결과가 과정을 납득시킬 거라고 말하는 이들의 얼굴을 나는 살면서 여럿 보았다.

실상은 이명한처럼 살면서 자신이 윤지훈인 줄 아는 이들이 저자에 넘쳐나는 시대에, 나는 <싸인>이 미처 가지 못한 길을 상상해본다. 만일 두 사람이 원래 구상했던 전개대로 <싸인>이 흘러갔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싸인>은, ‘괴물을 이기기 위해 자신도 괴물이 되어 버렸다’며 변절의 불가피함을 말하는 윤지훈을, 그의 제자이자 변하지 않은 이상주의자인 고다경이 끝내 극복하고 설득해내는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괴물과 싸우다 자신도 괴물이 되어버린 세대를 충분히 예를 갖춰 안타까워하되, 그들의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말하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이야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고다경이 되어 새 시대를 열어야 할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승한 TV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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