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침엽수에 달린 조명과 장식들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들뜬 입김. 선물이나 카드에 쏟는 작은 마음들. 온통 빨갛고 푸르거나 희게 칠한 휘장을 두른 상점들. 매년 말 전 세계에 펼쳐지는 이 풍경은 더 이상 종교의 영역이 아니다. 이날 아이들은 12월24일 밤 잠든 사이 산타가 머리 맡에 선물을 놓는다고 배우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동심을 깨지 않기 위해 몰래 선물을 준비할 것을 요청받는다. 크리스마스에 이뤄지는 ‘의식들’은 어떤 약속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영국 왕실의 크리스마스는 다르다. 로열 패밀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별장에 집합해 26일인 박싱데이에 해산하는 행사를 벌인다. 일단 별장에 도착하면 바로 몸무게를 재고, 나갈 때까지 3파운드(약 1.4kg) 증량을 목표로 한다. 늘어난 체중은 왕실에서 크리스마스를 제대로 즐겼다는 방증이다. 조찬, 오찬, 만찬에 입어야 할 복장은 이미 결정돼 있고 선물을 뜯어 볼 수 있는 시간 역시 정해져 있다. 해마다 산타 전설은 뭇 아이들을 설레게 하지만 왕실의 아이들과는 먼 이야기다.
영화 <스펜서>는 이 3일 간의 왕실 크리스마스 행사가 열리는 샌드링엄 별장을 배경으로 한다. 다이애나 프랜시스 스펜서(크리스틴 스튜어트), 당시 왕세자비가 남편과 별거를 시작하기 1년 전 쯤이다. 이 시간적 배경 설정은 세상의 흐름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왕실을 더없이 잘 묘사할 수 있는 장치다.
그러면서 영화는, 지금껏 다이애나를 다룬 작품들이 고인의 죽음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거나 단순 일대기를 그린 것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듯 다이애나는 스무 살에 12살 연상의 찰스 3세와 결혼했고, 내내 남편의 불륜에서 비롯된 왕실과의 불화에 시달렸다. 15년의 왕실 생활은 이혼으로 끝났고, 그로부터 1년 만에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국민의 50%가 영국 왕실 폐지 찬성 여론을 주창하도록 만든, 온 세계가 지켜 본 죽음이었다.
이 드라마틱한 인생에서 떼어낸 2박3일의 스크린 타임은 마치 신경증 환자의 뇌 속에 빠진 듯하다. <스펜서>만 보고 극 중 다이애나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크리스마스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이애나가 순순히 시간을 지켜 사진 촬영이나 식사 자리에 나타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참석을 거부한 적도 없다. 어중간한 탈출 시도와 식탁에만 앉으면 나오는 원인 모를 헛구역질에 고통받는 건 시종들이다. 다이애나만 얌전히 있으면 별장까지 회색인 왕실의 풍경도 그대로 있어줄 것만 같다. 영화에서 보는 이들의 숨통을 죄는 건 왕실이 아니라 다이애나의 애매한 반항이다.
강조되는 건 왕실이라는 시스템의 광기가 탄생시킨 다이애나의 고독한 내면이다. 다이애나가 정해진 시각에 나타나지 않거나 정해준 옷을 입지 않으면 별장의 분위기는 대번에 바뀐다. 꾸중이나 벌칙 같은 건 없다. 다이애나가 행동을 ‘교정’할 때까지, 왕실 내 모든 인물들의 감각이 그에게 꽂힌다. 먹은 걸 전부 게워내다가도 사람이 없는 부엌에 몰래 들어가 입에 음식을 쑤셔넣곤 하던 다이애나에겐 이 별장에 수백 년 전 죽은 빅토리아 여왕의 각질이 떠 다니는 듯하다.
그리고 다이애나의 이 환상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헨리8세의 왕비 앤 불린을 적극적으로 호명한다. 당시에도 유명한 호색한 헨리8세의 난봉질은 상상을 초월했고 왕비를 갈아 치우려 썼던 오명들은 역사에 분명히 기록돼 있다. 우여곡절 끝에 아라곤의 캐서린을 밀어내고 그의 왕비가 된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 1세 출산 이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유산과 사산을 반복하며 남편과 소원해졌다. 결국 앤 불린은 헨리8세가 씌운 간통 누명으로 목이 잘리고 말았다.
영화는 36세에 참혹하게 죽은 다이애나와 앤 불린을 줄이음하며 왕실에서 느꼈을 이들의 고독을 부각한다. 별장의 다이애나 방에 앤 불린의 전기가 있던 건 어쩌면 왕실의 경고였을지 모른다. 마녀가 되기 싫으면 순종하라는 은근한 질타는 왕실 일원의 숙명이다. 그건 남편의 불륜에 분노와 절규조차 쉬이 쏟아낼 수 없는, 고독함이라는 원죄다.
다이애나가 불러낸 앤 불린의 유령은 현실의 매기(샐리 호킨스)와 같은 존재다. 유일하게 다이애나를 다이애나 그 자체로 대하는 왕실 의상 담당자이지만, 그 역시도 왕실의 일원인 탓에 자유롭게 교감할 수는 없다. 매기가 별장 의전을 맡은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에 의해 런던으로 쫓겨나자, 다이애나는 새 의상 담당자에게 “매기를 불러오지 않으면 드레스를 다 찢어 놓겠다”라고 엄포를 놓는다. 하지만 그 단말마 같은 외침조차 여왕의 귀에 들어갈까 “이 말은 전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다이애나다.
다이애나는 군불조차 때지 못하는 왕실 법도 탓에 담요 무덤에서 잠을 청하려는 아들 윌리엄과 해리를 깨워 진실게임을 한다. 질문을 하는 사람이 소령이 되고 답을 하는 사람이 병사가 되어, 소령이 묻는 말엔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하는 게임이다. 무엇이 엄마를 그렇게 슬프게 하는지 궁금한 윌리엄에게 다이애나는 “왕실에는 시제가 하나 뿐”이라고 대답한다. 과거에 현재를 매몰시키는 왕실에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그 말은 다이애나가 삶과 죽음, 두 선택지 만을 미래에 두고 있을 만큼 벼랑 끝까지 내몰렸음을 암시한다.
구토와 앤 불린의 환상은 더 심해지는 와중에 다이애나는 니퍼를 손에 쥔다. 니퍼는 파파라치의 카메라를 막겠다며 남편이 다이애나 방 커튼에 해 놓은 박음질을 뜯고, 폐허가 된 본가로 가는 길을 막는 철조망을 자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 무기는 다이애나의 몸을 스스로 해치기도 한다. 별장을 탈출해 가까스로 들어온 본가에서 죽으려던 그 앞에 나타난 앤 불린과 “그들은 바뀌지 않으니 당신이 바뀌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매기는 다이애나를 비로소 삶의 영역으로 이끈다. 왕세자비가 아닌 ‘스펜서’로 돌아가기로 한 다이애나는 아버지의 낡은 자켓을 입고 그토록 바라던 ‘왕실에서의 자유’를 성취한다. 그 후의 이야기가 몹시 슬프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그 순간 그는 스펜서로서 자유로웠다.
다이애나는 별장에서의 나날을 보내며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에게 줄곧 “나 어때요?”라고 묻지만 언제나 원하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독에 침잠된 그가 바란 건 아름답다는 칭찬이 아니라 자신을 제대로 응시했을 때 나오는 반응이었다. ‘여섯 손가락의 마녀’로 단두대에 올랐던 앤 불린이 ‘순교자’로 기억되듯, 왕실의 부적응자이자 튀어나온 송곳이던 다이애나 역시 ‘민중의 왕세자비’로 기려진다는 건 비극적 우연이기도 하다. 그를 그토록 괴롭혔던 찰스와 카밀라 파커볼스가 왕과 왕비가 된 2022년, 다이애나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