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씬드로잉] 기적은 ‘지금, 여기’ 진짜로 일어난다 <오데트>

‘영화 광인’이라 불리는 일본의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1954년 작품 <오데트>에 대해 이렇게 쓴 적 있다.

“영화를 보는 것은 이 동요를 맨살로 촉지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시각은 그때 무력한 자신을 견디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를 그런 체험으로 이끄는 <기적>이라는 작품은 뛰어나게 촉각적인 필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의 맨살 – 하스미 시게히코 영화비평선』,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박창학 옮김, 2015, 이모션북스, 233쪽.

1980년에 발표한 「<기적>의 기적」이란 글의 일부다. <기적>은 <오데트>의 일본 개봉 시 제목이다. 원제 ‘Ordet’는 덴마크어로 ‘The Word’란 뜻이다. 내용상 ‘말씀’이라 의역하는 게 적확할 것이다.

너무 기적 같아서, 기적 같지 않은 기적

이 글의 허두에서부터 하스미 시게히코는 ‘미지의 동요’라는 표현을 쓰는데, 영화를 보면서 관객에게 일어날 수 있는 육체적인 혼란과 균열을 통칭한다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딱히 정확하게 짚이지는 않는다. 과연 무슨 혼란이고 균열인지는 이 글의 말미에 명징하게 드러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렇듯 무책임하게 얘기하는 건 영화를 보고 나서 실제로 ‘그걸’ 겪지 않거나 못 하는 사람은 공감 못할 사항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만약 그걸 느낄 수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 해도 과언만은 아닐 것이다. 너무 고요하고 잔잔해서 기적이 그저 삶의 순연한 사실일 뿐이라는, 기적의 ‘기적 같지 않음’의 기적. 말장난 같은가. 그러나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하는 순간을 어찌 똑바른 언어로 전할 수 있으리. <오데트>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목사이자 극작가였던 카이 뭉크의 원작을 각색한 작품이다. 덴마크의 한 시골 농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보겐 농가의 둘째 요하네스는 오랫동안 의학 공부를 하다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신이라 믿게 된다. 보겐 집안은 독실한 신자이지만, 밤낮 성경 구절을 되뇌며 가족들에게 설교하는 요하네스를 정신병자 취급한다. 장남 미켈의 아내인 잉거는 요하네스를 불쌍하게 여기지만, 아버지는 그를 미쳤다고 단언한다. 셋째 아들 안더스는 집안과 종교적으로 대립하는 재단사의 딸과 결혼하려고 하나 아버지의 반대가 심하다. 그러다가 잉거가 불치병에 걸린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범박하게 요약한 스토리인데, 말로썬 더 설명 못할 요소가 영화엔 가득하다. 영화가 결국 육체적으로 보고 듣는 행위라는 걸 예민하게 자각하지 못한다면 한없이 지루하기만 한 옛날 필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어떤 극적인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아니 너무 극적이어서 되레 일상의 잔잔한 한 파동처럼 여겨진다는 게 더 정확할 거다). 결혼을 둘러싼 셋째 아들과 아버지의 갈등 등은 하도 오래된 설정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런 요소들을 되새기다 보면 반세기도 훨씬 전에 제작된 구식 영화라는 편견이 스멀스멀 모공을 틀어막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기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가 어떻게 해서 온전하고도 고유한 형식과 물성으로 오랜 시간 되새겨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각성의 차원이다. 영화를 보는 이가 영화 속으로 불쑥 들어가거나 영화 속 인물이 스크린을 찢고 ‘지금, 여기’에 임하는 듯한 실제적인 당혹감. 그것이 어느 특정한 개인의 유별난 취향과 그로 인한 체험으로 투사되었다 하더라도 <오데트>가 영화사적으로 남긴 ‘기적’의 웅혼한 여운은 나만의 것이 아니리라 믿는다.

당신은 과연 ‘미지의 동요’를 느끼는가

칼 드레이어의 여느 작품들처럼 흑백 음영이 예리하고도 첨예하게 교직하는 고요한 실내극의 느낌이지만, 일상이 때론 그 어떤 심연보다 깊고 내밀하다는 것, 영화는 바로 그러한 일상의 모공을 들춰내는 작업이라는 걸 이처럼 농밀하게 보여주는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많지 않다. 어떤 극적 과장이나 감정의 직접적 표출 없이 카메라는 자신이 찍은 영상을 통해 보는 이의 내면을 훑어 내린다. 그럴 때, 관객은 찍힌 영상의 조합물을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영상 표면에 반사된 자신의 마음이나 육체를 내관(內觀)하며 ‘미지의 동요’를 느끼게 된다. ‘기적’의 1차 단계이다. 앞서 ‘그걸’ 겪지 않거나 못 하는 사람은 공감 못할 기적이라는 건 바로 이 뜻이다.

너무 소소해서 자동적이고, 너무 황당해서 지나치게 당연시되는 이상한 착종이 여기서 발생한다. 슬금슬금 남의 집 풍경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 집 안에 한 인물로 놓여있게 되는 것 같은 육체적 망실 상태. 모종의 자발적 의지나 작심 없이 슬그머니 무장해제되어 영화가 이끄는 시공 한구석에 조용히 한 입자처럼 머무르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 그것을 어떻게 온전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말한 ‘미지의 동요’, 그리고 ‘촉각적인 영화’라는 표현이 내겐 그렇게 와 닿았다.

마치 이천 년 만에 살아 돌아온 예수와 아무렇지도 않게 조용히 악수를 나누는 느낌이라고 말한다면 망발이거나 광증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제로 육체적인 체험이 하루 자고 일어나서 세수한 다음 날의 얼굴처럼 또렷이 스스로를 다른 존재로 옮겨놓는 경험을 제정신이라 일컫는 것도 제정신(?)은 아닐 것이다. 정말 빙의와 현현은 이토록 사소하고 무감하게 누군가의 영혼 속에서 나지막이 일어나는 일인 걸까. 그 괴이하고도 조용하고, 무감하면서도 전면적인 느낌에 사로잡히게 만든 장면을 드로잉했다.

모종의 자발적 의지나 작심 없이 슬그머니 무장해제되어 영화가 이끄는 시공 한구석에 조용히 한 입자처럼 머무르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경험. 그것을 어떻게 온전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신은 왜 영화를 보는가

요하네스가 조카와 대화하다가 그녀를 안고 잠자리로 들어가는 장면이다. 조카의 엄마 잉거는 곧 죽을 운명에 닥쳤다. 집안 모든 식구가 요하네스를 정신병자 취급하지만, 조카만은 예외다. 성경 구절만 몽롱하게 읊조릴 뿐, 일상 어법을 완전히 상실한 듯한 요하네스가 그나마 자연스러운 말투를 구사하는 순간이다. 2시간 5분짜리 러닝타임 중반을 막 넘어선 시점이다. 이전 장면에선 요하네스와 조카가 거실 중앙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둥그렇게 감싸는 롱테이크가 3~4분 정도 이어진다.

이 장면을 보면서 화면 중앙에 놓인 요하네스가 화면 바깥으로 느릿느릿 걸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흠칫 놀랐다. 순간, 예수가 빙의된 듯한 요하네스의 태도가 거짓이거나 꾸며진 광증이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기에 더 놀랐다. 70여 년 전 현존했던 이름도 얼굴도 낯선 배우의 얼굴이 실물 그대로의 예수일 거라는 확증이 물리적으로 뇌리에 찍히는 순간이었다.

그는 미친 게 아니었던 거다. 그랬더니 영화 마지막의 (일상적으론 말도 안되는) ‘기적’이 정말 ‘기적’처럼 느껴져 외려 ‘기적’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기적이 이렇게 당연하다니’ 와 ‘믿을 수 없는 일이 믿고 안 믿고의 문제를 넘어 그 자체로 현실이라니’ 라는 두 개의 말꼬리 다음을 이을 여력이 더는 생기지 않을 정도로 그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영화만의 독자적인 ‘힘’이 이런 게 아닐까 라는 자각은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난 뒤의 각성이다. 나는 영화 속의 요하네스와 ‘실제로’ 대면했던 거다. 믿기지 않는가. 나 역시 믿기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영화의 기적이고 육체에서 환기된 육체 너머의 기적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힘’은 과연 무엇일까.

영화를 단순 눈요기 삼든, 킬링타임용 오락거리로 여기든, 삶의 원리와 교훈을 캐내는 텍스트 삼든 모두 관객의 선택이고 몫이다. 사람에 따라 온갖 취향과 세계관, 그로 인한 감상법을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산업이 발달하고 다변하면서 무엇이 옳다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제 와 부질없다. 그래도 다만, 여전히 분명한 건 영화는 평평한 수직의 2차원 물질을 통해 인간의 감각과 두뇌를 자극하여 2차원 너머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영화의 진정한 ‘힘’이란?

3D, 4D 등은 과학기술이 만들어낸 극단의 감각재현 체계이지만, 그 자체가 3차원, 4차원으로 실제 변환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렇게 여겨지게 만드는 것뿐이다. 이것은 영화가 애초부터 가공과 가상이라는 기반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더 실제적인 가상, 더 진짜 같은 가짜를 무한생산해내는 것인데, 그 끝이 어디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이미 죽은 자, 내가 태어나기 전에 살다가 죽은 누군가가 지금, 여기 내 앞에 현현하게 되는 것을 목격하는 경험은 그 어떤 기술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예전부터 있어 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게 영화의 진정한 힘이라 믿는다.

화면 속의 ‘그’를 통해, ‘그’의 몸을 빌려 임재한 ‘신의 아들’을 만나는 경험. 그 믿을 수 없는 환각을 실제로 기적처럼 보여주는 영화의 힘. 미친 소리라 여겨도 된다. 미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들이 지금도 너와 나의 일상 속에 산재해 있을 테니까. 어느 제대로 미쳤거나 너무도 멀쩡하기에 외려 더 미친 자로 보이는 자의 명징한 두뇌를 통해 조용히, 그러나 지금은 누구의 언어로도 이해받지 못하는 방식을 통해, 씨 뿌려지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강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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