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씬드로잉] 내가 흡혈귀에 사로잡힌 이유 ① 영화 <노스페라투>

전 세계에 흡혈귀에 관한 영화나 소설은 560여 편이 된다고 한다. 동서양 불문이다. 문화권마다 제각각의 흡혈귀 설화가 존재하는 셈이다. 그 중 1897년에 브람 스토커가 발표한 소설 『드라큘라』는 영화가 탄생한 이후 제작된 모든 흡혈귀 영화의 원전이라 할만하다. 1922년 F. W. 무르나우는 그 소설을 바탕으로 ‘노스페라투’를 만들었다. 무성영화 시대의 명작으로 남아있는 영화다. 50여 년 후 베르너 헤어조크가 감독한 ‘노스페라투’(1979)는 그 작품의 리메이크라 할 수 있다.

왜 그토록 다양한 흡혈귀가 존재하는 것일까

그 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도 브람 스토커의 원작을 바탕으로 ‘드라큘라’(1992)를 만든 바 있다. 게리 올드만이 우아함과 야성을 겸비한 드라큘라로 분한 작품이었는데, 호러물이라기 보다는 로맨틱 판타지에 가깝다. 요란벅적하고 화려한 영상과 액션이 볼거리라면 볼거리였다. 원작과 스토리도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무르나우나 헤어조크의 작품도 원작에선 기본 설정만 가져왔다.

브람 스토커의 소설은 공포물뿐 아니라 서간체 문학의 명작으로도 회자된다. 한국 번역본도 여러 종인데 모두 500페이지가 넘는다. 하지만 실제로 드라큘라가 등장하는 장면은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럼에도 소설 전체에 드라큘라의 존재감이 커다랗게 드리워져 있다. 주인공들이 주고받는 편지의 배면에 드라큘라는 암운처럼 떠다닌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괴이한 존재의 그림자가 독서하는 방안의 벽면에 실제로 어슬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그 으스스한 서슬이 책장 넘기는 손끝을 바투 긴장하게 한다.

지금에야 여러 형태의 흡혈귀 형상에 익숙해져 있지만, 소설이 발표됐을 당시 독자들이 느꼈거나 상상했을 흡혈귀는 과연 어떠했을지 짐짓 궁금해지기도 한다. 수 백 편의 영화에서 묘사한 흡혈귀는 대개 비슷하다. 송곳니와 뾰족한 귀 등 그 형상을 굳이 세세하게 나열하지는 않겠다. 닐 조던 감독이 연출한 ‘뱀파이어와의 인터뷰’(1994)에서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는 지나치게 수려해서 자진해서 피 빨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죽지 못하는 자,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의 비애와 고통이 유려하게 드러난 작품이었는데 앤 라이스의 원작을 비교적 잘 살려낸 영화였다.

흡혈귀가 인간에 대해 알려주는 것들

그밖에도 다양한 흡혈귀들이 영화에 등장했었다. 아벨 페라라가 연출한 ‘어딕션’(1995)은 현대 뉴욕을 배경으로 굉장히 철학적인 사변이 난무하는 작품이었다.(여주인공이 철학 전공 대학생이다) 크리스토퍼 워큰이 연기한 흡혈귀는 삶과 죽음, 선과 악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아벨 페라라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 보는 이에 따라 욕지기가 올라올 수 있을 정도로 지리멸렬하고 난해한 영화다. 시종일관 우중충한 흑백 화면은 음산하기 짝이 없고 흡혈귀가 내뱉는 고뇌의 사변은 키르케고르와 니체가 한몸에서 싸우고 있는 느낌마저 줄 정도다. 인간이 아니거나 인간을 넘어선 존재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고뇌를 발설하는 모습. 인간이 짊어진 삶의 굴레라는 게 어쩌면 인간 아닌 괴물의 저주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했었다. 내겐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모두 한동안 흡혈귀 관련 영화들을 두루 훑던 시절에 찾아봤던 작품들이다.

왜 그랬을까, 라는 건 당시에도 떠올랐던 자문이다. 유치하고 황당하기 짝이 없는 B급 오락물들도 다수였지만, 뭔가 삶의 본원적인(혹은 문학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의 기제일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죽지 못하는 존재, 사람의 피로 연명하며 끝끝내 악의 화신으로 어둠 속을 방황해야 하는 존재라는 설정이 징그럽게(?) 매혹적이었다고나 할까.

모든 전설 속의 괴물이나 이방의 존재는 결국 사람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대리물이다. 욕망과 공포의 근원에는 대상에 대해 무지하거나 대상이 ‘미지의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잘 아는 것, 익숙하고 친근한 것에 대해 인간은 욕망도 공포도 느끼지 못한다. 욕망과 공포는 그렇게 한몸이어서 때로 악이나 원한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악마나 괴물을 상상해내는 건 어떤 도덕적 규율이나 종교적 관념에 의해 억압된 욕망을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으로 삼는 까닭이다.

괴물의 얼굴을 한 순수성의 화신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는 고야의 그림은 중세 이후로 짓눌려온 무의식적 욕망의 파괴성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인간은 인간이라는 여러 제약과 한계 탓에 끊임없이 악과 괴물을 생산해낸다. 발현되지 못했거나 표출하지 못하는 욕망은 폭력적으로 비틀어져 여러 형태의 ‘타자’를 구성하여 엄단과 처벌을 감행하기도 한다. 마녀사냥이나 어떤 식의 혁명적 학살은 인간의 그러한 속성에 기인한다.

나와 다른 것, 혹은 내가 할 수 없는 것, 또는 내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는 그런 의미에서 성취 불가능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반증하거나, 이룰 수 없는 욕망의 기저를 자극하는 것에 대한 경원과 질시의 이면일 수 있다. 이것은 일상적으로도 허다하지 않던가.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거나 흡혈귀처럼 굴게 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세상엔 범죄도 악행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인간의 본질이고, 인간의 한계다.

흡혈귀는 여러모로 초월적인 존재다. 그러면서 동시에 인간 이하이자 신체 능력이 극대화된 짐승의 가상적 표본이다. 십자가와 햇빛이라는 흡혈귀의 취약점이 기독교 신화의 상징을 설화적으로 따온 거라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속성을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잣대로 나누어 온 서양의 역사에서 그에 대적 또는 저항하는 예술적 표현은 고금 통틀어 수두룩하다. 보들레르와 로트레아몽은 대놓고 흡혈귀를 시에 등장시켰다. 사르트르는 그걸 두고 ‘그리스도의 뒷문으로 들어가려는 노력’이라 했거니와, 삶을 통제하고 특정한 규준 아래 인간의 욕망과 자유의지를 제어하려는 세계의 모든 통치력 아래에선 늘 흡혈귀와 같은 괴물들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그 괴물을 악의 얼굴을 한, 어떤 본연한 의지와 순수성의 화신이라 한다면 극언일까.

선과 악의 미묘하고 불분명한 선을 그으려는 건 아니다. 선악은 그어질수록 경계가 흐릿하고, 단정할수록 그 개념 자체를 배반하는 속성을 지녔다. 모종의 악을 변명하지도, 강요되거나 고립된 선에의 희망을 독려하지도 않겠다. 흡혈귀에 대한 나름의 탐구(?)가 어떤 결론으로 내 삶에 작동하고 있는지도 지금으로선 확답할 내용이 없다고 고백하겠다. 다만, 그 많은 흡혈귀 영화 중 유독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영화에 대해서만 일단, 짧게 얘기하겠다. 초반에 언급했던 베르너 헤어조크의 1979년도 작품 ‘노스페라투’이다.

흡혈귀를 연민한다고?

실제의 몸보다 그림자가 더 크고 공포보다는 좌절된 욕망과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 민머리로 꾸부정하게 다가와선 루시의 몸을 더듬는 모습에서 거세된 노인이나 미발육의 어린아이를 연상한 건 기이한 연민(?) 탓이라고나 해 두자.

나스타샤 킨스키의 아버지인 클라우스 킨스키가 흡혈귀로 나온다. 브람 스토커의 원작에서도 주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루시 역할은 이자벨 아자니가 연기했다. 앞서 무르나우 작품의 리메이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 작품과도 디테일에선 많이 다르다. 잘 알려진 스토리를 나열하지는 않겠다. 베르너 헤어조크와 클라우스 킨스키의 애증은 유명하기도 하거니와, 괴팍한 기행과 악행으로 악명 높은 둘의 시너지가 이 작품에서는 가히 으스스하고 처량한 기운을 내뿜으면서 내가 아는 한, 가장 기묘한 흡혈귀를 탄생시켰다고나 말하겠다.

클라우스 킨스키가 연기하는 흡혈귀는 특유의 무시무시한 외모와는 자못 상반된 이미지를 연출한다. 음산하고 음흉하고 기괴한 모습은 응당 그러하다 쳐도 어딘가 처량하고 노쇠하고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 또한 그러하다. 남루와 초췌, 극한의 고독과 오해에 찌들어 스스로 죽지 못하는 폐인 같은 인상이 다분하다(이에 비하면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톰 크루즈와 브래드 피트는 지나치게 귀족적이다). 흡혈귀보다 더 창백한 얼굴에 몽롱한 눈동자를 지닌 루시의 얼굴과 대비하면 그 처량함이 더하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진짜 흡혈귀는 루시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루시가 흡혈귀를 죽이기 위해 스스로 흡혈귀에게 몸을 맡기는 장면은 이 영화의 극점이다.

루시가 홀로 누워있는 어두운 방에 흡혈귀가 찾아 들어온다. 실제의 몸보다 그림자가 더 크고 공포보다는 좌절된 욕망과 슬픔이 더 크게 느껴진다. 민머리로 꾸부정하게 다가와선 루시의 몸을 더듬는 모습에서 거세된 노인이나 미발육의 어린아이를 연상한 건 기이한 연민(?) 탓이라고나 해 두자. 무슨 연민이냐고? 일단 그 장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자세한 건 다음 주에 얘기하겠다.


강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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