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씬드로잉] 내가 흡혈귀에 사로잡힌 이유2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

흡혈귀는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다. 특별한 저주(햇빛이나 십자가 등에 의한 처형)가 없다면 영생하기 때문이라고 일단 말해 두자. 사랑의 충동이 인간의 한계 조건에서 발생한다고 얘기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러하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가 삶의 충만과 희열을 역설적으로 불러일으킨다는 건 잘 알려진 철학적 가설이다. 평범한 인간에게도 사랑은 삶의 어떤 순간 또는 어떤 대상을 영원으로 치환시켜 자신의 존재를 유일무이한 것으로 승화하기 위한 노력에 다름아니다.

흡혈귀에게 사랑은 죽을 수 없음의 형벌

흡혈귀에게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건 이런 점에서이다. 흡혈귀는 홀로 고립된 채 살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에 더 누군가의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게 된다. 그러나 흡혈귀의 사랑은 결국 죽음을 죽음 자체로 현세에 고정시켜 인간의 유한성을 말살하게 된다. 흡혈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자는 결국 자신도 흡혈귀가 되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존재로 변한다. 이때, 사랑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가 된다. 인간의 모든 사랑 이야기 역시 축복과 저주를 동전의 양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흡혈귀 설화는 결국 인간이 존재하는 한 방식에 대한 커다란 환유임에 분명하다.

흡혈귀가 인간과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의 영화는 부지기수다. 덴마크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렛미인>은 덴마크와 미국에서 각각 두 개의 버전으로 만들어졌다. 새삼 스토리를 나열할 것도 없이 유명한 영화다. 흡혈귀 소녀와 왕따 소년의 애정을 통해 신비와 동심, 영원과 유한, 고독과 분노, 사랑과 비극 등을 유려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거기에 덴마크의 한(미국 버전에선 뉴멕시코) 빈민가를 배경으로 여러 인간 군상들의 비참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냄으로써 흡혈귀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삶의 어느 사각지대를 설득력 강하게 그려내기도 했다. 흡혈귀의 사회학적 존재불가피성(?)을 묘파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의 적나라한 표현

그 밖에 B급 에로물 형태의 영화는 수다하다. 흡혈귀가 지닌 에로티즘을 노골적으로 인용하는 방식인데, 사랑을 나누며 피를 마시고 상대마저 흡혈귀로 변하게 해버린다는 설정은 조르주 바타유가 설파한 에로티즘의 본질, 즉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라는 명제를 액면 그대로 시각화한다. 작품의 질적 수준이나 가치를 논외로 하고 하는 말이다.

그런 설정은 허다한 좀비물과 언데드 크리처들을 등장시킨 20세기 중후반 이후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일종의 클리셰가 됐다. 결국, 피와 온기, 어떤 집단적 이질성이나 그로 인한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한계들을 은유하는 체계로 이어져 하나의 영화사적 줄기를 구축하며 꾸준히 반복되어온 것이다.

그러한 은유 체계는, 그것이 은유인 만큼 여러 상반된 의미를 생산하게 된다. 흡혈귀의 부정성, 요컨대 타인의 피를 빨아먹는 행위와 사악한 이미지는 악마의 현존으로 표상되는 경우가 많지만, 인간과의 불가능한 사랑이나 그로 인한 비극적 로맨스로 흐를 때 흡혈귀의 존재는 매혹적이지만 사랑하거나 동정할 수 없는, ‘치명적인 연인’으로 둔갑하기 일쑤다. 그럴 때 흡혈귀는 가련한 존재가 된다.

세상의 어두운 곳에 숨어 혼자만의 고뇌에 사로잡힌 채 전 세계와의 피비린내 나는 응전을 도모하는 존재는 장엄한 동시에 추레하고 나약하기 그지없다. 거기서 투사되는 건 세상의 몰이해와 일방적 규칙에 전 생애를 걸고 맞서는 고독한 혁명가나 예술가의 이미지다.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만 결코 사람들과 섞이지 못하는 그는 결국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마저 괴물이 된다. 자신만의 고성이거나 동굴 같은 밤의 깊은 서슬 아래에서 그는 제왕적인 능력으로 홀로 군림하지만, 햇빛 아래에선 그저 위험한 박쥐 한 마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죽을 수 없음을 질병으로 끌어안은 채 수 세기 동안의 밤을 헤맨다. 그 형상이 도깨비를 닮아 보이거나 성화 속 악마의 얼굴이거나 무해하고 순진한 소녀의 얼굴이거나 하는 건 결국 인간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하다. 그러한 흡혈귀의 다중성을 표현하는 데 영화만큼 적확한 매체가 어디 있겠는가.

피는 까맣고 사람은 하얗고 풍경은 잿빛

흡혈귀는 영화가 탄생한 이후, 줄기차게 반복복제되어온 아이템 중 하나다. 어둠과 빛, 선과 악, 악마와 연인, 죽음과 영원, 섹스와 변신이라는 테마는 삶과 우주의 모든 양상을 되비추면서 아주 자극적인 방식으로 영화의 기술적 원칙들과 결합되어 왔다. 새삼 영화란 게 무엇인지 돌이켜보면 이 점은 분명하다. 영화는 결국 빛과 어둠의 변증법에 바탕을 둔, 빛과 어둠의 기술적 작란(作亂)과 착란의 소산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영화가 표현 불가능한 것들이 없어지는 현 상황에서 돌이켜 볼 때, 어쩌면 더이상 영화로 표현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들이 많아질지도 모른다는 역설적 가정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흡혈귀의 운명과도 비슷하지 않은가. 모든 게 가능해질수록 (영생할수록) 아무것도 가능할(삶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지는 상황. 이건 과연 억측이기만 할까.

흡혈귀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의 운명(?)까지 걱정하고 있는 내가 어쩌면 흡혈귀처럼 공감받지 못할 상념에 사로잡힌 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영화 자체의 물성 혹은 영화의 본질 따위를 궁구하는 게 아주 미친 짓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흡혈귀 영화들은 내게 아주 흥미로운 자료이자 질료이자 형상으로 작용한다. 무성영화 시대의 거장들 – F.W. 무르나우나 칼 드레이어 같은 감독들이 각각 나름의 흡혈귀 영화들로 영화사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나는 영화의 그러한 기술적 특징과 원천적 한계에서 살피게 된다. 그러면서 꽂히게 되는 게 영상의 물리적 색감이다. 나로서는 흡혈귀는 흑백일 때 더 표일하고 실재적이다. 흡혈귀 자체가 흑백의 삶을 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흑백에서 피는 검고 사람은 하얗고 풍경은 잿빛이다. 그래서 신비감과 이물감이 더 선연하다. 흡혈귀를 소재로 한 흑백 영화 한편 소개하면서 지리멸렬한 ‘흡혈귀론’을 갈음하기로 한다.

사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게 된 건 애나 릴리 아무푸르 감독의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2015)를 보고 나서였다. 소녀 뱀파이어와 소년의 사랑이라는 설정은 <렛미인>을 연상케 하고 시종일관 느릿느릿 전개되는 흑백 영상은 무성영화뿐 아니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어떤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지루하기도 오묘하기도 답답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론 흡혈귀에 대한 발랄한 풍자 같은 게 느껴져 흥미로운 영화였다. (대개의 관람 리뷰는 혹평 일색이었다.)

한 소녀 흡혈귀가 밤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일을 벌인다. 그리고 스스로를 ‘드라큘라’라 칭하는 한 순진하고 발칙한 소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잔잔하고도 사려 깊고 풋풋한 밤의 이야기들

영화 자체가 흡혈귀 아니었던가

앞서 ‘영화의 운명’ 운운하기도 했거니와, 온갖 특수효과와 첨단 기술이 횡행하는 요즘 영화판에 이런 스타일의 영화들이 종종 분위기를 환기시켜주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손님 안 들고 투자자들은 난색을 표하기 딱 좋고, 향후 감독은 흡혈귀처럼 고립될 지도 모를 영화지만, 그저 100여 분 바라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고독한 휴식을 취하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여태 본 온갖 형태의 흡혈귀들이 뇌리에 오버랩됐다가 지워졌다.

그 많은 흡혈귀들의 죽지 못하는 후예로서 한 소녀 흡혈귀가 밤마다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일을 벌인다. 그리고 스스로를 ‘드라큘라’라 칭하는 한 순진하고 발칙한 소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면서 벌어지는 잔잔하고도 사려 깊고 풋풋한 밤의 이야기들. 영화가 돌봐야 할, 그러나 배척 당한 어느 작은 골목길에서 세상의 모든 영화들에게 조용히 자신만의 존재감을 흡혈의 그림자 위에 모노톤으로 시위하는 듯한 영상. 그 의외의 포근함이 꽤나 아팠다. 흡혈귀는 결국 인간의 가장 나약하고 첨예한 욕망의 분신 아니었던가. 자신에게 내재하면서도 인간으로서는 풀지도 터뜨리지도 못할 욕망과 본능을 마치 다른 이의 시각인 양 펼쳐보여주는 것. 그것이 또 영화의 본분이고 역할 아니겠는가. 영화 자체가 흡혈귀의 속성을 은밀히 발휘하며 100년 넘도록 인간의 감정을 틀어쥐어 왔다고 얘기한다면, 과연 공감하시겠는가. 그러지 못하신다면 영화는 결국 어둠 속에서 시작하고 어둠 속에 실제의 빛이 들면서 끝난다는 사실에 이의를 다실 수는 있겠는가. 흐룹!


강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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