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씬드로잉] 바다에서 태어나는 죽음, 그리고 다른 삶 <그랑블루>

바다는 넘실거리는 액체다. 물리적으론 일단 그렇다. 하지만 바다에 뛰어들면 딱히 그렇지 않은 느낌이 들곤 한다. 이 역시 물리적 현상이다. 바닷속에선 이상한 점착력과 밀도가 사람을 사로잡는다. 몸에 엉기는 느낌과 파동이 다른 세상을 환기시킨다. 오묘하다. 알 수 없는 밀착감과 파동이 생기면서 존재 자체가 변형되는 느낌마저 든다.

분명한 액체임에도 바닷속에선 질감이 사뭇 다르다. 목 마를 때 마시는 물과 전혀 다른 물질인 것만 같다. 몸에서 분출되는 액체의 성질과도 어딘가 이질적이다. 컵에 바닷물을 담가보자. 그저 물 한 컵이다. 마셔보자. 분명 짜고, 이물감마저 든다. 햇빛 아래선 파란빛이었던 게 그저 희끄무레한 구정물처럼 보인다. 뭔가 대단해 보였던 게 실체를 알고 나니 그저 추레하고 뻔한 물질덩어리였다니. 우주와 세계를 고민하는 철학이나 모든 학문이 물 한 컵에 담긴 구정물일 수도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포스터가 더 유명한 영화?

뤽 베송 감독의 <그랑블루>는 포스터로 많이 알려진 영화다. 푸른 바다 한가운데 사람과 고래가 노니는 장면. 1990년대 중반 이후 웬만한 카페나 커피숍엔 푸른 빛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당시 영화는 보지 않았었다. 장 자크 아노, 레오스 카락스와 함께 1980년대 프랑스 누벨 이마쥬의 기수였던 뤽 베송은 그 영화로 할리우드에 안착했다. 푸른 바다와 고래, 그리고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잠수부들의 이야기라는 설정이 당시엔 별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았다. TV에서 방영될 때에도 그저 시큰둥하게 보다 말다 했었다.

박찬욱 감독은 <그랑블루>에 대해 “물 속에서 숨 오래 참기가 뭐 대단한 일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라고 빈정댄 적 있다. 비슷한 심사였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보다는 어디에나 획일적으로 똑같은 포스터를 걸어대는 풍토가 고까웠다는 게 솔직할 거다(짐 자무쉬 감독의 <천국보다 낯선>(1984)과 왕가위 감독 영화 대부분이 포스터로 한 시대를 풍미했었다. 물론 작품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고 떠오른 기억이다). 그렇게 안중에도 없이 지워진 유명한 옛날 영화가 한둘 아닐 테다. 그러다가 문득 새롭게 눈이 가는 경우가 있다. 너무 유명해서 보지 않고도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영화나 소설들. 그런데 모종의 편견과 기존 잣대들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짐짓 새로운 작품으로 변해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랑 블루’의 스토리와 주제는 단순하다. 20년 지기인 잠수부들 간의 우정과 잠수부와의 만남으로 새로운 세계와 사랑을 깨닫게 되는 한 여인의 이야기. 장 마크 바(자크 역)나 장 르노(엔조 역)나 로잔나 아퀘트(조안나 역)나 모두 개성 강하고 훌륭한 배우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엮어가는 우정과 애정 스토리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큰 맥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진짜 주인공은 바다이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바다에 사로잡힌 자가 어찌해서 종국엔 육지에서의 삶과 사랑을 내던지고 바닷속으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것. 나를 사로잡은 건 바로 그 부분이다.

그들은 왜 바닷속으로 사라져야 했을까

자크는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내어 먹고 사는 아버지 아래서 자란다. 그러다 결국 아버지도 바다가 삼켜버린다. 같은 마을에 살던 꺽다리 골목대장이자 잠수 천재 엔조와의 우정은 그때부터 이어진다. 20년 후 엔조는 세계 프리 다이빙(무호흡 잠수) 세계 챔피언이 된다. 엔조가 자크를 잠수 대회에 끌어들이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스토리의 기본 줄기는 둘 간의 경쟁과 우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자크와 조안나의 사랑은 거기에 부가되는 또 하나의 줄기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바다를 스펙터클 삼은 인간들 사이의 애정과 갈등은 그닥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엔조도 자크도 모두 바닷속으로 사라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유럽 판과 미국 판의 결말이 약간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본 건 2013년도 감독판이다.

눈에 확 잡힌 장면은 엔조가 자진해서 바닷속으로 사라진 후 자크가 잠을 자면서 꿈을 꾸는 모습이다. 천장으로 물이 새어 들어오더니 허공에서 바닷물이 요동친다. 자크가 손을 뻗어 바다를 움켜쥐려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악몽 같기도 환몽 같기도 한데, 조안나가 자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왠지 태몽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중에서 몸을 덮치는 파도라는 설정은 누군가에겐 무시무시한 악몽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자크의 최초 반응도 가위에 눌린 듯 호흡이 막히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다가 바닷물이 크게 물결치면서 고래 떼가 나타난다(드로잉한 장면 바로 뒤다). 그때부터 상하가 역전된다. 자크는 바닷속에서 어릴 때부터 그랬듯 고래들과 어울려 물속을 헤엄친다. 그 순간, 자크의 표정이 더없이 행복하고 안온해 보인다. 그러고는 깨어나 보트를 타고 바다로 향하려 한다.

조안나의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자크가 바다에서 끌어올린 자신의 또다른 생명과도 같다. 그것은 죽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한계와 숙명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깨어났을 때, 자크는 코피를 흘리고 있다. 꿈의 수압과 현실의 공기압 차이가 몸에 반영된 탓일 거다. 조안나는 그런 자크를 뜯어말리려 한다. 임신 사실도 그때 고백한다. 자크는 잠깐 멈칫한다. 하지만 애절하게 붙드는 조안나를 흘깃 바라볼 뿐, 자크는 끝내 바닷속으로 들어가 고래들과 어울린다. 그러면서 엔딩.

바다에서 죽어, 바다에서 영원히 살다

앞서 자크의 꿈이 태몽 같아 보였다는 건 농담이 아니다. 자크는 조안나를 통해 사랑을 깨닫고 삶의 또다른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상황에서도 바다의 끈질긴 구애를 뿌리치지 못한다. 자크는 자신이 원래 살던 곳, 지상의 공기보다도 더 친근하고 평화로운 바닷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낳으려 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안나의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이는 자크가 바다에서 끌어올린 자신의 또다른 생명과도 같다. 그것은 죽어야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의 기본 한계와 숙명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엄홍길 대장은 “산에서 신을 보았다”고 얘기하면서 “산이 받아들여야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한 적 있다. 바다도 마찬가지일 거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에는 ‘미친 짓’으로밖에 안 보이는 모험에 사로잡힌 자들. 그들은 어떤 식의 죽음을 삶 안에 내장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일상적 안온함은 때로 그들에게 죽음보다 더 심한 고통 속에 놓이게 할 수도 있다. 자크의 경우, 육지에서 평안하게 가정을 일구는 일이 자신의 숨통을 틀어쥐게 되는 악몽이 될 수도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바다에서 스스로를 가꾸었고, 바다를 통해 삶의 모든 의미와 충만감을 익혔기 때문이다. 그는 일종의 반인반어다. 먼 옛날 육지에서 살던 포유류였던 고래가 바닷속으로 삶의 거처를 옮겼듯 자크는 결국 바다에서 죽어, 바다에서 영원히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어떤 사소함도 누군가에겐 거대한 일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꾸지도 감행하지도 않는 어떤 은밀하고도 독자적인 모험들이 있다. 산이나 바다 등 자연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지만, 방식은 여러 가지다. 도심에서 숨가쁘게 뛰고 달리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종류도 다양하다. 발만 삐끗해도 이생과 굿바이하게 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거기에 매달린다. 그 외, 굳이 몸을 극단으로 놀려야 하는 게 아니더라도 또 누군가는 자기만의 중독된 세계에서 홀로 분투하기도 한다. 자전거나 모터사이클을 분신처럼 여기기도 하고, 기타나 드럼에 빠져 모종의 궁극을 맛보려 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지 않은 누군가는 도대체 왜 그런 것에 심취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박찬욱 감독처럼 “물 속에서 숨 오래 참기가 뭐가 대단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일 수 있으나, 도무지 그것이 아니고는 삶의 핵심을 스스로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도 여전히, 어디에나 존재한다.

서두에 컵에 담긴 바닷물을 언급했었다. 그저 희끄무레한 액체일 뿐이다. 하지만, 다시 고개 돌려 바다를 보자. 그 어떤 거대함도 사소한 것들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가치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컵 속의 물에 중독된 자들에게 그 물을 끊어 버리라고 한다면? 정말, 매일매일 코피 터지는 일상이지 않을까.


강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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