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달을 일부러 놓치다
어제 (2022년 양력 11월 8일) 개기월식으로 붉은 달이 떴다는데 보지 못했다. 뉴스를 통해 알고는 있었으나 일부러 창밖에 고개 내밀어 올려다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보고 싶었음에도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이상한 심리다.
배우의 얼굴을 오래 보다 들키는 건 결국 모든 색을 탈거한 내 알몸밖에 없더라. 그래서였을 거다. 실제론 없던 코 옆에 커다랗고 동그란 뾰루지를 그려 넣게 된 이유는. 물론 내 얼굴에도 저건 없다. 그러나 내 안 어딘가에,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뾰루지는 계속 돋아나고 자라나 불쑥 모든 걸 까발릴지도 모를 일이다. 느닷없이 붉게 분칠한 달의 변덕처럼.
200년 후에나 다시 나타날 현상이라지만, 그땐 나도 내 친구도 나의 원수도 나의 사랑도 다 지구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지구도 사라져버린 후일지 모른다.
만물이 언젠가 사라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알고 지내던 누군가의 죽음이나 모르는 사람의 떼죽음이나 모든 죽음은 누군가의 빈 자리가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동굴 속 박쥐처럼 매달려 살아서 느껴야 할 모든 감정의 질곡과 싸워야 한다. 그래서 그 자리는 차라리 더 큰 삶의 구렁이자, 그 구렁의 진실이다. 산자는 때로 웃기도 울기도 분노하기도 좌절하기도 하면서 무시로 교차하는 빛과 어둠의 칼날에 자신의 얼굴과 심장과 항문마저도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붉은 달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암묵과 외면으로 피칠갑된 누군가의 오욕처럼 여겨졌던 것은.
자연의 기현상을 단지 기현상만이라는 이유로 너도 나도 새삼스레 고개 쳐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려 하는 심리는 자연이 애초에 기이하지 않다고 믿고 싶어하는 인간의 불안과 허영의 조합물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런데, 자연은 스스로 기이하다 여기지도 선전하지도 않으면서 기이하기 짝없다. 자연의 부분인 인간 역시 스스로 기이하지 않다 여기거나 믿으면서 기이하기 짝없긴 마찬가지 아니던가.
달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눈 감은 채 애써 모른 체하며 찬 바람을 가둔 이불 속에서 불쑥불쑥 아랫도리부터 음험하게 적셔오는 달빛의 요분질이 더 생생하게 신산辛酸할 수 있다. 달이란 무엇인가. 해가 암시해놓은 해의 비밀이거나, 어둠이 품고 있는 더 깊은 우주의 눈이거나, 그것들을 통튼 세계의 숨겨진 민낯 아니겠는가. 내게 영화는 현실에선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던 그 ‘숨은 눈’의 시선이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스스로 감추려고 했거나 때론 더 깊이 파고들어 부러 뒤집어놓으려 했던 욕망, 분노, 슬픔, 환희 따위를 반사시킨다.
영화는 그것을 보고 있는 나를 들여다보고 발가벗기며 요망을 떨게 한다. 그런 점에서 모든 영화는 심리 포르노와도 같다. 오감을 열고 닫고 분란을 일으키다가 붕뜬 하늘의 빛살처럼 순식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다. 모든 영화는 어둠에서 출발해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두 시간여 몰두했던 시간이 신기루나 금세 코끝에서 지워진 훈향熏香처럼 몽글몽글 불투명한 형상들을 낮꿈 끝자락의 먼지 부스러기처럼 띄워놓은 채 스스로를 낯설게 만든다. 몸속 뼈다귀들의 내밀한 균열상을 뢴트겐 사진처럼 되비추는 그러한 작동들을 내 손으로 붙들고 싶다는 오도된 충동이 기어이 나로 하여금 연필을 쥐게 만들었다. 그 시작이 오늘이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 닮았고 안 닮았고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되새기고 곱씹고 자꾸 들여다보면서 어딘가 홀린 듯 정신줄 놓고 장면 자체에 몰두하는 게 일차적이고도 궁극적인 목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영화를 일러 ‘봉인된 시간’이라 일컫지 않았던가. 그 ‘봉인’을 풀어 우주의 심급을 만지거나 영상으로 물질화된 인간의 마음을 캐내겠다는 의도 따위 없다. 결국 이것은 뒤틀린 자기 초상을 섣부르게나마 내 손으로 본을 떠 시간 속에 남겨보겠다는 허망한 분투에 불과하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나는 빛의 작란으로 불쑥불쑥 내 속을 헤집는 영화의 보이지 않는 손을 붙들어 그 손가락을 빨며 붉지도 파랗지도 않은 피를 수지침 놓듯 뽑아내고 싶을 뿐이다.
서로를 껴안으면서 서로를 찌르다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1995)은 인간의 허위와 가식, 허영과 무지, 애정과 불신, 사랑과 폭력의 비틀린 총체를 한데 버무려 결국 텅 빈 눈동자만을 남긴 영화로 내게 남아있다. 한 부르주아 가정에 가정부로 들어간 소피(상드린 보네르)는 문맹이다. 그 사실을 가족들에게 숨기려 소피는 늘 전전긍긍이다. 그러면서 결국 끔찍한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수치심과 콤플렉스 때문일 거라고 쉽게 추측하지는 말자. 사람의 유별난(그런데 이 ’유별‘은 당사자에겐 결코 유별나지도 기이하지도 않다) 심리와 감정을 개념화된 몇 개의 단서와 일반 잣대만으로 규정하는 것만큼 저열한 모욕도 없다. 그렇다. 이 영화는 어떤 모욕감을 빌미로 폭발하는 인간의 섬세하고도 뒤틀린 심리와 행동에 대한 적나라한 임상 보고서다.
어떤 심리적 내상을 공유하는 사람끼리 금세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기만의 내면적 그물을 은연 중 던져놓고는 몇 개의 매듭과 그물코가 맞아떨어지는 순간, 소위 ’친구‘라는 관계가 형성된다. 처음엔 딱 맞는 부분만 보일 뿐, 그것들이 어떤 이유로 일순간 딱 맞게 되었는지 따지는 것은 뒷전이다. 하지만 그 딱 맞는 구석을 계속 딱 맞도록 꿰어가다 보면 어김없이 뒤엉키고 배배 꼬인, 애초부터 딱 맞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듬성하고도 치명적인 구멍만 남게 된다. 애정과 신뢰의 물고기는 그 구멍으로 순식간에 달아난다. 모종의 공범의식과 유대감이 결국 총부리를 상대에게 돌이대게끔 만드는 일은 역사에서도, 일상에서도 다반사다. 특유의 직설과 과감성으로 소피의 친구가 되는 잔느(이자벨 위페르)는 그런 의미에서 강렬한 햇빛처럼 소피를 비추다가 소피의 격정을 도발하고는 스스로를 달의 뒤편으로 숨겨 사라져버리는 어긋난 빛의 그물과도 같다. 둘 사이에 남는 건 결국 또다른 의심과 위선의 그림자, 그리하여 드리워진 어둠뿐이다. 둘은 서로에게 거꾸로 휘어 스스로에게 날아와 박힌 화살촉과도 같다.
영화에서 그런 심리적 역류는 또 있다. 소피의 문맹을 눈치챈 그 집의 딸 멜린다(비에르지니 르도엔)와의 관계다. 멜린다는 소피에게 글을 가르쳐주겠다고 하지만, 소피는 다른 가족들에게 자신이 문맹임을 들킬까 봐 멜린다의 친절을 비틀린 겁박으로 응대한다. 또 하나의 미미한 그물코가 끊어지고 뒤엉키는 부분이다. 그리하여 그 역시 파국의 빌미가 된다. 총격과 폭력과 피비린내와 비명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배경으로 진행된다. 파괴된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에 울려 퍼지는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선율은 천국과 지옥이 협연하는 인간사의 음울한 레퀴엠처럼 들린다. 아름다움은 피를 먹고 자란다, 는 식의 해묵은 미적 아이러니와 알레고리가 이쯤 되면 꽤 표일하다.
얼굴 아닌 마음속 뾰루지를 만지작대다
스케치한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1초 후에 엔드크레딧이 오른다. 불빛이 아른거리는 어둠 속에서 소피가 바라보는 건 출동한 경찰들이다. 그녀는 도주 중이다. 자신이 벌인 참극과 그 원인이 되었던 그 모든 모욕과 분노와 절망과 불신 들 마저도 팽개치고 달아나려다 깜빡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그 옆에 메마르나 왠지 살기가 서려 있는 나무의 실루엣이 다 타버린 열기 끝의 잔영인 듯 연기처럼 흩날린다. 나무도 사람도 움직이지 않으나 소피가 바라다보고 있는 수런거림들이 한 프레임 안에 병렬된 형체들 속에서 파국의 뒷얘기들을 속삭이고 있는 느낌이다.
잠시 후 떠오르는 크레딧의 글자들은 여태까지 마구 뒤엉킨 소동들과 아무 상관없다는 듯 건조하게 다른 이름들을 나열한다. 영화 속에 있는 자와 영화를 만든 자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또다른 누군가가 이렇게 아주 잠깐, 임의로 끼워 맞춰진 사각의 시간 틀 속에서 각자 다른 말을 썼다 지운다. 나는 결국 그 상태에 사로잡힌 내 모습을 그린 것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리고 그게 영화가 현존하는 한 방식 아니겠는가.
늘 떠있는 달이 새삼 자신을 보라고 불현듯 붉은색으로 치장했단다. 그러나 내가 색맹이라면 그 달은 여전히 하얄 것이다. 스스로를 눈요깃거리 삼아 온 존재를 빨아들이는 위력. 배우의 얼굴을 오래 보다 들키는 건 결국 모든 색을 탈거한 내 알몸밖에 없더라. 그래서였을 거다. 실제론 없던 코 옆에 커다랗고 동그란 뾰루지를 그려 넣게 된 이유는. 물론 내 얼굴에도 저건 없다. 그러나 내 안 어딘가에,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뾰루지는 계속 돋아나고 자라나 불쑥 모든 걸 까발릴지도 모를 일이다. 느닷없이 붉게 분칠한 달의 변덕처럼.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