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씬드로잉] 석양의 빨래엔 핏자국이 여전하다 <용서 받지 못한 자>

빨래는 때로 어떤 경계 같은 느낌을 준다. 더러움과 깨끗함. 과거와 현재와 미래 등 어떤 상태가 반대의 상태가 되는 과정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가끔 그렇다. 그걸 순결과 타락, 선과 악, 죽음과 갱생의 상징으로 추켜올린다면 지나치게 문학적인 수사임에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맑은 날 어느 집 옥상에서 잔잔히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를 쳐다보면서 짐짓 숙연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의 살과 땀으로 범벅되었던 것이 일정한 과정을 거쳐 깨끗하게 변화하는 모습. 또는 완전히 변하여 그 이전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과정에 숨어있을지도 모를 삶의 오의(奧義). 빨래는 물을 거쳐 빛과 열기를 만나 일정한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새것처럼 된다. 반복건대, 완전 새것이 아니라 새것과 비슷하게 된다. 때나 얼룩은 지워졌더라도 살짝 뜯어지거나 보풀이 일거나 후줄근해진 헝겊의 질감은 속일 수 없다. 과거는 그렇게 남는다. 그럼에도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게 된다. 그것을 다시 꿰입는 사람은 어떠한가.

얼룩은 지워져도 질감은 속일 수 없다

석양이 타오르고 빨래가 고요히 백기처럼 나부낀다. 바람도 햇빛도 그 안에 숨긴 핏자국을 지워주진 못한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걸 다시 꿰어 입게 되는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화면 왼쪽엔 짓다가 말았거나 부서지다 만 듯한 집이 한 채 있다. 벌판은 드넓고 지평선 너머엔 석양이 노랗고 붉게 번지고 있다. 일부러 선을 그은 듯 회색 구름이 몰려오는 하늘 위쪽과는 선명한 빛깔로 나뉘어져 있다. 화면 오른쪽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그리고 그 아래 키가 허청허청 큰 남자의 실루엣이 막 자라난 또 하나의 나무인 듯 깡마르게 서 있다. 중앙은 빈 벌판이고 빈 하늘이다. 그 사이에 구부러진 나무 기둥에 매달린 빨랫줄이 있고, 각각 형태와 색감이 다른 빨래들이 무연히 널려 있다. 빨랫줄과 하늘의 색깔 층이 거의 겹쳐있어 언뜻 빨래들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주연의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 자>(1992)의 초반 장면이다.

풍경이 인간의 심리나 감정, 또는 사건의 맥락을 암시하는 건 영화의 주된 기법이다. 카메라에 비친 자연과 인간, 사물과 사건들을 한 프레임에 꿰어 관객으로 하여금 모종의 정서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그건 때론 의도적으로, 또 때론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다. 특정 장면에 감독의 의도가 실려있는지 아닌지는 관객이 정확히 알아낼 수 없으나, 가끔은 저게 의도적이었다면 실망인데, 싶은 장면을 만날 때도 있다. 그림으로 옮겨본 장면도 그랬다. 영화를 보다가, 아니 영화가 다 끝나가는 시점에서 초반에 잠깐 흘려본 장면이 홀연히 되살아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문득, 짧았던 그 장면에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이 무슨 액자처럼 은밀하게 응축되어있지 않았던 건가 싶어지는 것이다. 쓸쓸하고 먹먹한 장면이었다.

열차와 은행을 털던 도둑이자 총잡이로 악명 높았던 윌리엄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총을 놓은 지 11년, 캔사스의 어느 촌구석에서 아들 딸과 함께 돼지를 키우며 살고 있다. 그를 갱생케 했던 아내는 천연두로 죽었고, 돼지들도 전염병에 걸려 생활고에 시달리던 와중이었다. 어느 날 한 젊은 총잡이(제임스 울벳)가 불쑥 찾아와 동업을 제안한다. 한 마을에서 카우보이 두 명이 매춘부의 얼굴에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고도 부패한 보안관(진 해크먼)에 의해 풀려난 사건이 있는데, 두 카우보이에게 1천 불의 현상금이 걸려 있으니 같이 잡으러 가자는 거다. 머니는 고민 끝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의 몸은 예전 같지 않다. 사격연습을 해도 빗나가기 일쑤고, 말을 타다가도 우스꽝스럽게 고꾸라진다. 화면 가득 주름살이 잡히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결국, 무기를 갖추고 집을 떠난다. 빨래가 걸려 있는 장면은 그가 집을 떠나기 직전의 풍경이다. 곧 허물어질 듯한 집과 외롭게 서 있는 나무, 그리고 나무 아래 고해하듯 서 있는 머니. 같은 공간 좌우 끝에 나뉘어 있는 그 둘 사이의 거리가 보면 볼수록 멀어 보이는 건 착시만은 아닐 거다.

서부의 사나이, 서부를 반성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젊은 시절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스파게티 웨스턴 시리즈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였다. 굳이 제목을 나열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그런 그가 감독으로 데뷔한 건 한 사이코 스토커의 얘기를 다룬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를 통해서였다. 이후, 서부극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연출한 서부극은 본작과 <무법자 조시 웰즈>(1977), <페일 라이더>(1985) 등 세 편이다. 세 작품 다 공통되는 지점은 주인공들이 (모두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이 연기했다는 것 말고도) 모두 은퇴한 무법자라는 점이다. <페일 라이더>의 경우 심지어 목사가 되어 있다. 일맥상통하는 개심(改心)의 흔적이랄까. 하지만 중요한 건 겉으로 드러난 사연(?)과 스토리의 유사성이 아니다.

무법자로 명성을 날리던 자가 총을 놓았다가 다시 잡는다는 설정엔 클린트 이스트우드 자신이 명백하게 투사되어 있다. 망토를 멋들어지게 걸치곤 묵묵하게 시가와 권총을 자기 아이템화한 그의 모습은 이미 고전이 되었다. 젊은 시절, 총 잘 쏘는 영화배우로 성공해 거장 시네아스트가 되기까지 수 십 년 세월 동안, 그가 겪어왔을 여러 실존적 부침이 어떠했는지를 굳이 캐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중의 환호와 비난 앞에 반 벌거숭이 상태로 놓이게 되는 숙명을 지닌 사람이라면 순간순간의 영욕이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로 작용하게 되리라는 걸 상상하는 건 힘들지 않다. 예술가에게 작품은 자신의 소중한 결과물인 동시에 때론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나 편견이 강렬한 사람일수록 박수와 돌팔매는 거의 동일한 무게다.

그럴 때, 가공된 이미지 속에 몸을 숨기거나 치장하려 하거나 더 큰 가공으로 자기 자신을 방치하려 한다면 그는 이미 스스로에 대한 배덕자가 된다. <용서 받지 못한 자>에서 그러한 인물 중 하나가 보안관 리틀 빌 태거트이다. 그는 마을에 총기 규제를 시행한 걸 자신의 업적이라 뻐기며 악행을 숨긴다. 살인 금지라는 명분 아래 자신 및 마을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이다. (달아난 카우보이들에게서 그는 말 몇 필을 상납받았다.) 그리고 또 한 명은 영국에서 온 총잡이 잉글리시 봅(리처드 해리스). 뛰어난 총솜씨를 뽐내며 온갖 허세를 떨지만, 그는 미국에 대한 괄시와 영국인이라는 우월감으로 자신을 치장하다가 결국 꼴사납게 도망가고 간다. 그렇다면 윌리엄 머니는 어떤가.

처음에 그는 오랜만에 껴입은 ‘총잡이라는 옷’이 서걱거리는지 줄곧 당하기만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의 혈기와 폭력성과 총솜씨를 되찾으며 결국엔 악당들을 일망타진한다. 그는 승리한 것인가. 악당들을 소탕한 것이 그의 삶을 진정한 구원으로 이끌게 되는가. 영화도, 영화를 본 나도 이 지점에서 판단을 멈춘다. 정통 고전 서부극이라면 아마 그렇다는 메시지를 던질지 모른다. 하지만, 고전 서부극은 선과 악, 적과 동지라는 선이 분명하고, 거기엔 미국식 개척주의 및 그로 인한 약탈의 역사가 미화되어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미국 사람이지만 그를 스타로 만든 건 이탈리아 사람들에 의해 변형된, 약간은 만화적 혼합물을 통해서였다. 미국인이되 그는 이방인으로 여겨졌고, 그런 까닭에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의 젊은 날을 반추하며 소위, ‘서부극을 반성하는 서부극’을 만들게 되었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는 결코 집에 돌아가지 못하리

그의 서부극엔 악인과 선인이 늘 겹쳐 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뿐만 아니라 관객 입장에서도) 어딘가 수상하고 때론 신비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신비는 자체 발광하는 아우라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덧씌어진 모종의 편견과 의심과 경외 탓이다. 알고 보면 십수 년 껴입어 온 낡은 옷인데 말끔히 세탁된 모습을 보고 멋지다고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던가. 경계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과, 그로 인해 익숙했던것을 낯선 것으로 일변케 하는 관념과, 또 그로 인해 무시로 초점이 변하여 누군가를 악인으로도 선인으로도 낙인찍어버리는 잣대와 규정들. 그럼에도 거기서 일탈하여 스스로 고독한 나무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의 이야기. 스스로가 옭아맨 사슬은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끊어낼 수 없다. 설사 끊어내지 못하더라도 끊어내려는 노력이 가중될 때, 비로소 그는 예전과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다. 하늘은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다. 그림 오른쪽 끝에 서 있는 남자는 그림 왼쪽 끝에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집이 이미 무너졌거나, 또다르게 회심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그 집에 살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석양이 타오르고 빨래가 고요히 백기처럼 나부낀다. 바람도 햇빛 그 안에 숨긴 핏자국을 지워주진 못한다. 그래도 어쨌거나 그걸 다시 꿰어 입게 되는 사람 역시, 이전과는 다른 사람일 것이다.


강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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