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는 사실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들이 벌어지는 중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 같은 국제적 규모의 전쟁뿐만이 아니다. 20세기 양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등을 거치면서 세계는 국제적인 전쟁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벌어질 전쟁은 규모와 상관없이 결국 벌어지고 말았다. 전쟁이 거의 세계의 전제 조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
전쟁은 국가 간 분쟁에서 시작하는 듯 보이지만, 그 근원을 따지면 보다 복합적이고 오묘한 인간의 심리적 체계와 연결된다. “인류는 소유를 알게 되면서 폭력에 눈을 떴다”라는 말도 있거니와, 자신(들)만의 가치와 질서를 옹립하고자 다른 방식의 존재 양태들을 흡수 또는 제거하려고 하는 본성이 결국 전쟁의 원인이 된다. 온갖 무기를 통한 살상은 그것의 극단적 방식이다. 인간은 언어와 생각, 또는 감정의 메커니즘에 의해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존재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불편하고 위험하다 여겨 악으로 규정짓는 순간, 전쟁은 일상에서도 항시적이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세 번 영화로 제작되었다. 1930년에 루이스 마일스톤, 1979년에 델버트 맨 감독이 각각 연출했는데, 전자는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후자는 TV용으로 제작되어 골든글로브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22년 새로운 버전이 개봉했다. 독일의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이 연출했다. 원작 소설도 잘 알고 있고 기존 버전들을 흥미롭게 봤음에도(혹은 봤었기에?) 흥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총평은 하지 않겠다. 며칠 전 오스카상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다는 소식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는 사실만 밝히겠다.
원작자인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는 1차대전 참전자였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자전적인 데뷔 소설이었다. 이후 레마르크는 『개선문』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등의 작품으로 20세기 반전소설의 대가가 되었다. 하지만 명예는 곧 비극으로 끝난다. 히틀러 집권 당시 스위스로 도주해 살았었는데 결국 1933년 독일에서 나치에 의해 그의 모든 작품들이 불질러지는 동시에, 독일에 남아있던 여동생 엘프리드 레마르크는 10년 후 2차 대전 중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전쟁이 뿌린 ‘악의 씨’가 연좌제를 통해 또다른 참혹성을 드러낸 셈이다. 전쟁은 이렇듯 또다른 전쟁을 낳는다.
1차대전 참전자의 적나라한 전쟁 고발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영화도 원작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서술 방식과 결말이 많이 다르다.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의 다양하고 디테일한 면모를 조밀하게 다루면서 전쟁을 대하는 인간의 심리와 태도를 다각적으로 살피는 방식으로 작품 전체의 밀도를 고조시킨다. 기존 작품들보다 훨씬 입체적이고 실감 있는 전투 장면 연출은 영화 제작의 기술적 발전에 힘입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자극적 재현이 아닌 인물이 느낄법한 공포와 분노, 슬픔 등이 화면에 누혈처럼 묻어난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할 수 있다.
파울과 보이머 등 17살 김나지움 학생들이 주인공이다. 독일 교육 체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당시로선 진학률이 만만치 않았던 김나지움은 일종의 예비 대학생들을 모아놓은 소년 엘리트 양성소다. 1917년 독일 서부전선에서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중 많은 소년들이 자원 입대하게 된다. 당시 군대에 자원하지 않으면 졸장부라 비난받을 정도로 독일 사회엔 민족주의 정서가 만연했다. 독일 뿐 아니라, 그 이전 시대까지 민족 간 이합집산이 심했던 유럽 전체가 민족주의 열풍에 시달릴 때였다. 1차 대전의 원인은 그런 복잡한 민족 간 국가 간 정체성 증명 과정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런 과도한 믿음과 배타주의엔 아무리 명석한 이성과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도 집단적 열기 안에 일개 미미한 원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파울과 보이머도 그 열기에 휩싸인, 똑똑하나 아직은 경솔한 소년들이었다.
영화는 참호전의 참혹한 현장을 핍진하게 그려낸 인트로로 시작한다. 그러곤 소년들이 입대하기 위해 부모의 도장을 몰래 훔쳐 장난스레 자원서에 서명하는 모습 등 언뜻 발랄한 톤으로 시작된다. 훈련소에 입소해 전사자의 군복을 물려 받아 훈련 받는 모습만 보면 그저 철모르는 오합지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죽음과 배고픔과 공포로 범벅된 야수로 변하는 건 단 몇 주만이다. 매일 매일 서부전선의 진흙탕에서 사투가 벌어진다. 그때 한켠에선 휴전 협정이 진행된다. 최전선의 피비린내와는 딴 세상인 듯 으리으리하게 차려진 공간에서 양국의 고위장성들이 기 싸움을 한다. 전세는 프랑스 측이 유리하다. 양국 대표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일개 파리만도 못해진 병사들은 고작 몇 백 미터 규모의 땅을 사수하려 피투성이가 된 채 생과 사의 곡예를 펼친다.
전쟁의 속살을 발가벗기는 카메라
한 명의 개인이란 그때 존재하지 않는다. 도장을 찍네 마네 하는 권력과 통제의 서슬 아래 개인은 그저 생각도 감정도, 인간으로서의 최소 존엄마저 압살 당한 채 코앞의 죽음과 동거할 수 있을 뿐이다. 전쟁의 가장 큰 비극은 한 개인의 자유의지가 또다른 인간 집단에 의해 불필요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소위 ‘계급이 깡패’라는 군대 관련 오랜 속설도 있을 만큼, 자신의 모든 선택권이 상실당한 사람은 결국 노예만도 못하다. 그건 아군 적군 무관하다. 상관이 곧 죽음의 담지자이자 삶의 동아줄이 된다. 이러한 상하 주종에 의한 인간 역학의 비정함은 총탄이 나부끼는 전쟁터가 아니더라도 일상적으로 볼 수 있지 않던가. 타인의 자유를 뺏어 자신의 목적과 이득을 위한 도구로 삼으려는 욕망 역시 전쟁만큼 폭력적이다. 100여 년 전을 배경으로 제작된 피비린내 투성이 영화가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언제든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섬뜩한 내면을 통찰하는 듯 여겨진 건 그 까닭인지도 모른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탈장 때문에 면제 처분을 받았음에도 1차 대전에 자원해서 참전했었다. 당시 25살의 늙은(?) 군인이었다. “강렬하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상대국인 프랑스의 시인 조에 부스케도 자원 입대자였다. 그는 척추에 탄환이 관통하는 부상을 입고 평생 하반신 불구로 살았다. 민족주의 열풍 및 애국심 뿐 아니라, 전쟁이 불러일으키는 극단적인 삶에의 충동은 이렇듯 인간을 스스로 죽음과 맞서게끔도 한다. 그 역시 일설로 풀이할 수 없는 인간의 지난한 본성이다.
민족의식이나 애국심은 어떤 집단적 열풍에 묻어난 가짜 명분일지도 모른다. 혈기방장한 소년들도 그런 열망에 휩싸였던 것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비트겐슈타인과 조에 부스케의 선택은 앞서 말한 것과 모순되는 일면일 수도 있다. 개인이 말살될 수밖에 없는 현장엘 제발로 들어가 더 강력하게 ‘자기 자신’임을 느껴보고자 하는 충동. 그리고 그 충동으로 백팔십도 변해 버리는 이후의 삶. 그런 식으로 비극을 자처한 인간들이 이룩해 놓은 전대미문의 철학적 업적과 살아있는 채 죽음을 꿰뚫어버린 듯한 불가해한 문학의 심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누군가에겐 또다른 전쟁일 것이다. 전쟁을 막고자 벌어지는 전쟁도 있고, 전쟁의 근원을 뿌리뽑고자 치뤄지는 전쟁도 있다. 전쟁은 그만큼 아이러니하다. 전쟁 중에는 어떤 게 근본적인 선인지 악인지 종잡을 수 없어진다. 삶이 아이러니 투성이니 그럴 것이다. 단순 논리화하자면, 삶은 곧 전쟁이라는 결론이 나오는 것인가. 섣부른 정답은 내놓지 않겠다.
전투를 끝내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전쟁
참호에서 죽어나가는 병사들에게 곧 성사될 것 같은 휴전은 신기루이자 희망 고문이다. 지리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휴전 협정은 성사되고, 15분 후 양국 병사들은 총구를 거두어야 한다. 친했던 모든 동료를 잃고 끝끝내 살아남은 파울은 마지막 전투가 끝나고 귀향을 준비하게 된다. 그 순간, 여전히 자신의 욕망과 명예의 망념을 고수하는 한 고집불통 장성이 병사들을 도열케 한다. “조국과 군인의 명예를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최후의 으름장이 숫제 좀비가 되어버린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귀향은 미뤄지고 다시 전투 개시다. 포스터로 사용된 파울이 뒤돌아보는 모습은 그 장면이다.
막 참호를 떠나려는 프랑스군 진지에 날벼락이 떨어진다. 돌진해 온 독일 병사들과 최후의 육박전이 펼쳐진다. 몸도 마음도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 양국 병사들이 뒤엉켜 진흙탕 위에 피를 쏟는다. 파울은 끝까지 싸운다. 그러다가 문득 얼어붙는다. 드로잉한 장면에서 살짝 들리는 프랑스군의 한 마디는 “휴전!”이다. 전쟁터에서 19살이 된 파울의 얼굴이 수 십 년은 더 늙어 보이는 듯한 까닭은 내 투박한 드로잉 실력 탓만은 아닐 것이다. 왼쪽 가슴의 핏자국이 허황된 훈장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강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