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씬드로잉] 우린 모두 잘못 듣고, 잘못 소리내고 있다! 베토벤 다룬 영화에 부쳐

40여 년 전, 시인 이성복은 어느 시에서 이렇게 쓴 적 있다.

“아무것도 비하하지 않으려면 아무것도 미화하지 말아야 한다”

‘비하’와 ‘미화’는 비슷한 음가를 가진 상반된 단어다. 이런 식의 ‘한끗’ 차이 말장난은 시인들의 생활에서도 작품에서도 일상적이다. 이른바 ‘언어유희(pun)’의 가장 기본적 방식인데, 시구 자체의 의미는 굳이 언급 안 해도 될 듯싶다.

음악은 과연 소리의 완전체일까

한국 시만 이런 게 아니다. 랭보(프랑스어)나 릴케(독일어)의 시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흔적이다. 단어의 음가에서 추돌 혹은 충돌하는 뉘앙스와 이미지를 그대로 살려 언어의 상식적 쓰임과 그로 인한 삶의 관습들을 해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감각 또는 의미의 전이는 청각을 기본으로 한다. 언제부턴가 한국에서 ‘아재개그’라 불리며 젊은 세대에게 경멸당하는 말장난도 여기 기반한다. 문학의 쓸모가 다했음을 말하자는 건 아니다. 문제는 소리다. 나아가, 소리로 구성되는 음악만의 한 특징을 새삼 짚어보고자 할 따름이다.

소리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지 않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냄새 맡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물리적 현상이다. 그런 까닭에 때로 소리는 일상적으로 ‘설정’되어있는 의미 체계를 초월하기도 한다. 청각은 분명한 듯 미묘하다. 더불어 불확정적이다. 오감 중에서 오류와 오해의 발단이 될 소지도 가장 크다. 똑같은 말(혹은 소리)을 들었어도 상황과 기분에 따라 수용자의 해석과 판단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다면 소리의 구성체인 음악은 어떠한가. 혹시 음악은 ‘잘못 들음’ 혹은 ‘잘못 소리냄’을 근간으로 인위적으로 조합된 균열의 파동이지는 않을까. 이상한 비약인가.

루트비히 반 베토벤은 30살 무렵부터 청력에 이상이 생겼다. 그 상태로 음악사의 걸작들을 작곡했다는 건 불가사의한 일이다. 베토벤의 일생을 모티프 삼아 만들어진 영화는 수두룩하다. 베토벤은 1770년에 태어나 1827년에 사망했다. 살아있을 당대에나 사후에나 늘 문제적 인물이었다. 명성과 오욕, 슬픔과 환희, 고통과 분노로 점철된 그의 인생은 그가 작곡한 음악들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채로운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를 만드는 이에게 구미가 당길 요소가 가득하다. 워낙 극적인 삶을 살았기에 그를 증언하는 내용은 2백 여 년이 지나는 동안 수시로 바뀌거나 새로운 사료들에 의해 기존의 평가가 뒤바뀌는 지점도 많다. 버나드 로즈 감독의 ‘불멸의 연인’(1994)은 그 점에서 착안한 영화다.

그를 실제로 겪게 된다면 어땠을까

베토벤 사후 발견된 편지가 세 통 있었다. 언제 쓰여졌는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고, 그 편지의 수신자(발신되지는 않았다)가 누구인지도 현재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아주 곡진하고 애잔한, 그럼에도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 찬 편지다. 베토벤은 그 편지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미지의 그녀에게 상속한다고 밝혔다. 장례식 직후 그의 비서였던 안톤 쉰들러가 발견한 그 편지를 두고 베토벤의 동생 요한과 쉰들러 사이에 다툼이 발생한다. 동생 요한과 베토벤은 원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요한뿐 아니라 먼저 죽은 동생 카스퍼와도 베토벤은 한 여인을 두고 주먹다짐을 벌일 만큼 사이가 나빴다. 카스퍼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카를의 양육권을 두고 카스퍼의 미망인 요한나와 법정 다툼까지 벌였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결국 카를의 양육권은 베토벤에게 넘어간다.

이 모두가 베토벤이 청력을 완전히 상실한 이후의 일이다. 당시 베토벤은 필담이 아니면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세상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아득한 침묵을 귀가 멀어 보지 않은 사람이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일련의 현악 사중주와 베토벤 최고의 명작이라 할 수 있는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는 그 무렵 탄생했다. 당시 베토벤은 폐인이자 미치광이라 세간에 알려졌다. 이전의 명성은 그를 비난하고 질시하고 매도하는 반사작용을 불러일으켰다. 동생들에게 대한 폭압적인 행태, 조카 카를을 거장으로 키우고자 하는 욕망에서 발동한 고압적인 교육(카를은 자살 시도까지 한다), 숱한 취중 추태와 유명한 여성 편력 등. 그의 삶을 특징 지웠던 모든 인간적 성향들이 그 자신을 옥죄고 재단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종의 풍문처럼 잘 알려진 내용들이나, 그런 사실을 영화로 목도하는 건 풍문을 재확인하는 것과 또다르다. (만약, 실제로 대한다면 또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영화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의 후반생을 바탕으로 안톤 쉰들러(예로엔 크라베)가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추적하는 내용이다. 베토벤과 연인관계였었거나 그렇다고 추정되는 여인들을 만나 증언을 듣는 형식인데, 마지막에 밝혀지는 인물은 기존 베토벤 연구자들이 추정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아주 의외의 인물이다. 이건 물론 픽션이다. 아직도 그 ‘불멸의 연인’이 누구였는지는 연구가들도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어떤 극적인 흥미, 또는 베토벤이라면 충분히 그랬을 수도 있을 거라는 가정하에서 극화되었을 뿐, 어떤 실체적 진실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게리 올드만이 연기한 베토벤의 모습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광기 어린 예술가의 전형으로 비치는 한편, 내심 속 깊고 세심하고 예민한 한 인간이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고야 말게 되는 모습에 연민마저 품게 한다.

허두에 언급한 시구를 곱씹자면, 이 영화는 베토벤을 ‘비하’하지도 ‘미화’하지도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사실 그대로 옮긴 전기 영화도 아니다. 베토벤이란 인물, 그리고 그에 대해 역사가 전하는 어떤 일면을 토대로 인간의 삶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종의 불가해성과 모순을 환기한 영화로 볼 수도 있다. 비난과 찬사는 결국 관객의 몫이되, 그 어떤 비난이나 찬사도 베토벤을 하나의 온전한 객체로 재구성할 수 없다. 그것은 베토벤 아니라 그 어떤 장삼이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청력을 잃은 음악가라는 사실의 특수성은 가십거리가 아니라, 베토벤에겐 숙명과도 같은 굴레였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연주를 스스로 들을 수 없는 자가 피아노에 앉아 악기의 몸통에 귀를 기울인 채 소리의 진동을 꿈꾸듯 음미하는 장면은 꽤 상징적이다. 한 귀족의 딸과 혼례담이 오가던 무렵, 여인이 자신의 집 거실에 최신식 피아노를 장만했다며 베토벤더러 연주를 해보라고 한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거라 덧붙이면서. 하지만 그녀는 거실 장롱 속에 숨어 베토벤의 연주를 훔쳐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사실이 발각되자 베토벤은 “내 감정을 테스트하려 들다니!!”라고 호통치며 그 집을 떠난다. 장면에 대한 세세한 해석은 하지 않겠다. 그 호통과 격앙의 원인과 의미 역시 관객이 느껴 깨달을 몫이다. 다만 조금만 덧붙이겠다. 혹시 우리는 누군가의 오점 또는 재능을 관음하며 그 사람의 실체적 진실과 고통에 대해선 외눈으로도 보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닐까. ‘미화’도 비하‘도 그 누구에겐 모독이자 독침이 아닐까. 참고로 부언하건대, 베토벤의 장레식엔 2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그 중, 살아있을 적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도 수두룩했을 것이다. 이성복의 시구를 변용하자면, ’비하‘가 ’미화‘가 되는 순간이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우리는 누군가의 오점 또는 재능을 관음하며 그 사람의 실체적 진실과 고통에 대해선 외눈으로도 보지 않으려 하는 건 아닐까.

풍문과 편견이 가려버린 진실은?

모든 예술은 모종의 심리적, 육체적 장애의 소산일 수 있다. 특정 감각이 완전히 상실된다는 건 그중에서도 아주 극단적인 경우일 것이다. 스티비 원더나 호세 펠리치아노 등 맹인 가수들은 세계적으로 적지 않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귀가 밝아진다는 역설을 자동적 혹은 자연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음악가가 청력을 잃는 건 경우가 다르다. 다리 절단된 축구선수가 공을 차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된 원인에 대해선 아직도 정확한 의학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정황상 지금의 의학 기술이라면 충분히 치료 가능한 병이었다는 중론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귀가 먼 상태에서 어떻게 그토록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는지에 대해선 과학이 완전히 규명하긴 쉽지 않을 것이다.

베토벤은 사후 모든 음악가에게 새로운 기준과 개념을 제시했다. 망치로 두드려대는 듯한 연주법이나 기존 발상을 뛰어넘는 악상 전개는 어쩌면 그 불의의 병이 낳은 ’잘못 들음‘ 혹은 ’잘못 소리냄‘의 역설적 결과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물론 이 역시 베토벤에 대해 ’잘못 들음‘, ’잘못 소리냄‘의 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러니 ’미화‘도 ’비하‘도 하지 말자.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자신의 미감이나 원칙, 취향이나 편협한 도덕적 잣대로 죽이기도 살리기도 한다. 그것도 풍문으로나 겪게 되는 누군가의 ’잘못 들음‘ 혹은 ’잘못 소리냄‘에 의해. 자신이 본 모든 것. 듣게 되는 모든 것을 때로 자신만의 고유한 진공관 안에 담근 채 가만히 주위를 지워보자. 모든 풍문과 편견이 가려버린 진실은 어쩌면 그 고요 속에서나 분명해질 자신의 이면에서 불쑥 도드라질지도 모르니까.


강정 시인

https://tv.naver.com/v/30558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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