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의 씬드로잉] 인간은 기계를 만들고 기계에 먹히며 기계를 먹는다 <미래의 범죄들>

신체적 고통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 가장 큰 문젯거리다. 고통을 자각하는 건 동물도 마찬가지이지만, 인간의 뇌는 물리적 고통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 구조 사이의 연결성을 의식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보다 치명적이다. 동물은 고통에 즉물적으로 반응하다가 극에 달하면 죽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없애거나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들을 끊임없이 강구해왔다. 그래서 고통이 완화되거나 사라지기도 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전이되기도 한다.

기계와 섞여 변형되는 인간의 몸

신체의 고통은 몸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만물에게 불가피하다. 바이러스나 병원체에 의해서든, 사고에 의해서든, 또는 애초에 몸이 지닌 자기재구성 과정의 한 방식으로든 고통은 상시적이다. 고통에 대한 불안이나 암시는 정신적 스트레스로도 이어진다. 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혹은 사고나 자연 재해에 희생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은 삶의 기본 전제마저 되짚게 만들기도 한다. 그에 대한 대처 능력을 마련하려는 것 자체가 때로 더 큰 고통을 생산하기도 한다. 고통은 삶의 기본 조건과도 같다. 그래서 고통은 모든 철학과 과학의 주요 전제가 된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그로 인해 변형되는 인간의 물리적 형질 및 신체와 기계 문명 사이의 기묘한 접합 또는 분열 양상에 대해 줄곧 탐구해 온 감독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짐짓 뚱딴지 같으면서도 초지일관하는 면이 있다. 작품 대부분이 SF나 B급 호러 사이 어디에선가 혼자만의 괴이한 공간과 물질(특히 인체)을 창조해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SF나 호러 전문 감독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도 없다. B급 호러의 형식을 취한 초기 작품들도 특유의 신체 변형과 기계 문명의 뒤틀린 비전을 독특하게 뒤섞은 묵직한 메시지로 독창성을 드러냈었다. 그리고 그 괴이한 독창성이 온갖 편견과 숭앙의 갈림길이 되었다. “내 영화가 난해하다고? 이 사람아, 세상이 더 난해해!” 라며 느긋하고 건조하게 옆구리 쿡쿡 찌르는 듯한 일침을 나로선 꽤 즐기는 편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인간의 육체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를 뒤섞은 은유 체계와도 같다. 언뜻 난해해 보이지만, 그가 드러낸 기표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명징성을 파악하면 이 만큼 간명하고 일관된 메시지를 줄곧 던지는 감독도 없지 않나 싶다. 물론, 그의 영화는 보는 이의 관점 따라 충분히 반응이 엇갈릴 수 있는 작품이다. 최신작 <미래의 범죄들>은 그가 평생(올해 여든 살이다) 만들었던 영화의 종합판으로 여겨진다.

노년 거장, 자신의 작품들을 종합하다

2022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대되어 기예르모 델 토로가 격찬했다는 뉴스 한편엔 영화 시작 10분 만에 극장을 뛰쳐나간 관객이 수두룩했다는 소식도 있다. 과연 크로넨버그 영화다운 반응이다. 한국 개봉은 아직 예정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개인적인 의견을 여담 삼아 얹자면, <폭력의 역사> (2007) 이후 그의 페르소나가 된 비고 모텐슨은 이 영화에서 실제로 외모가 크로넨버그를 연상케 한다. 말을 타다가 허리를 다쳐 영화 중 절반 이상을 누워 있는 연기로 일관했다는 건 굉장히 아이러니하기도 적확하기도 하다. 그가 연기한 행위예술가 사울 텐서는 여러모로 크로넨버그 자신의 모습이라 여겨졌다. 괴이하고 묵시록적인 주제를 상상 그 이상의 영상 테크닉으로 충격을 안겨주는 예술가의 초상. 이 영화가 왠지 자전적이라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영화는 어느 바닷가에서 시작한다. 옆으로 뒤집어 진 채 바다에 반쯤 침몰되어 있는 배(유조선?)가 보이고 한 아이가 갯벌에서 숟가락으로 진창을 뒤적거리고 있다. 멀리서 아이의 엄마가 아이에게 외친다. “아무거나 먹으면 안 돼!” 아이는 일견 평범해 보인다. 이 대사가 뭘 의미하는지는 얼마 안 가 밝혀진다. 곧이어 아이가 화장실에서 플라스틱 쓰레기통을 비스킷인 양 야금야금 뜯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참다 못한 아이 엄마가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를 베개로 눌러 질식사시킨다. 그러면서 인간의 장기 변화로 인한 식성 및 성격, 나아가 신체의 변형을 모티프 삼아 행위 예술을 사울 텐서의 작업장이 나온다.

사울은 인간의 장기 형태로 꿈틀대는 침대에서 잠을 자는 중이다. 레아 세두가 연기한 조력자 카프리스가 곧바로 등장한다. 아무거나 먹는 아이와 사울의 퍼포먼스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밝히는 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생략하겠다. 그 이후 이야기들도 마찬가지다. 크로넨버그의 작품들은 스토리를 알려주는 것으로 힌트를 얻을 게 거의 없는 영화이다. 그의 작품은 직접 체험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감상법이라 할 수 있다. 그 체험은 단순히 객석에 앉아 눈과 귀를 열어 두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너무 황당하고 엽기적이어서 되레 내가 죽을 때까지 직접 확인할 수 없는 몸속 내장들을 들여다보는 느낌마저 든다. 그걸 어찌 일설로 다 안내할 수 있으랴.

인간은 욕망으로 진화하여 욕망으로 종말한다

크로넨버그는 2013년 <코스모폴리스>를 만든 적 있다. 하루 종일 거대한 리무진에서 생활하며 온갖 투자를 통해 뉴욕을 지배하는 젊은 자본가가 주인공인 영화다. 이 영화 역시 그저 상류 사회의 호화판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다. 크로넨버그는 일명 ‘바디호러’라 불리는 스타일의 영화 외에도 <스파이더>(2005), <폭력의 역사>(2007), <이스턴 프라미스>(2008) 등 인간의 심리 기저에 잠복한 폭력성과 피해의식, 그리고 그것들을 점점 극대화시키는 세계 전체의 체계와 자본의 음모 등을 끈적끈적하게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카를 융의 애증 관계를 기묘한 심리 스릴러로 표현한 <데인저러스 메소드>(2012)는 그나마 온건(?)한 편에 속한다. 앞서 <미래의 범죄들>이 크로넨버그 영화의 종합판 같다는 건 그런 의미다.

기계 문명과 인간 사이의 죽이고 살리고 먹고 먹히면서 첨단과 파멸을 공유하는 설정, 그리고 그 안에 내재한 인간의 원시적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에 대한 진단, 자연적 진화를 지나 점점 다른 물질로 변해가고 있는 인간에 관한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통찰들. 그런 주제를 믿기 힘든 물질들을 재구성해 각성케 하는 영화를 보다가 뛰쳐나가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미 자신도 모르게 얽혀 있는 세계의 첨예한 음모에 질려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세계의 어느 심원한 밑바닥에서 캐어낸 진귀하고 색다른 구성체를 통해 인류의 미래를 끊임없이 반추하고 속도를 제어하는 각성의 진미를 느껴버린 사람 또한 별반 다를 것 없다. 세계는 이미 인간이 나아갈 바를 인간 스스로 정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 시발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었고, 그 종말 역시 인간의 욕망을 폭력으로 대체하는 인간의 오만에 의할 것이다.

기계들이 있고 인간이 있다. 인간의 과학적 확증과 오만을 통해 만들어진 기계들은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기계 문명이 진보할수록 거기서 발생한 본질적 폐해들이 거꾸로 증명된다. 그리고 그러한 역류가 악과 정의에 대한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며 인간 자체를 병들게 한다, 문장이 복잡한가. 사실 자체가 복잡한 것인데, 대부분의 인간은 그 사실 자체의 복잡성에 대해 숙고하는 걸 괴로워한다. 아무리 기계가 인간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시켜 줄 수 있더라도, 모든 병이 그렇듯, 근본 치료는 인간이 왜 병들 수밖에 없는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거쳐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 성찰 자체가 만병통치의 중심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역시 인간에겐 궁극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복잡한 존재의 사슬을 잠시나마 일깨워주는 장면이 있다.

인간은 잘못 만들어진 로봇인가

보지도 먹지도 못하게 구속된 육체로 수 십 개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과연 어떤 소리일까. 춤은 격렬하기도 나긋하기도 하다

눈과 입을 꿰맨 채 온몸에 수 십 개의 귀가 붙어있는 댄서가 춤을 추는 장면. 굉장히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느낌마저 준다. 보지도 먹지도 못하게 구속된 육체로 수 십 개의 귀에 들리는 소리는 과연 어떤 소리일까. 춤은 격렬하기도 나긋하기도 하다. 댄서는 아무 표정이 없다. 물론, 수 십 개의 귀는 사울이 인공적으로 장착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퍼포먼스가 그렇듯, 이것은 그저 하나의 쇼에 불과하다. 사실, 자본과 정치가 작동하는 체계도 쇼의 속성을 지녔다. 그리고, 영화도 당연히 쇼다. 그런데 그 쇼가 이미 몸과 정신에 내장된 실체처럼 세계라는 장기판을 들었다놨다 하는 세상. 진실도 정의도 악도 폭력도 그렇게 꾸며지고 가공된다. 인간은 이제 만들어 붙여진 수 십 개의 귀처럼 인간 스스로를 가공하고 고통을 위장한다. 위장함으로써 없애려 한다. 인간은 이제 잘못 만들어진 로봇과도 같다. 죽음을 물질화한 것을 먹고, 물질이 된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이다. 자각은 역시 각자의 몫이다.


강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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