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걸작이야”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속 음악

뜬금 없는 고백 하나. 지난 몇 년간 씨네플레이의 ‘영화음악 감상실’에 연재해오면서 혼자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음악 전집’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덕질의 소박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킬 빌 1>,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재키 브라운>, <헤이트풀 8>, <펄프 픽션>을 쓰고 아직 4편을 남겨 놓았는데 네이버 영화판 종료 소식을 들었다. 작별인사를 대신해, 네이버 영화판을 통해 공개될 마지막 영화음악 원고로, 가장 좋아하는 (그래서 고이고이 아껴뒀던) 타란티노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골랐다. 그동안 긴 글 읽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Thanks… and Happy New Year!


“The Green Leaves of Summer”

Nick Perito

와인스타인 컴퍼니 로고를 지나 유니버설 픽쳐스 로고가 뜨면 시작되는 음악, ‘The Green Leaves of Summer’다. 할리우드 영화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배우 존 웨인이 연기는 물론 연출까지 맡은 전쟁영화 <알라모>(1960)의 스코어다. 러시아 출신의 음악가 디미트리 티옴킨이 만든 ‘The Green Leaves of Summer’는 보컬이 곁들여진 버전이 <알라모> 곳곳에 등장하는데, 타란티노는 닉 페리토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연주만으로 이뤄진 버전을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오프닝 곡처럼 사용했다.


“La condanna”

Ennio Morricone

타란티노가 꾸준히 엔니오 모리코네를 향한 존경을 드러내온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킬 빌 2>(2004)부터 모리코네가 과거 만든 스코어들을 인용한 타란티노는 모리코네에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음악감독을 맡아달라 청했으나, <시네마 천국>(1988)의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의 <바리아>(2009) 작업 스케줄로 거절당하고, 또다시 모리코네의 지난 스코어를 사용했다. 영화가 시작하고 20초가 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모리코네의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웨스턴 <빅 건다운>(1966) 속 마지막 결투 직전에 배치됐던 ‘La condanna’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엔진 소리와 맞물리는 피아노 연주를 몇 초만 들어도 곧 큰일이 벌어지게 됨을 직감하게 만드는 음악의 힘.


“L’incontro con la figlia”

Ennio Morricone

나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유대인 사냥꾼으로 불리는 한스 란다 대령(크리스토프 왈츠)은 15분 동안 긴 대화를 나누며 애써 태연한 척하려던 농부를 완전히 제압해 바닥 아래 숨어 있는 드레이퍼스 일가의 위치를 자백 받고 만다. 란다가 위치를 가늠하면 모리코네의 ‘L’incontro con la figlia’의 불길한 현악 음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날카로운 또 다른 현악이 할퀴듯 그 주변을 에워싸 이윽고 군인들이 들어와 총격을 시작하면 육중한 관악기가 쏟아지면서 그 평화롭던 집은 쑥대밭이 된다. 음악은 홀로 도망치는 쇼사나를 향해 총을 겨누던 란다가 쏘지 않기로 할 때 뚝 멈춘다. 이탈리아 서부극 <링고의 귀환>(1965)을 위해 만들어진 ‘L’incontro con la figlia’은 남북전쟁에 참전해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주인공 링고가 마을을 장악한 멕시코 강도와 결혼한 아내와 그 곁에 딸이 있는 것을 목격하고 좌절하는 대목에 쓰였다.


“Il mercenario (Reprisa)”

Ennio Morricone

제 2장 ‘미친 개떼들’은 알도 레인 중위(브래드 피트)가 이끄는 조직 ‘개떼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보여준다. ‘개떼들’이 사방에 죽어 있는 독일군들의 머리 가죽이 벗겨내고 있는 와중, 레인은 무릎 꿇고 있던 독일군 상사를 불러내고, 그가 걸어가는 부분에 모리코네의 ‘Il mercenario’를 썼다. 이 유대인 게릴라들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걸어오는 모습이, 쓸쓸한 선율의 휘파람을 느릿느릿 휘감는 북과 기타 소리가 감싸는 음악을 만나 더욱 비장해 보인다. 타란티노가 최고의 이탈리아 웨스턴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 세르지오 코부치 감독의 <표범 황혼에 떠나가다>(1968) 메인 테마의 변주들 중 하나를 가져왔다.


“Slaughter”

Billy Preston

게슈타포 13명을 죽인 후 투옥됐다가 ‘개떼들’의 도움으로 풀려나 그 일원이 된 독일군 휴고 스티글리츠(틸 슈바이거)가 어떤 인물인지 보여주는 짤막한 시퀀스에선 미국의 소울 뮤지션 빌리 프레스턴의 ‘Slaughter’와 함께 시작한다. 한동안 모리코네의 이탈리아 영화음악들이 이어지고 있던 터라 대뜸 작렬하는 일렉트릭 기타가 유독 도드라진다. 블랙스플로테이션 영화 <지옥의 사자 슬러터>(1972)의 주제가 ‘Slaughter’는 “다섯 번째 비틀즈 멤버”라 불릴 정도로 드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 소울 싱어 빌리 프레스턴이 프로듀싱, 작곡, 노래까지 도맡았다. 도입부의 기타만큼이나 강렬하게 넘실대는 키보드 키드 아래, 스티글리츠가 게슈타포를 죽이는 살벌한 활약상을 민첩하게 열거한다. ‘Slaughter’의 기타 사운드는 스티글리츠가 독일군들을 만나게 되는 바에서 장교에게 덜미를 잡힌 듯한 상황에서 과거를 회상할 때 아주 짧게 또 한번 인용된다.


“Un dollaro bucato”

Gianni Ferrio

세 번째 파트는 4년 전 한스 란다의 습격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쇼사나(멜라니 로랑)의 이야기를 이어간다. 극장을 운영 중인 쇼사나는 간판을 교체하던 중 독일군 프레드릭 졸러 일병(다니엘 브륄)을 만난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프레드릭을 쌀쌀맞게 대한 쇼사나가 저기 걸어가는 프레드릭의 뒷모습을 쳐다보면, 이탈리아의 영화음악가 잔니 페리오가 만든 서부극 <황야의 은화 1불>(1965)의 메인 테마 ‘Un dallaro bucato’가 흐르기 시작한다. 신이 바뀌어 쇼사나가 한낮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도 음악은 이어진다. 독일군에게 가족을 몰살당한 아픔을 품고 있는 쇼사나로선 자신에 대해 묻는 독일군이 석연치 않았을 것이고, 시간을 넘어 계속되는 음악이 그 껄끄러움이 계속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귀찮게 굴려는 게 아니에요, 친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던 프레드릭에게 독일군 장교가 다가와 영웅이니 우상이니 들먹이며 굽실대면 서서히 음악은 잦아든다.


“Bath/Attack”

Charles Bernstein

나치에 대한 쇼사나의 불안을 나타내는 음악은 따로 있다. 카페에서 프레드릭을 만난 후 간판을 교체하고 있는데 또 다른 독일군이 나타나면 찰스 번스타인의 ‘Hound Chase’가 들린다. 차에서 내린 장교는 곧장 쇼사나에게 내려오라고 명령한다. 관악/현악/타악기가 불협화음을 이루는 ‘Hound Chase’는 위트 있게나 들리니 차라리 낫다. 장교를 따라가 프레드릭과 괴벨스가 동석하고 있는 카페를 가서 <조국의 영광> 시사회를 쇼사나의 극장에서 열고 싶다는 말을 듣다가 괴벨스가 “란다, 자네 왔군!” 하면 쇼사나 바로 뒤에 란다의 제복이 보이고 동시에 번스타인의 ‘Bath/Attack’이 등장해 단 25초 동안 이어지는 사이 불안은 극에 달한다. ‘Bath/Attack’은 멜로디도 없이 두 타악기 소리가 서로 전혀 다른 템포로 교차되는 진행이 전부인, 효과음에 가까운 트랙이라 특히 흥미롭다. 두 곡 모두 번스타인이 만들었지만 ‘Hound Chase’는 1973년 작 <화이트 라이트닝>, ‘Bath/Attack’은 1981년 작 <심령의 공포>의 영화음악이다.


“The Man with the Big Sombrero”

Samantha Shelton & Michael Andrew

영화평론가 출신의 영국군 소위 아치 히콕스(마이클 패스벤더)는 ‘개떼들’ 멤버 둘과 함께 영국 스파이인 독일 배우 브리짓 본 하머스마크(다이앤 크루거)를 접선한다. 한산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바엔 여러 독일군이 술에 취해 놀고 있다. 이 어정쩡한 상황, 바에선 ‘The Man with the Big Sombrero’가 흐르고 있다. 가벼운 스윙 재즈 풍의 ‘The Man with the Big Sombrero’는 영화 속 어떤 음악들보다 나치가 점령한 파리에서 들릴 법한 음악인데, 실은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영화로 선택한 바 있는 <하이 디들 디들>(1943)에서 배우 준 해복이 부른 노래를 2009년 당시에 활동하던 가수 사만다 셸튼과 마이클 앤드류가 리메이크 한 트랙이다.


“Cat People (Putting Out Fire)”

David Bowie

반강제로 <조국의 영광> 시사회를 열게 됐지만, 쇼사나는 이걸 기회라고 여기고 극장을 찾은 사람들을 불태워 몰살시킬 작전을 계획한다. 드디어 복수의 날. 쇼사나가 새빨간 핏빛 드레스를 갖춰 입고, 연인 마르셀과 영화 사이에 끼워 넣을 푸티지를 촬영하고 사운드를 입히는 걸 교차하는 4분 남짓한 시퀀스 내내 데이비드 보위의 ‘Cat People’을 사용했다. 자크 투르뇌르의 고전 공포영화 <캣 피플>(1942)을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폴 슈레이더 연출로 리메이크 한 <캣 피플>(1982)의 주제가인 ‘Cat People’은 70년대 말 80년대 초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듀서 조르지오 모로더와 데이비드 보위가 만나는 프로젝트라는 점만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속 쇼사나의 주제가로서 기능하는 효과가 워낙 대단해서 오리지널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What’d I Say”

Rare Earth

<조국의 영광>이 상영되는 극장 안은 열광에 빠지고, 불편하게 객석에 앉아 있던 도니(일라이 로스)는 바깥으로 나가동선을 살핀다. 도니 혼자 극장을 문을 나서면 레어 어스의 ‘What’d I Say’가 시작된다. 바깥에서 동선을 살피다가 경비병한테 껌을 찾는 히틀러를 발견한 도니는 다시 극장에 들어가 같이 앉아 있던 오마(오마 둠)를 부르는데 이땐 음악은 멈춘다. 그리고 다시 둘이 밖에 나오고, 영사실에서 쇼사나와 마르셀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듯이 입을 맞추고, 상영관 문을 잠그는 흐름을 ‘What’d I Say’가 함께 한다. 하지만 정작 노래를 찾아 들어보면 이게 영화에 나온 그거 맞아? 의아할지 모른다. 사이키델릭 록 밴드 레어 어스가 레이 찰스의 명곡을 7분이 넘는 길이로 커버한 ‘What’d I Say’를 들으면 영화에서 들리던 단출한 퍼커션 연주는 좀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더 기다려야 한다. 싸이키델리아 한바탕이 끝나고 딱 6분 대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퍼커션 연주가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Un amico”

Ennio Morricone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던 쇼사나의 복수 작전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다가 못 견디고 나온 프레드릭이 영사실로 찾아와 치대면서 삐그덕댄다. 프레드릭이 폭력적인 본색을 드러내자 안 되겠다 싶어 그에게 문을 잠그라고 시킨 쇼사나는 준비한 총을 들어 그를 쏜다. 영화도 총격전이 한창인지라 총 소리가 새어나가진 않았지만, 쇼사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프레드릭을 보고 모리코네의 ‘Un amico’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보에 연주가 금세 분위기를 무르익게 만들고, 신음하고 있는 프레드릭에게 다가가면 그는 쇼사나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 순간 드럼과 함께 터져 오르는 절정부! ‘Un amico’가 너무나 아름다워, 두 사람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과 영사실에 필름이 무심히 돌아가고 있는 소리가 한없이 처연해진다. 친구를 뜻하는 제목의 ‘Un amico’는 이탈리아 범죄물 <리볼버>(1973)의 영화음악으로, 함께 도망치던 친구를 묻어주는 주인공을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 내내 수차례 ‘Un amico’ 멜로디가 쓰였다.


“Rabbia e tarantella”

Ennio Morricone

나치 소탕 계획을 진즉 눈치 챘던 한스 란다는 자신을 종전의 주역으로 만들어달라는 조건으로 작전을 보고하지 않는다. 전쟁의 기운 따위 느껴지지 않는 외딴 곳에 도착하지만, 알도 레인이 란다를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다. 앞서 봤던 것처럼 란다의 이마에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나치의 표식을 칼로 새겨준다. 그걸 내려다보면서,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말하듯, 알도가 내뱉는 말. “내 생애 최고의 걸작이야.” 알도가 칼을 빼 들자마자 시작하는 ‘Rabbia e tarantella’ 역시 모리코네가 만들어, 타비아니 형제의 초기작 중 하나인 <알롱상팡>(1973)의 오프닝을 장식했던 곡이다. 다양한 소리의 현악기가 어우러진 행진곡 풍의 ‘Rabbia e tarantella’는 타란티노가 자화자찬 하는 걸작의 완벽한 피날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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