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가타카>의 결말이 포함돼 있습니다.
감정의 축축함 따윈 전부 증발해 버린 것 같은 우주 탐사 업체 가타카. 근무를 ‘허가 받은’ 사람들은 회사에 입장할 때마다 인증 시스템에 사원증 대신 손가락을 태그한다. 내가 유일한 나임을 증명할 생체 샘플을 제출하기 위해서다. 손가락 끝에서 빠져나간 핏방울은 그 주인이 얼마나 ‘우월한’ 유전자의 소유자임을 말해 준다. 이 곳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났다. 유독 특출난 재능을 가진 두 사람은 말을 섞어본 적 없어도 서로를 알고 있다.
그 중 남자는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70년에 7일 밖에 띄울 수 없는 타이탄 탐사선 탑승이 확정된 엘리트다. 여자는 남자가 신경 쓰인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도, 유전적 결함 때문에 태양계 바깥으론 비행할 수 없는 자신보다 남자가 얼마나 더 잘났는지 확인하고 싶은 의심이 먼저였을 것이다. 여자는 몰래 남자의 기록을 읽고, 책상을 뒤져 기어코 찾아낸 머리카락 한 올로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다.
결과는 10점 만점에 9.3점. 여자가 남자에게 품고 있던 의심은 다른 감정으로 바뀐다. 자신의 행동을 사과하며 유전적 결함까지 고백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말한다. “당신에게 잘못된 점이 있다고 한들 내겐 보이지 않는다”라고. 그런 남자를 향해 여자는 자신의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서는 “내게 흥미가 있으면 검사해 보라”라고 건넨다. 남자는 일부러 머리카락을 떨어뜨려 보이고는 “바람에 날아갔네요”라며 싱긋 웃는다.
이 같은 남녀의 ‘저 세상 플러팅’이 통하는 영화 <가타카> 속 세상에서는 인간이 배아 상태일 때부터 모든 유전 정보를 조작할 수 있다. 말하자면 아이의 성별은 물론이고 눈동자 색깔과 신장, 질병 확률까지도 부모가 정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인공수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연 임신의 경우 유전 정보를 바꿀 수 없지만 태어나는 순간 언제, 왜 죽는지까지 알 수 있다. 드물게도 자연 임신으로 탄생한 빈센트(에단 호크)는 심장 질환을 겪을 확률이 99%였고, 예상 수명은 30.2살이었다. 빈센트의 아버지는 이 말을 듣자마자 첫 아들에게 주려던 이름 ‘안톤’을 빼앗는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부적격자’로 분류된 빈센트. 부모는 빈센트의 동생을 낳기 위해 인공수정을 한다. 모든 나쁜 인자를 제거한 채로 태어난 동생은 당초 빈센트에게 붙었을 이름 ‘안톤’을 가져간다. 이미 유전자에 각인된 각종 질환 발병 확률 탓에 보험을 들 수도 없고 학교 입학도 할 수 없는 빈센트는 그럼에도 우주를 꿈꾼다. 그가 우주선을 보기 위해서는 가타카의 청소부가 되는 방법 밖에 없지만, 빈센트는 자신의 심장이 우주에서도 문제가 없을 확률 1%에 모든 것을 건다. 자신과는 피를 섞기조차 싫어하는 동생에게 모든 것에서 밀리지만, 그는 유전자에 순응하는 대신 우주에 있을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찾아 집을 나선다.
유망한 수영선수였지만 사고로 다리를 쓸 수 없게 된 제롬 모로우(주드 로)는 그의 ‘사다리’였다. 빈센트는 제롬에게 ‘우월한’ 생체 샘플들을 공급받고, 제롬의 삶을 살기로 했다. 혈액과 소변을 내지 않으면 청소부로밖에 입장할 수 없던 가타카에, 제롬이 된 빈센트는 면접도 보지 않고 입사에 성공한다. 아예 없는 사례는 아니어서, 빈센트 같은 사람들은 ‘빌린 사다리’ 혹은 ‘위장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빈센트는 매일 아침 몸의 털과 각질들을 긁어내고 제롬의 것을 지닌 채 출근하며 가타카에서 가장 유능한 일등 항법사로까지 승진한다.
이는 <가타카> 속 사람들이 신 대신 숭배하는 유전학자들과 우생학의 근본적 오류를 방증한다. 빈센트가 유전자에 새겨진대로 살았다면, 그는 아버지의 저주 같은 말처럼 가타카의 청소부로서 영원히 타지 못할 우주선을 구경하다가 30살 이전에 생을 마감했어야 한다. ‘청소부’에 내포된 직업적 가치와는 별개의 이야기다. 빈센트에게는 우주에 닿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유전자에 기록돼 있지 않다. 그래서 유전자 대신 가능성을 조작한 빈센트는 서른을 넘겨서도 여전히 살아 있다. 또 완벽한 유전자로 태어난 가타카의 엘리트들 사이에서도 타이탄행 탐사선 탑승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빈센트에게 유전 정보와 생체 샘플을 제공하는 제롬, 빈센트의 연인이 되는 아이린(우마 서먼), 빈센트의 동생 안톤(로렌 딘) 역시 가타카의 세상이 감추려 했던 오류들이다. 완벽에 가까운 유전자를 품고 태어난 제롬은 사고로 다리와 꿈을 잃었다. 이를 늘 ‘술에 취해 벌어진 일’이라 설명했던 제롬은, 차가 자신을 덮친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멀쩡했다고 고백한다. 빈센트가 함량 미달의 유전자를 타고나는 바람에 차별당했다면, 제롬은 원한 적 없던 우월한 유전자로 평생을 부담 속에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 운명과 이를 감당할 가능성 역시 유전자에 나타나지 않는 특질이다. 아이린의 ‘부적격 심장’은 유전자 조작이 실패할 확률이며, 성인이 된 빈센트와의 수영 대결에서 지는 안톤은 유전자 바깥의 가능성을 무시한 결과다.
그래서 마침내 타이탄행 탐사선에 오르는 빈센트는 우리가 모두 별의 아이임을 상기한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모든 원소는 별의 조각들이다. 그렇게 이뤄진 우리의 몸은 평등하지만, 유전자를 읽을 수 있게 된 후 조각들에 우열이 매겨지기 시작했다. <가타카>의 인물들이 겪었듯, 그건 인류에게 존재론적 고통이다. 서로를 나눠 가졌던 빈센트와 제롬이 영화 말미 각각 우주행과 원소로의 회귀를 택하는 건 모습은 다를지언정 전부 ‘귀향’으로 풀이된다. 그러니까 우열이 없는 별의 조각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의 움직임인 것이다.
다시 남녀가 머리카락 한 올로 감정을 주고 받던 대목을 떠올려 보자. 두 사람은 빈센트와 아이린이다. 빈센트는 결국 아이린에게 신분 세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다. 아이린은 당혹감과 배신감으로 빈센트를 등진다. 차마 그를 붙잡지 못한 채 안톤과의 마지막 ‘겁쟁이 게임’을 끝낸 빈센트는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아이린에게 향한다. 아이린은 자신을 찾아온 빈센트에게, 지난 데이트 때 그가 근시를 숨기지 못했던 것을 언급한다. 제롬의 유전 정보대로라면 시력이 나쁠 리 없었지만, 당시 콘택트 렌즈를 뺀 상태였던 빈센트는 눈이 잘 보이지 않아 길을 제대로 건너지 못했다. 빈센트는 수긍하는 대신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아이린에게 건넨다. “아직까지 흥미가 있다면 검사해 봐요”라며. 아이린은 빈센트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며 “바람에 날아갔네요”라고 말한다. 유전자 너머의 가능성을 알려 준 빈센트에게 아이린이 돌려 주듯 건넨 고백. 그건 두 사람이 온전히 별의 조각으로서 마주한 로맨틱한 순간이었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