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첫사랑 영화로만 기억되긴 아쉬운 명작 <러브레터>

1990년대 중후반, 암암리에 비디오로 <러브레터>를 관람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저화질 버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브레터>는 많은 이의 가슴에 잔상을 남겼다. 개봉 이후 <러브레터>는 국내 관객에게 가장 사랑받은 일본 영화가 됐다.

그렇게 27년이 지났다. 개봉 당시 <러브레터>가 일으킨 파장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이 영화는 단순한 ‘일본 멜로 명작’으로 기억될지 모른다. 오래된 겨울 영화, 첫사랑 영화로만 언급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안다. <러브레터>는 자신을 규정 짓는 단순한 수식어들을 훌쩍 뛰어넘는 영화다. 개봉 이후 6번이나 재개봉을 진행한 <러브레터>는 올해 겨울에도 국내 스크린을 찾았다. 유독 폭설이 잦았던 올해 겨울, 또다시 꺼내 보면 좋을 <러브레터>의 미덕을 되짚어봤다.


낯선 이로부터 온 편지를 통해 알게 된 첫사랑

<러브레터>

오타루에 거주 중인 후지이 이츠키는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의문의 편지를 받는다. 받는 사람은 후지이 이츠키. 자신의 이름이지만, 그녀에게 온 편지는 아니다. 후지이 이츠키는 자신과 같은 이름의 누군가를 찾는 낯선 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편지의 주인이 학창 시절 동명이인이었던 남학생 후지이 이츠키임을 알아챈다.

<러브레터>

교복을 입던 시절의 두 사람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친구들 사이 짓궂은 놀림의 대상이 되곤 했다. 다소 좋지 않은 기억으로 시작된 회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점차 선명해진다. 후지이 이츠키는 그간 잊고 살았던 동명이인 남학생과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돌이켜보며, 그와 공유한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러브레터>

<러브레터>를 본 대부분의 관객은 소년, 소녀 후지이 이츠키의 얼굴 위로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을 것. 이들은 손을 잡거나, 허리춤을 잡고 자전거를 타지도 않는다. 책 읽는 걸 즐기는 것 같지도 않은데 도서관에 매번 출석해 대출증 첫 줄에 이름 적기를 즐겼던 소년. 이름이 같아 뒤바뀐 시험지를 찾겠다고 컴컴한 밤이 될 때까지 상대를 기다렸던 소녀. 소년과 소녀는 그들이 겪고 있는 것이 사랑인지도 모른다. <러브레터>가 담아낸 첫사랑은 그래서 더 아름답다.


온전히 이별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영화

<러브레터>

후지이 이츠키가 받은 미스터리한 편지의 발신인은 와타나베 히로코다. 그녀의 연인, 후지이 이츠키는 조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히로코는 이츠키를 잊지 못했다. 2년 동안 제대로 된 이별을 하지 못한 그는 죽은 자의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가, 죽은 연인의 첫사랑으로부터 그의 과거를 공유받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러브레터>

<러브레터>

시간이 갈수록 넓어져만 가는 죽은 자의 빈자리. 공허함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지 못하던 히로코는 아직 이츠키의 기억 속에선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연인의 과거를 통해 상실감을 극복해간다. 설원에 파묻혀 죽은 연인을 추억하던 히로코의 얼굴에서 시작한 영화는 히로코가 연인이 떠난 설산을 향해 시원하게 작별 인사를 내뱉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하얀 눈 위로 그에 대한 마지막 그리움을 토해내고서야, 히로코는 죽은 연인을 제대로 떠나보낸다. <러브레터>는 후지이 이츠키라는 한 남자의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을 관통하며, 사랑의 문이 열리는 과정과 그 문을 안정적으로 닫는 과정을 조화롭게 버무려낸다. 멜로 영화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이유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간

<러브레터>

죽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히로코는 죽은 연인과의 사랑을 완성할 수 없다. 뒤늦게 첫사랑을 확인한 이츠키 역시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러브레터>는 사랑에 있어 가장 큰 한계에 부딪힌 두 인물을 통해 아릿한 감정을 극대화한다.

<러브레터>

흥미로운 건, 죽은 자가 살아있는 자 만큼의 존재감을 자랑한다는 점이다. 세상을 떠난 후지이 이츠키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편지를 통해 부활한다. 히로코와 이츠키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삶과 죽음의 영역을 넘나든다. 죽은 자의 기억에서 허덕이던 히로코는 편지를 통해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쳐 새 삶의 페이지를 펼쳐낸다. 한동안 과거를 잊고 살았던 이츠키는 죽은 자가 그 시절 곳곳에 감춰두었던 사랑의 흔적을 발견한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순간. <러브레터>의 마법 같은 여운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멜로 영화 거장, 이와이 슌지

<러브레터>

첫사랑과 마지막 사랑, 삶과 죽음. 겹겹이 쌓인 서사의 톱니바퀴를 매끄럽게 굴린 건 장편 영화 연출에 처음 도전한 신인 감독이었다. <러브레터>는 일본 멜로 장르의 명성을 다잡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첫 장편 영화다. 탄탄한 구조를 지닌 서사, 이츠키와 히로코가 지닌 기억을 관통하는 눈의 이미지, 그를 비롯한 아름다운 미장센, 과거와 현재를 유려하게 오가는 편집 등 흠잡을 데 없는 장편 데뷔작을 선보인 이와이 슌지는 단번에 거장의 칭호를 얻었다.

<러브레터>

<러브레터>는 그가 지닌 압도적인 재능의 싹을 확인할 수 있던 작품이기도 했다. <러브레터>가 많은 이들에게 첫사랑 영화로 기억되는 이유는 교복을 입은 소년, 소녀 후지이 이츠키의 에피소드가 더 세게 관객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 이와이 슌지 감독은 <러브레터>를 시작으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하나와 앨리스> 등을 통해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10대들의 심리를 생생히 포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해냈다.


<러브레터> 그 자체, 나카야마 미호의 1인 2역

<러브레터>

<러브레터>는 남자 주인공 없이 완벽한 멜로를 그려냈다는 점에서도 주목해볼 만한 영화다. 실존하지 않는 후지이 이츠키를 두고 편지를 주고받는 두 여성, 히로코와 이츠키를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으로 소화했다는 점은 더 놀랍다. 한 남자의 과거, 현재 연인이 같은 얼굴이란 설정은 관객의 심층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데, 이와이 슌지는 이런 설정에도 원 없이 사랑한 자들을 위한 메시지를 심어두었다.

<러브레터>

편지를 주고받으며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히로코와 이츠키의 일상은 교차 편집으로 나열된다. 이츠키를 통해 죽은 연인의 소중한 과거를 알게 된 히로코와 히로코를 통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이츠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삶의 빈칸을 채운다. 얼핏 이 광경은 이츠키가 히로코의 얼굴을 한 자신에게, 히로코가 이츠키의 얼굴을 한 자신에게 스스로 안부를 묻고 지난날의 상처를 매듭짓는 과정으로 읽히기도 한다. 여러모로 두 캐릭터의 맞닿는 부분과 개성 있는 부분을 확실히 짚어 몰입도를 높인 나카야마 미호의 연기에 극찬을 보낼 수밖에 없는 부분. 나카야마 미호의 필모그래피 대표작으로 <러브레터>가 빠질 수 없는 이유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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