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왜 호러 영화를 무서워하는가? 리마스터링 걸작 <큐어>가 섬뜩한 이유

2000년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후보였던 조지 부시측은 TV광고를 제작하면서 상대측 민주당 후보인 앨 고어를 언급한다. 관료주의자 Bureaucrats 라는 단어를 보여주면서 애니메이션 효과를 넣는데, 화면 앞부분에서 뒤로 날아가는 이 단어가 등장할 때 맨 처음에 노출되는 부분이 단어의 뒷쪽 4개의 철자인 쥐새끼 Rats 였다.

앨 고어 = 쥐새끼라는 인식을 무의식에 심어주기 위한 부시측의 꼼수라는 주장이 있었지만 공화당은 발뺌했다. 그 광고가 집행 된 후에 부시의 지지율이 오르진 않았지만 고어는 하향했다. 선거라는 것이 각자 집토끼를 3:3정도 보유한 상태에서 4할의 중도층을 잡는 싸움이라고 했는데, 그 영역에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의식하기 힘든 사소한 자극이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서브리미널subliminal 효과라고 한다. ‘빙산의 일각’으로 주로 표현되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서 서브리미널은 수면의 얇은 막 정도쯤된다. 물 아래와 위로 대변되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뚜렷이 존재한다고 증명된건 아니다. 하지만 잠재의식은 외부의 정보를 검토하고 해석해서 필요한 것들만 의식에 전해주고, 나머지는 무의식에 저장한다고 한다.

즉, 그 외부의 자극이 무의식과 많이 엇나가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위의 광고가 중도층에겐 영향을 끼쳤지만 기존 지지층을 이탈시키진 못한 것과 비슷한 것이다. 중요한 건 단번의 광고가 아니라 수신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 였다.

얍삽하기는

리마스터링 걸작 <큐어>, 이면이 드러나는 주인공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큐어>(1997)가 개봉했다. 90년대 부터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은 이미 다 관람을 해서 이후의 영화들에 영향을 끼칠만큼 끼쳤기에 왜 지금인지는 의문이 들지만, 4k로 리마스터링 된 화면은 그저 반갑다.

살인교사 용의자 (용의자라는 표현도 애매할 수 있다) 인 마미야 (하기와라 마사토 분) 는 최면을 걸어 사람들로 하여금 목에 X자를 그어 죽이게끔한다. 그는 최초의 최면살인을 구사한 사람을 연구하다가 결국 스스로 그것을 퍼트리는 전도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그를 쫒는 형사인 다카베 (야쿠쇼 코지 분)는 정신병이 있는 아내 (나카가와 안나 분)를 돌보는 가운데 마미야를 추격하며 결국 그의 최면에 걸려들어 전도사가 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다카베는 자신의 간호사를 교사하여 아내를 살해하고, 식당의 직원에게 최면을 걸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살인이 벌어지게끔 한다.

이 컷의 다음 장면이 정말 충격적이었다.

다카베는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마미야의 집으로 들어가서야 그가 심리와 최면에 능한 의대생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나 폐품지대에 위치한 그의 방으로 향하면서 보게되는 광경들.. 소각로가 있는 공장지대로 들어가 – 철창 속 동물을 보고 – 문을 열고 – 어둠 속에서 – 라이터를 켜는 행위가 사실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최면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장치였다. 그가 잠깐 집으로 들려서 보게 되는 목을 맨 아내의 이미지는 이미 그가 최면에 걸리기 시작함을 암시한다. 이 장면은 마치 그 최면 요소에 관객조차 전염되도록 편집되고 연기하고 있어서, 갑자기 이 화면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이미 효과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극중 정신병원 의사인 사쿠마(우지키 츠요시 분)의 말처럼, 최면이 곧바로 살인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다만 평소에 피최면자에게 혐오나 살의등 부정적 감정이 있으면 그것이 극대화된다. 마미야는 누구도 죽이라고 한적이 없다. 그저 자신의 신경을 긁는 누군가에게 엑스표를 그어 지우라고 했을 뿐.

사쿠마의 자살은 그의 증오가 덜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다카베는 아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사랑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음 깊은 곳에선 귀찮음을 동반한 증오 비슷한 감정이 피어났을지 모른다. 금슬이 좋아보이는 이 한쌍이 부엌에서 한 프레임 내에서 잡힐 때, 평화로운 액션이지만 카메라는 쿼터뷰의 시점으로 부유하며 무엇을 보여줄지 몰라 불안함을 뿜는다. 그 낯선 안온함에서 덜컹거림을 느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 장면에서 신경을 긁는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다카베가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듣는 텅 빈 탈수기가 돌아가는 소리다. 비어있는 탈수기는 그 자체로도 비어있는 다카베의 내면을 비유하기도 하지만, 소리가 전달해주는 낮은 음역대의 휑뎅그레한 사운드는 공허함을 전달키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 소리는 다카베가 집으로 들어올때마다 그를 건드리고 있어서 여기서 스멀히 피어오른 부아가 용의자에게로 번지는 과정이 설득력을 가진다.

<큐어>의 사운드, 그리고 장르

<큐어>의 무서운 점을 논할 때 사운드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마미야가 갇힌 정신병원에서는 마치 폐품공장에서나 들릴법한 육중한 기계의 소리들이 짓누른다. 마미야가 다카베에게 직접 최면을 걸때는 불과 물의 사운드가 반복적으로 관객의 귀를 때린다. 사쿠마가 최면에 걸릴 땐, 여러 장소를 하나의 스산한 사운드로 묶음으로써 이미 걸려든 그의 심리를 대변한다. 이렇게 은유에 가까운 소리들도 좋지만, <큐어>를 특별하게 만드는 소리는 일상의 공간음이었다.

경찰인 오이다 (덴덴 분)는 마미야에게 최면이 걸린 다음날 동료를 살해한다. 그런데 햇살은 너무 좋고 평소처럼 멀리 지나는 자동차 음이 들리며 나무위에 앉은 새는 지저귄다. 카메라는 어떤 사견도 배제한 채 평화로이 롱쇼트로 두 인물을 잡고, 오이다는 손바닥 뒤집듯 단발의 총탄으로 동료를 죽인다. 살해 직후 그는 가려운 듯 귀를 긁는다. 살인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가려운 곳을 긁는 ‘일상적인’ 일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관조가 아주 잘 살아있다. 오지 야스지로 감독의 영향은 여전하다.

내 일상에서도 벌어질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주는 공포

삶의 대부분은 일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안전이나 평범에 가까운 데에서 살인이 벌어진다는 것은 영화에 드러난 살인 이외의 은밀한 살인이 더욱 많다는 뜻이다. 단지 일상과 동일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실은 내포된 끔직함이 사방에 깔린셈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서스펜스를 설명 할 때 늘 ‘테이블 아래의 폭탄’을 이야기하며 씬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일상성을 극대화하는 사운드의 아래 살인을 함으로써 영화 속 일상적 장면이 지나칠 때 마다 긴장하도록 관객을 두 시간이라는 거대한 서스펜스의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호러장르의 영화가 주는 가장 큰 무서움은 그것이 삶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실현 가능성에 있다. 그러므로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이 영화의 장르는 호러 일 수 밖에 없다.

우리 내면에 있는 ‘친절한 늑대’ VS ‘오만한 늑대’

마미야의 대화형식은 고구마 백만개를 먹인다. 경찰간부들과의 대담에서는 내 목구멍이 막힐 것 같았다. 결국 경찰 본부장은 분노한다. 그런데 순간 카메라는 본부장의 시점 쇼트가 되어 관객은 마미야와 눈이 마주친다. 사이즈는 본부장을 쳐다보는 클로즈 업이다. 극장의 스크린에서 아주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이 앵글은 연출자가 스크린을 뚫고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당신 누구야? 당신이 누군진 당신이 직접 생각해”

깔끔한 이미지의 용의자는 <살인의 추억>에 영향을 끼친다.

서브리미널 효과는 단지 잠재의식을 활성화하는데 불과하다. 그것으로 뿌리박힌 생각 자체를 바꿀순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자극에 단단해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결국 사소한 자극이 인간의 감정이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의식과 잠재의식 간 소통의 개념이다. 우리의 마음속엔 그 자극으로 커질 악마가 살고있을까?

체로키 인디언의 격언에는 사람의 마음 속 친절한 늑대와 오만한 늑대가 싸우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의 내면에선 그 두마리가 늘 다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뜻 친절이 승리하길 바라지만 결과 또한 늘 그럴까? 두 마리 늑대중에선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선에도 정의에도 그냥은 없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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