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없이 낭만적인, 그리고 쓸쓸한 : <중경산림> 비견할 90년대 홍콩 영화들

가끔 극장 상영 시간표를 보면 ‘이 영화 아직도 해?’ 할 정도로 빈번하게 재개봉하는 인기작이 있다. 그중 최근 가장 재개봉이 잦은 건 코로나19로 삭막해진 감성을 채워주는 것 같은 낭만이 만개하는 홍콩영화다. 이번에 <중경삼림>이 재개봉을 했는데, <중경삼림>과 함께 볼 만한, 낭만을 채워줄 90년대 홍콩영화들을 소개한다.


장국영이라는 사내의 초상, <아비정전>

1990년대 홍콩 영화에서 이 사람 이름을 뺄 수는 없다. 과장 좀 보태면 그 시절 홍콩 영화는 이 사람 이름 석 자로 요약이 가능한 것에 가깝다. 왕가위. 1988년 <열혈남아>를 시작으로 1997<춘광사설>까지, 그의 작품은 영국령 홍콩의 황혼기가 품은 낭만과 허무를 완벽하게 담아냈다. 이번에 개봉한 <중경삼림>이 이런 낭만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굳이 여러 차례 언급하면 지겹기만 할 테니 그 전작 <아비정전>을 다뤄보겠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의 정서적 거리는 4년이란 시간처럼 멀다. <중경삼림>은 사람을 우겨넣은 듯한 충킹맨션에서 닿은 듯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마음에 품은 이들의 이야기라면, <아비정전>은 영원히 차지할 수 없는 사랑을 탐닉하는 인물들의 군상에 가깝다. 왕가위 감독 영화에서 고독을 빼놓을 수 없지만, <아비정전>처럼 모든 인물을 고독하게 그린 작품도 드물다. 그럼에도 <아비정전>을 보면 뭔가 거부할 수 없는 낭만스러움이 마음 한편에 남는다. 그 몫은 오롯이 장국영이란 배우의 것이다.

<아비정전> 전 장국영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유약함이었다. <영웅본색> 같은 남자 냄새 나는 영화에서도 그는 다소 본인 중심적인 ‘동생’ 송자걸이었고, <천녀유혼>에서도 순박하다못해 순진한 영채신이었다. 그런데 <아비정전>의 아비는 장국영이란 배우의 아우라를 확장시켰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랑을 원하면서 끝내 어떤 진심도 쟁취하지 못한 채 쓸쓸하게 돌아서야만 했던 한 사내의 초상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영화 처음부터 “이 1분은 이제 지울 수 없는 1분이 됐어”라는 무맥락의 작업 멘트마저 설득시키는 장국영이었다. 이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영화에서 아비와 주변 인물들의 사랑에 대한 갈망이 결코 추하지 않은 건 장국영의 아름다움이 분명 큰 역할을 해냈다. 굳이 <아비정전>만이 아니라 90년대 홍콩 영화들을 살펴보면 장국영이란 배우의 그림자를 거둬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보인다.

아비정전

감독

왕가위

출연

장국영, 유덕화, 장만옥

개봉

1990.12.22. / 2017.03.30.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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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식 멜로 누와르의 정점, <천장지구>

우리에게 <비트> 정우성이 있었다면, 홍콩에는 <천장지구> 유덕화가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미남은 국가 불문 관객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남길 수밖에 없다. <천장지구>는 천애고아로 뒷골목 세계를 전전하는 아화(유덕화)가 우연치 않게 만난 죠죠(오천련)과의 사랑에 빠지며 겪는 일을 그린다. 누아르라기엔 범죄 자체가 사건이 되는 건 아니고, 로맨스라고 하기엔 처연하기 그지없는 지점을 그리며 홍콩식 멜로 누아르의 정점을 찍었다. 건달로 출연한 유덕화의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바로 직전에 나온 <열혈남아>와 자주 엮이곤 한다. 보통 영상미나 촬영 스타일의 멋은 <열혈남아>를, 삭막한 범죄계와 절절한 감정선은 <천장지구>를 좀 더 높게 친다. 영화가 개봉하고 주윤발과 오맹달의 우정에 자주 언급되곤 하는데, 당시 도박과 술로 기피 대상이 된 오맹달을 주윤발이 설득해서 출연까지 이어줬고 오맹달 또한 작심해서 명연기를 펼쳐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

천장지구

감독

진목승

출연

유덕화, 오천련

개봉

1990.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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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치의 페이소스, <서유기 : 월광보합·서리기연>

주성치 하면 코미디가 바로 떠오르긴 한다. 하지만 그만큼 마이너한 캐릭터의 페이소스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배우도 드물다. 주성치의 팬들은 그가 하는 코미디뿐 아니라 그가 펼치는 감정적인 연기과 기묘할 정도로 순간적으로 유발하는 눈물샘을 사랑한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이런 그의 장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 중 하나가 <서유기> 2부작이다. 유진위 감독이 재해석한 <서유기>는 손오공이 500년 후 환생한 지존보라는 산적 두목의 모험기(?)를 그린다. 초중반부는 깔깔 웃음을 자아내다가 후반부부터는 어떻게든 한계를 깨내어 운명을 바꾸려는 지존보/손오공의 고군분투가 관객에게 예상외의 감정적 여운을 남긴다. 주성치식 코미디에서 시작해 시간을 초월한 낭만 로맨스로 이어지는 과정이 이 <서유기> 2부작만의 매력. 최근 리메이크나 드라마화 등으로 시리즈를 다시 재가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원작만한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은 듯하다. 

서유기 – 월광보합

감독

유진위

출연

주성치, 오맹달

개봉

1995.09.16. / 2010.06.01.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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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까지 밀어붙인 ‘오우삼’식 액션, <첩혈속집>

90년대 홍콩영화를 논하면서 빼먹으면 섭할(섭한 것을 넘어 혼날) 것은 홍콩 누아르다. 89년 <영웅본색>과 <첩협쌍웅>의 등장은 홍콩 범죄 조직과 경찰이 펼치는 비정한 싸움을 한국 관객까지 매료시켰다. 이 영화들을 연출한 오우삼은 순식간에 세계적인 스타 감독이 됐다. 그런 그가 갈고닦은 실력으로 비정하고 피 튀기는 영화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첩혈속집>이었다. 강력계 형사와 조직에 잠입한 형사가 마침내 거대 조직을 탕진한다는 내용인데, 영화에는 그 과정에서 동료들의 희생과 조직 간의 배신 등을 가감 없이 담았다. 거기에 전작들에서 노하우가 쌓인 오우삼이 액션 장면마다 극한의 연출력으로 더욱 처절한 이야기로 영화를 빚었다. 표현 수위야 현대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산부인과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통념적인 선을 파괴하면서 한국에선 DVD 발매에야 무삭제 원본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영화에 낭만이란 단어가 썩 어울리지 않지만, 홍콩 누아르의 비정함과 총격전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점에서 장르적 낭만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주윤발, 양조위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도 장점. 

주윤발의 첩혈속집

감독

오우삼

출연

주윤발, 양조위, 모순균

개봉

199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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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참 예쁜 영화’, <친니친니: 안나마덕련나>


90년대 홍콩 영화를 얘기하니 아무래도 허무나 쓸쓸함이 감도는 영화들을 언급할 수밖에 없다. 당시 홍콩은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는 격동의 시기를 겪고 있었기에 영화에도 그런 정서가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시기가 홍콩 영화의 전성기였던 만큼 멜로드라마에서도 수작이 많이 나왔다. 노래로도 유명한 <첨밀밀>이나 남장 여자 로맨틱 코미디의 정수 <금지옥엽> 등이 관객들을 설레게 했다. <친니친니>(당시엔 이렇게 개봉했고 현제는 원제인 안나마덕련나로 부른다) 또한 많은 관객들이 사랑하는 작품.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단순한 사랑 얘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인과관계를 섞으면서 참신함을 더했다. 명실상부 명작!이라고 장담하긴 어려운 영화인데도 지금까지 마음에 품고 있는 팬들이 있는 이유는 영화가 참 예쁘기 때문. 금성무-곽부성-진혜림이란 스타들의 매력과 홍콩의 아름다운 배경이 관객들을 붙잡아놓는다. 

친니친니 : 안나마덕련나

감독

해중문

출연

금성무, 곽부성, 진혜림

개봉

199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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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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