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새해가 밝은지 벌써 열흘. 위드 코로나 단계로 뒤숭숭했던 2022년을 보내며 돌아본 후회스러운 일들은 무엇이었는지, 또 새로운 2023년이 오기를 기다리며 꾹꾹 눌러 써봤던 새해 다짐들은 잘 지켜지고 있는지…. 운동, 금연, 독서부터 열린 하늘길을 통한 여행까지 올해 하고 싶은 일, 지켜나가기로 한 자신과의 약속은 열흘 동안 그 길을 잘 가고 있을까? 오늘은 고생했으니 내일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기자며 작심삼일로 또 무너지고, 그렇게 어제의 나를 탓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럴 때 나를 도와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3000년의 기다림>(감독 조지 밀러)이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이제 막 시작한 2023년을 놀랍게 변화시켜줄지도 모른다!
적당히 성공하고 홀로인 삶을 선택한 알리테아(틸다 스윈튼)는 지금 이스탄불행 비행기 안이다. 인류의 모든 이야기에서 공통된 진실을 찾기 위해 1년에 한두 번 낯선 땅을 여행하는 그녀의 직업은 서사학자. 중국, 남태평양의 섬들, 레반트 등 문명의 발상지와 이국적인 문화가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녀의 여행지가 된다.
여느 여행지와 마찬가지일 거로 생각했지만, 이번 이스탄불 여행은 뭔가 다르다. 공항에서 만난 보라색 요정 꼬마부터 그녀를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하얀색 키다리 정령까지. 결국 그녀는 세미나 도중에 기절하고, 걱정하는 교수들을 뒤로한 채 호텔로 돌아간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며. 하지만 그곳에서 그녀는 이스탄불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산 유리병 속의 지니를 불러내고 만다. 전동칫솔로 더러워진 유리병을 닦다가 말이다.
아, 자꾸 자기 눈에만 보이는 요정 같은 존재들을 애써 무시했는데, 그 결과가 램프의 요정 지니(이드리스 엘바 분)라니! 거대한 몸집의 지니를 뒤로한 채 조식 룸서비스를 받아 들고 돌아보니, 어느새 인간의 크기로 작아진 지니가 왕들이나 먹었을 법한 특급 조식을 서빙하며 말한다.
“당신은 날 풀어준 은인이니까, 감사의 표시로 세 가지 소원을 들어드립니다. 세 가지는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능력의 개수가 무한한 소원은 빌 수 없어요. 영원한 생명도 빌 수 없고요. 마지막으로 죄를 없애주거나 모든 고통을 끝내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일개 정령일 뿐이니까요. 제약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쯤 되면 이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 봐도 알리테아는 빌고 싶은 소원이 없다. 세상 모든 이야기를 통달한 서사학자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알던 모든 신화는 곧 존재의 이유를 다하고 은유로 전락할 것이며, 그 자리는 과학으로 대체될 것이라 믿는 알리테아. 그녀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은 오히려 소원을 비는 인간을 이용해 먹는 존재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는 지니에게 묻는다. 지니가 얼마 동안 이 작은 유리병 안에 갇혀 있었는지, 그를 불러냈던 이전 주인들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의 세 가지 소원은 무엇이었는지 말이다. 과연 최고의 서사학자라는 설정다운 답변이다.
자, 이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셰헤라자데가 하얗게 밤을 밝혀야 했던 ‘천일야화’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훨씬 경이롭고 환상적이며 때로는 욕망이 충돌해 잔혹하기까지 한 지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3000년의 기다림 속에 지니가 만났던 주인들은 시바 여왕과 지혜로운 왕 솔로몬부터, 오스만 제국의 술탄과 그 아들 무스타파까지, 인류사 3천 년 흐름 속에서 존재했던 인물들이다.
눈 밝은 관객은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솔로몬 왕이 시바 여왕을 찾아갔다는 설정에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라고 질문할 법하지만, 지니는 쿨하게 대답한다. ‘제가 거기에 있었으니까요’라고.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 서로 아이의 엄마라고 주장하는 두 어머니에게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눠주라는 명판결을 했다는 솔로몬 왕이 사실은 마법사였다는 이야기까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불어넣는 놀라운 감독의 이야기가 이제 막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부딪히며 자유롭게 시대와 공간을 전환하는 환상적인 화면과 함께.
조지 밀러 감독은 어떻게 이 놀라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 단초는 영국 소설가 A.S.바이어트가 1994년 출간한 단편 소설에서였다. 중동, 아랍 지역의 오래된 이야기를 재료로 다섯 편의 신화를 쓴 <[The Djinn in the Nightingale’s Eye>에서 영감을 받아 영화화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바이어트 소설가는 곧 아흔이 되고, 조지 밀러 감독은 곧 여든이 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조지 밀러 감독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변형시켰고, 결국 역사의 사실과 환상적인 허구가 씨줄과 날줄처럼 직조되어 <3000년의 기다림>이 스크린에 피어올랐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서사학자 알리테아 역은 <설국열차>(감독 봉준호, 2013), <닥터 스트레인지>(감독 스콧 데릭슨, 2016) 등 작품마다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선보였던 틸다 스윈튼이 맡아 열연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조지 밀러 감독의 열렬한 팬이었음을 고백하며, 조지 밀러 감독과 봉준호 감독의 영화 작업에서의 공통점을 짚어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조지 밀러 감독의 모든 작업과 기술, 능력에서 느낀 건 실제로 촬영할 때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고 유연하다는 것이다. 감독은 엄격한 규칙이라기보다 정립된 규칙을 따른다. 작업할 때 스토리보드와 숏 리스트를 사용하는데, 종이가 노랗게 바랠 정도로 오래 보곤 한다. 감독이 심사숙고해서 길고 잘 짜인 틀을 만들어 온다. 막상 촬영할 때, ‘이렇게 해보는 건 어때요?’라고 의견을 내면 흔쾌히 해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감독이 원하는 그림이 나온다. 다른 감독과도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친구이자 파트너라 영광인 봉준호 감독이다. 봉준호 감독도 스토리보드를 사용하고 편집자를 옆에 앉혀놓고 작업한다. 그런 점에서 조지 밀러 감독도 비슷하다. 잘 짜인 틀을 제시하지만, 재량껏 연기해도 된다.”
자유의 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불러낸 인간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줘야만 하는 정령 지니 역에는 강렬한 카리스마와 묵직한 저음이 매력적인 배우 이드리스 엘바가 분했다. <토르> 시리즈에서 아스가르드의 안위를 책임지는 서늘한 눈매의 헤임달 역할로 이미 국내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이다. 3000년 동안의 이야기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이드리스 엘바는 그저 흰색 가운 하나만 걸쳐도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숨길 수 없을 정도.
어떤 동화에서든, 영화에서든 지니는 늘 말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고. <3000년의 기다림>의 지니 역시 알리테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지니는 세상 모든 이야기를 아는 서사학자인 그녀에게 오히려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3000년 전, 지니의 주인들이 빌었던 소원들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세상의 모든 지식? 영원한 사랑? 세계를 발밑에 두는 권력? 지니의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우리는 결국 하나의 거대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어긋난 욕망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말을.
<3000년의 기다림>의 영상미는 가히 환상적이라 부를 만 하다. 하지만 스크린을 형형색색으로 물들이는 영상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이미 언급했듯 잘 직조된 이야기들이다. 역사의 사실들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몰입을 넘어 적극적인 해석을 하도록 안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해석 하나. 이동진 평론가는 영화가 개봉한 1월 4일 진행한 GV에서 영화 속에 등장한 모든 일들이 주인공 알리테아가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주인공은 큰 배신을 겪고 마음을 닫아버렸고, 일로서 자신의 결핍과 상처를 달래려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야기에 몰두하는데, 현실을 직시하는 게 어려우니까 자기가 만들어낸, 혹은 서사학자로서 접했던 수많은 이야기 속으로 자신의 문제를 도피시키려고 한다. 그런 사람이 결국 이야기를 통해 힘을 얻어내고, 현실의 상처를 직시하고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3000년의 기다림>이 마치 한 여자가 헛것을 보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틸다 스윈튼도 한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녀의 눈에만 지니가 보이는 거다. 다른 사람 눈에도 지니가 보이는지 관객들이 궁금해할 텐데 그 부분은 영화에서 장난을 좀 쳤다. 하지만 알리테아가 진짜로 지니를 불렀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요점은, 그녀가 원하는 모습의 지니가 나타났다는 것이다”라는 말로 알리테아와 지니의 만남에 무게를 뒀다.
이 부분을 영화에서 조금 더 들여다보면? 알리테아는 전남편으로부터 ‘공감 능력이 없다’라는 비판을 받고, 갈망이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그녀가 지니와의 만남을 매개로 진화한다는 점에 의미가 부여된다. 알리테아는 지니의 오랜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정과 이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갈망 없음이 사실은 진심이 아닌 ‘갈망 없음의 상태’로 있어야만 가장 평화롭기에 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결코 타인의 인생을 통제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인생뿐이라는 사실도 받아들인다. 그렇다. 지니를 만나며 그녀는 갈망하는 삶으로 전환한다. 지니의 대사처럼 말이다.
“아무도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절 알거나 느끼지 못하는 세상을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예요. 우린 누군가에게 진짜일 때에만 존재합니다. 이게 우리 운명입니다. 당신이 소원을 빌지 않으면, 두 세상의 틈에 갇혀 외롭게 있어야만 하죠. 소원을 비세요. 마음이 갈망하는 바를.”
그래서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아니, 과연 소원을 빌기나 했을까? 3000년 동안의 이야기를 알리테아에게 조근조근 풀어놓던 지니는 결국 사라진다. 세상의 수많은 소음들, 발화되자마자 휘발되는 수억 개의 이야기들 속에서 힘들어하는 알리테아의 고통을 짊어지고 그녀에게 온전한 침묵의 세계를 선사하기 위해서. 그녀가 더 이상 타인의 소리,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유롭게, 오롯이 자기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렇게 그녀가 새로운 이야기를, 자신만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도록.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기중심을 찾지 못하고 늘 우왕좌왕하던 우리에게 의미 있게 다가오는 감독의 선택이 눈에 띄는 지점이다.
자,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자. 2023년이 밝은지 열흘째. 계묘년에 당신이 이루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수많은 불면의 밤을 내일이면 잊을 자잘한 걱정들로 보냈던 당신이 올해 진정으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 당신은 한 걸음씩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고 있나? 그리고 그 마음은, 그 갈망은 진짜인가? 더 이상 두 세상의 틈에 외롭게 갇혀 있지 않기 위해, 지금 당장 소원을 빌어보자! 당신의 마음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을. 그리하여 당신의 2023년이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사족. 영화를 보고 나서 궁금했던 점 하나. 정령 지니를 3000년 동안 병 속에 갇히게 건 시바 여왕 때문이었다. 지니를 세상 밖으로 다시 불러낸 이들은 무라드 4세의 애첩 그리고 지혜로운 여인 자피르였다. 왜 여자들만 지니를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일까?!?!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