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명화] 연인이거나 부부인데, 여사친 남사친 있는 사람? <러브, 로지> 보고 갑시다

부부가 함께 영화를 봅니다. 멜로물을 보며 연애 시절을 떠올리고, 육아물을 보며 훗날을 걱정합니다. 공포물은 뜸했던 스킨십을 나누게 하는 좋은 핑곗거리이고, 액션물은 부부 싸움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훌륭한 학습서입니다. 똑같은 영화를 봐도 남편과 아내는 생각하는 게 다릅니다. 좋아하는 장르도 다르기 때문에 영화 편식을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편집자주-


“우리 OO 진짜 귀엽네 ♥” 남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달린 댓글 하나. 남편의 애칭인 듯 보이는 OO에 한 번 놀라고 제일 끝에 붙은 이모티콘에 두 번 놀란다. 화룡점정은 프로필 사진으로 언뜻 보이는 길다란 머리. 뭐야 여자였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 사건은 남편과 나의 연애시절 일어난 일이다. “진짜 웃긴 얘네. 초등학교 동창인데 왜 이런 댓글을 달고 난리지. 당장 지우라고 했어” 내 기분을 살피느라 길어진 남편의 해명이 되레 화를 키웠다. 뭐?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니

영화 <러브, 로지 : Love, Rosie>는 주인공 로지의 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12년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또 다른 주인공 알렉스가 등장한다. 로지와 알렉스는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함께 겪어온 단짝이다. 한 침대에서 이어폰을 나눠 끼고 뒹굴어도 불편함이 없어 보이는 그야말로 막역한 사이. 심지어 로지는 알렉스의 얼굴에 난 여드름까지 짜주려고 한다. 노랗게 농익은 뾰루지를 건드리려는 용기는 찐친이 아니라면 가지기 힘든 일이다.

성별이 다르다 보니 둘은 서로에게 보완재 역할을 한다. 로지에게 들이대는 시답잖은 남자들은 알렉스가 걸러내고, 알렉스의 넥타이는 로지가 단정하게 메어 준다. 19금 이야기도 거침없이 나눈다. 갑작스레 산부인과에 가게 된 로지는 가장 먼저 알렉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알렉스는 여자친구와 첫 거사를 치른 일까지 로지에게 세세히 보고한다. 이쯤 되니 남녀 사이에 우정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방심하는 순간 영화의 기류가 급격하게 바뀐다.

타이밍이 어긋났을 뿐, 모든 순간이 사랑이었네

알렉스와 로지의 심상찮은 눈빛은 영화 초반부터 심심찮게 발견된다. 둘은 고등학교 졸업파티에 각자 다른 파트너와 가지만 시선은 계속 서로에게만 머문다. 이른바 ‘멜로 눈깔’을 장착하고서. 알렉스는 대학을 가게 되고 로지는 고향에 남게 되며 이별을 하는 상황에서 그 애틋함은 극에 달한다. 키스를 할 듯 말 듯 가까워진 두 사람의 입술은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한다.

사랑이 이루어질라 치면 타이밍이 어긋난다. 함께 보스턴으로 대학을 가기로 했지만 로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덜컥 임신한다. 그리고 아이를 낳은 로지는 자연스레 알렉스와 멀어진다. 알렉스와 연락이 닿고 나서도 타이밍은 계속 안 맞다. 알렉스의 보고 싶다는 말에 로지는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지만 알렉스에게는 그새 여친이 생겨 버린다. 심지어 알렉스는 그 여친과 결혼을 하게 되고 시간은 또 속절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알렉스가 이혼한 날 이번엔 로지가 결혼을 한다. 알렉스가 로지를 찾아 영국으로 온 날에도 로지의 곁에는 남편이 함께다. 로지도 이혼을 하며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끝이 보이나 했지만 웬걸. 알렉스가 두 번째 결혼을 해버린다.

알렉스와 로지만 두고 보면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랑이다. 타이밍이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없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를 두고 보면 나머지 사람들이 불행하다. 서로가 아니면 그 누구에게도 정착하지 못하는 알렉스와 로지. 우정으로 가장한 그 유별난 사랑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만 들러리가 됐다. 로지를 쳐다보는 알렉스의 애절한 눈빛은 알렉스를 바라보는 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뿐이다.

한 번이라도 딴 마음 품은 적이 없어?

그 들러리가 내가 될까봐 남편을 다그칠 때가 있었다. 그날의 사건 이후 남편의 여사친은 경계 대상 1호가 됐다. 인스타가 비공개로 되어있는 그녀의 정보를 캐기 위해 남편의 폰을 수색하는 찌질함도 더했다. 싸이월드 시절 파도를 거세게 탔던 전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내가 남사친이 없느냐? 그것도 아니다. 숫자로 보면 남편보다 훨씬 우위다. 이런 나를 두고 남편은 내로남불이라 비난하지만 나도 할 말은 있다. 내 남사친들은 걱정할 만한 놈들이 절대 아니라는 것. 이런 류의 로맨스에 대입만 시켜도 온 몸에 소름이 돋으니 말이다. 그러면 남편이 또 반박한다. 본인에게 여사친도 그런 존재라고. 하지만 나는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러브, 로지>의 로맨스는 주인공들의 잘난 외모가 한몫했다.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으로 알렉스와 로지는 매우 잘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알렉스와 로지의 미모에 감탄을 했다는 관객이 수두룩하다. 저렇게 잘생기고 예쁜데 사랑의 감정이 안 생기고 배기겠는가. 연애 시절 남편과 나는 객관적이지를 못했다. 남사친이나 여사친이 행여 채갈까봐 그저 노심초사했다. 오죽하면 단둘이 밥은 먹어도 되지만 술은 마시면 안되는 이성친구 행동강령까지 만들었을까. 콩깍지가 한커풀 벗겨지고 나니 이제야 남편의 해명이 납득이 된다. “자기 눈에야 내가 잘생겼지, 내가 걱정할 만한 얼굴은 전혀 아니잖아?”

수많은 희생자를 남긴채 결국 해피엔딩

로지가 차린 호텔에 알렉스가 찾아온다. 그리고 로지에게 말한다. “로지 던 나와 댄스파티에 갈래?” 12년 전 함께하지 못했던 졸업 파티를 이제서야 함께 하려 한다. 12년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남은 인생은 함께하리라 다짐한다. 그리고 로지는 답한다. “늦었지만 용서해 줄게”

알렉스와 로지는 끝끝내 해피엔딩을 맞는다. 하지만 해피 한 것은 둘 뿐. 그 사이 수많은 희생자가 속출했다. 희생자라고 하면 비단 둘의 사랑에 들러리가 된 인물들 뿐만이 아니다. 속 터지는 로맨스에 몇 번이나 시청을 중단하고 싶었던 관객들도 엄연한 희생자다. 로지와 알렉스의 미모, 그리고 뛰어난 영상미가 없었다면 완주하지 못 했을 영화라는 평가가 자자하다.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러브, 로지>가 새드 엔딩이 됐다. 이 영화가 나옴으로써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것이 다시 한번 증명됐기 때문. 사랑의 마음이라곤 단 1%도 없는 절친들에게는 통탄할 만한 전개다. 남편과 남편의 여사친도 그중에 하나다. 남편의 여사친은 그날의 사건 당일 내게 사과를 전해왔었고, 나는 얼마 전 그 여사친의 결혼식에 초대받아 축하의 기쁨까지 나눴다. 그들은 걱정할 만한 사이가 아니었고, 세월이 모든 것을 증명했다. 하지만 <러브, 로지>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로지와 알렉스는 12년이 지나서도 다시 만났다. 나도 12년 정도는 긴장하고 지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매일신문 임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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