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때가 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있으니 ‘올해의 베스트’ 영화를 꼽는 일이다. 올해는 대체로 <헤어질 결심>으로 중지가 모이는 분위기이다.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경지라는 평가를 받는 <헤어질 결심>은 구조적으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버티고>(1954)를, 정서적으로는 데이비드 린의 <밀회>(1945)와 닮았다. 특히 <밀회>는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 손꼽은 바 있다.
원제 <Brief Encounter>의 의미처럼 각기 가정이 있는 중년 남녀의 한 달간의 ‘짧은 만남’을 그린 <밀회>는 <헤어질 결심>뿐 아니라, 많은 멜로드라마 혹은 불륜을 소재로 한 영화에 영감을 준 작품이다. 대표적으로 <캐롤>(2016)과 <정사>(2003)을 들 수 있는데,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밀회>의 동성애 버전이고, 파트리스 쉐로의 <정사>는 현대의 개방적인 성 풍속에 맞게 각색한 파격적인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멜로드라마의 고전’이라는 영화적 지위를 일궈낸 <밀회>의 데이비드 린 감독은 알프레드 히치콕과 더불어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절 가장 손꼽히는 성과를 거둔 영국 감독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콰이강의 다리>(1957) 이전과 이후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콰이강의 다리> 이후 제작된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닥터 지바고>(1965) 등은 스케일과 스펙터클이 주를 이루는 작품들이다.
반면, 그의 초기작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섬세하게 묘사한 소품이 대다수이다. 그중에서도 <밀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과 수미상관의 내러티브 구조, 그리고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연출을 통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수작이다. 데이비드 린과 더불어 <밀회>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영화의 원작 희곡 <스틸 라이프>의 작가 노엘 카워드이다. <밀회>가 한정된 공간에서 캐릭터들 간의 대사 위주로 진행되는 것도 희곡에서 출발한 ‘연극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제한적인 <밀회>의 공간 중 가장 중요한 공간은 기차역 카페이다. 가상의 공간 ‘밀퍼드 정션’역 카페는 가정주부 로라(셀리아 존슨)와 의사 알렉(트레버 하워드)의 운명적인 만남의 공간이자 수미상관 구조의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첫 씬인 기차역 카페에서 로라와 알렉은 힘겨운 이별을 고한다. 기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온 로라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린 두 남매를 돌보고, 남편 프레드(시릴 레이몬드)와 대화를 나누지만 번민에 찬 표정은 감출 수 없다. 로라의 이별에 대한 상실감과 가족에 대한 죄의식이 복합적으로 표현된 영화의 서두는 사진 1의 로라의 표정에 잘 나타나 있다.
사진 1은 프레드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로라가 문득 프레드를 걱정에 찬 눈빛으로 응시한다. 이어 로라의 내레이션이 시작되는 장면이다. 내레이션을 통해 로라가 프레드에게 다른 남자를 사랑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후 영화는 긴 플래시백을 통해 로라와 알렉의 만남, 사랑, 헤어짐을 차례로 서술한다. 표정이 강조된 로라의 바스트 쇼트와 내레이션으로 구성된 이 장면은 <밀회>의 근간이다. 영화 전체가 ‘로라의 고백’으로 열고, 닫는 구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진 2는 로라가 내면적 고백을 하는 집 거실에서 서서히 화면이 디졸브 되면서 기차역 카페로 공간이 전환된 장면이다. 집과 기차역을 오가는 공간 전환은 영화에서 수시로 반복된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기차역을 오가는 로라의 삶을 표상한 장면이기도 하고, 기차역 카페와 집 거실을 병치 시킴으로써 불륜이라는 판타지와 일상이라는 현실을 대비시킨 장면이기도 하다.
기차역에서 우연한 만남을 한 로라와 알렉은 밀퍼드 시내에서 또 우연히 만나게 된다. 호감을 갖게 된 둘은 매주 목요일마다 밀퍼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여느 연인처럼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는 등 데이트를 한다. 이때 이들이 보는 영화가 <Flame of Passion>(열정의 불꽃)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사진 3은 ‘열정이 타오른’ 로라가 기차에서 창밖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장면이다. 미소 띤 로라의 표정이 강조된 바스트 쇼트는 영화에서 로라의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여줌과 동시에, 창을 통해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구분하고 있다. 로라의 시선방향에서 카메라가 서서히 팬 하며 이어지는 장면은 로라와 알렉이 파리와 베니스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영화의 유일한 판타지 씬이다.
반면, 영화의 클라이 맥스라고 할 수 있는 사진 4는 가장 슬픈 장면이다. 로라와 알렉이 주위의 시선을 피해 알렉의 친구 집에서 사랑을 나누려는 순간, 친구가 집에 오게 되고 로라는 도망치듯 뛰쳐나오는 씬이다. 설상가상으로 비도 퍼붓고 로라는 거리를 정처 없이 배회한다. 트래킹 쇼트를 통해 로라의 참담한 심정을 드라마틱 하게 잡아낸 이 장면은 로라와 알렉의 사랑에는 얼마나 많은 장애물이 존재하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랑의 대가가 필요한지 역설한다.
사진 5는 로라와 알렉의 마지막 만남 장면이다. 이들의 ‘시한부 사랑’은 기차가 도착하면 이내 끝나 버릴 것이다.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둘의 표정, 비어가는 찻잔, 연신 들리는 안내방송과 기차 경적은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다. 기차가 도착하자 알렉이 뛰어나가고, 머뭇거리던 로라가 플랫폼을 향해 질주할 무렵 카메라가 사각 앵글로 변하면서 긴장은 공포로 바뀐다. 마치 선로로 뛰어들 것 같았던 로라가 갑자기 멈춰 서자 카메라가 정상 앵글로 돌아오면서 공포감이 해소되고 씬이 마무리된다.
사진 6은 로라의 내레이션이 끝나는 영화의 엔딩이다. 내레이션이 끝나자 남편 프레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행복한 생각은 아닌 것 같은 데?”라고 한다. 프레드의 말을 들은 로라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을 하며 프레드와 깊은 포옹을 나눈다.
사진 5, 6은 영화 내내 대비되는 판타지와 현실을 대표하는 장면이다.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과 제도와 시스템이 그 가능성을 차단한 공간은 각각 기차역 카페와 집 거실로 표현되었다.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개방 공간이 기차역이라면, 가족만이 정주할 수 있는 폐쇄 공간이 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장센적인 측면에서도 감독은 의도적으로 각기 다른 두 공간에서 캐릭터를 비슷한 사이즈와 배열을 통해 대비시키고 있다. 이러한 미장센의 유사성은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이 동전의 앞 뒷면처럼 별 차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약 기차역에서 로라가 알렉의 손을 잡았다면, 알렉과 프레드의 위치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판타지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판타지가 되었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파격적인 소재, 유려한 카메라워크, 절제된 연기, 그리고 미니멀한 스토리텔링 등이 결합하여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한 <밀회>는 한두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가 아니라, 매 순간 영화적 순간으로 넘쳐나는 영화이다. ‘영화의 힘’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영화의 힘’을 온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그런 영화가 바로 <밀회>이다.
영화감독 최인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