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불문 마음 속 채워지지 않는 구멍! 우리를 서서히 죽이는 시간 이겨내기 <우연과 상상>

먼저 부끄러운 고백 하나. 영화를 전공했고, 영화 글을 쓰면서도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를 올해 처음 봤다. 류스케 감독과의 첫 만남은 파주 헤이리 씨네마에서 오동진 영화평론가가 GV로 진행한 <해피 아워>였다. 러닝타임은 무려 5시간 30분. 인터미션이 있을 정도의 길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나는 과연 ‘해피’할 수 있을까? 4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왜 영화 제목이 <해피 아워>인지 곰곰이 고민했던 기억….

그날 GV에서 오동진 영화평론가는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를 극찬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면서도 영화로서의 길을 훌륭하게 간 작품이라고. 류스케 감독은 ‘신일본영화’ 탄생의 신호탄이며, 아마도 <드라이브 마이 카>가 아카데미에서 수상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예상대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제94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았다.

통상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기면, 그 과정에서 텍스트를 충실히 영상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강박과 이를 넘어서려는 욕망이 충돌하며 ‘역시 원작보다 못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 세대를 풍미했던 원작 작가의 문체를, 행간에서 가져온 설정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감독의 영상 문법으로 승화한 느낌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관객들이 지적하며 공감했다.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해피 아워>는 지난해 12월 국내 개봉했다. 아, 이렇게 매력적인 감독의 영화를 더 보고 싶은데…. 하고 생각할 무렵, <우연과 상상>의 개봉 소식을 접했다. 내가 가장 주목하게 된 일본 감독의 영화가 무려 1년여 사이에 세 편이나 한국에서 볼 수 있다니. 이 무슨 아름다운 우연이란 말인가. 나는 이 영화에서 어떤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해피 아워>만큼은 아니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 역시 러닝타임이 3시간으로 긴 편이다. 이에 반해 <우연과 상상>은 약 2시간으로 그의 전작들에 비해 짧은 편이다. 게다가 3편의 에피소드가 연결돼 실제 체감되는 러닝타임은 그보다 더 짧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주는 울림까지 얕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판이다. 전작에서 보이는 느슨한 이야기 구조와 흐름은 여전하지만, 오히려 세 편의 각각 다른 이야기가 묘하게 하나로 연결된 듯한 느낌을 주며 관객에게 더 큰 영화적 상상력을 자극시키기 때문이다.

1편 제목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다. 모델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함께 사진 작업을 하는 작가 츠구미(현리)와 둘도 없는 친구. 여느 날처럼 흡족한 촬영을 마치고 귀가하는 택시 안에서 츠구미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이야기한다. 한 남자를 만났고, 무려 17시간을 끊이지 않는 대화를 나눴다는 것. 하지만 아직 두 사람은 연인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남자가 전 여자친구의 바람으로 힘들어했던 과거를 아직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연상시키는 택시 안에서의 두 친구의 긴 대화는 편안함을 주면서도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둘만의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적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한 치의 오차 없이 이동하고 있음에도, 대화가 진행될수록 합치되지 않고 둘 사이에 생겨나는 미묘한 이질감으로 관객들은 묘한 불안감을 감지한다. 사랑에 빠진 츠구미를 내려주고는 차를 돌려 한달음에 찾아간 남자는 다름 아닌, 2년 전 자신의 바람으로 헤어진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였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대화의 감독’답게 메이코와 카즈아키의 재회 씬도 때로는 공중을 부유하는 의미 없는 말들과 때로는 폐부를 찌르는 진심의 말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다. 옛 연인을 다시 만나면서 생겨나는 후회와 이별에서 느꼈던 배신감. 이 아픔을 꼭 갚아 주려던 복수심부터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그리고 내가 버린 사랑을 친구가 차지하는 건 싫다는 이율배반적인 감정의 말들이 격렬하게 부딪히며 한밤의 고요한 사무실 공간에 산산이 흩어진다. 친구의 ‘썸남’이 자신의 옛 남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를 찾아간 것도 우연이었을까? 그리고 마침내 삼자대면에서 메이코는 카즈아키에게 당당하게 ‘양자택일’을 요청할 수 있을까? 류스케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이 마법처럼 빛을 발하며 1편 에피소드는 끝난다.

2편 제목은 ‘문은 열어둔 채로’다. 아쿠타가와상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한 세가와 교수(시부카와 키요히코)는 매사에 원리원칙을 준수한다. 방송국 취업에 성공했지만 세가와 교수의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아 졸업에 문제가 생긴 사사키(카이 쇼우마)는 무릎을 꿇고 교수에게 선처를 부탁한다. 하지만 세가와 교수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 앞 강의실에서 워크숍을 하던 학생들에게 ‘교수 갑질’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그는 “문을 열어둔 채로 두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앙심을 품은 사사키는 파트너 나오(모리 카츠키)에게 세가와 교수를 파멸시켜 달라고 사주한다. 단단히 유혹할 결심을 하고 연구실을 찾은 나오에게 세가와 교수는 여전히 “문을 열어둔 채로 두라”는 원칙을 고수한다. 오히려 자신의 소설을 낭송하는 나오를 보며 글이 말로 전환될 때 느껴지는 매력에 눈을 떴다고 고백한다. 나오는 교수의 진심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사과한다. 주체하기 어려운 성욕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성격 탓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자신의 문제까지 상담하면서. 세가와 교수는 이렇게 나오를 위로한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주변에서 자신을 가치 없다고 치부한다면, 맞서 싸우세요. 세상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한다면 거부하세요. 나만 아는 자신의 가치를 포용할 줄 알아야 해요. 혼자 하려면 매우 힘들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해요. 그걸 지켜낸 자만이 뜻밖의 인연을 만나 용기를 줄 수 있으니까요. 평생 일어나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누군가 그걸 안 하면 그건 절대 일어나지 않아요.”

순식간에 차분해진 공간. 더 이상 말은 공허하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이 다시 글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마치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무언가’가 작동한다. 나오가 연구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한 파일을 세가와 교수가 아닌 사가와(학교 시스템 관리자)에게 보내고 만 것. 인생을 바꾸는 우연 같은 일이 가끔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나오는 이혼당하고, 세가와 교수는 자취를 감췄다. 그때 메일을 잘못 보내지 않았다면, 아니, 사사키의 사주를 듣지 않았다면, 지금의 공간과 시간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모든 것은 우연일까? 5년 후 우연히 재회한 사사키에게 건네는 제안, 느닷없는 키스는 우연일까? 그렇다면 이 우연은 이들을 또 어떤 시간과 공간으로 이끌어갈까?

1,2편이 그래도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뤘다면 3편 ‘다시 한 번’은 <우연과 상상>에서 류스케의 영화적 상상력이 가장 활짝 열리는 에피소드다. 인터넷으로 감염되는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네트워크가 중지돼 우편과 전신의 시대로 복귀한다는 설정도 2편의 메일 사건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20년 만에 여고동창회에 참석한 나츠코(우라베 후사코)는 다음날 센다이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우연히’ 고교 시절 첫사랑 미카를 재회한다. 미카는 나츠코를 집으로 데려가 차를 대접한다. 거기서 밝혀진 놀라운 사실은, 둘이 동창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카는 미카가 아니라 아야(카와이 아오바)였고, 둘은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깜짝 놀란 나츠코가 집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우연처럼 등장한 택배기사 때문에 둘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야는 자신이 미카라고 생각하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해달라고 말한다.

“행복하지 않았어. 계속 후회했거든. 내 소중한 감정을 위해 싸우지 않은 걸. 결과가 같더라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어. 하지만 그땐 몰랐어. 더 상처받을까 두려웠을 테니까. 그래서 널 만나러 온 거야.”

생판 몰랐던 타인들의 대화가 한 프레임에서 마치 2인극처럼 펼쳐진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 마치 마법처럼 말이다. 마지막 전화에서 전하지 못했던 속마음. 상처받을까 두려워 20년 전 하지 못했던 말들이 집 안에서, 역으로 가는 길에서, 처음 두 사람이 마주친 에스컬레이터에서 끊이지 않고 두 타인을 연결해준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감은 포옹으로 인해 0으로 수렴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20년 전의 자신과도 화해한다.

사진 출처=네이버 영화

전술한 대로 세 편의 에피소드는 각각 독립돼 있지만, 묘하게 연결된 느낌이다. 풋풋하기만 할 것 같은 20대, 치열함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30대, 어느덧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헛헛한 일상의 40대 모두의 마음 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하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구멍은 그때의 자신의 선택으로 지금까지 마음 속에 상처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의도했던 아니던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선택으로 현재의 우리는 고통받는다. 시간은 그렇게 서서히 우리를 죽인다. 그런데, 어떤 사건들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세상이 주는 선물 같은 우연. 류스케 감독은 그 우연의 순간을 마주한 우리에게 ‘상상하기’를 권한다. 지금까지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구멍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세상이 주는 우연을 우연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적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그럼으로써 우리를 죽이는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앞으로 우리의 인생이 조금은 덜 후회스럽지 않을까,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신일본영화의 탄생을 알린 류스케 감독의 <우연과 상상>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세상의 비밀 아닐까.


윤상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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