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허무함, 그럼 무소유가 답이냐? 다시 보니 블랙 코미디보다 호러물에 가까운 <파이트 클럽>

샤걀의 색감과 영화의 파편화된 느낌이 모두 들어간 팬픽

<파이트 클럽> (1999)의 장르는 무엇일까?

주요한 남녀 캐릭터가 고환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임에서 만나며, 서로가 이 모임에 더 자격이 있다고 티격태격하다가 여자의 입에서 ‘없는 사람들의 모임’ 이니 자신이 더 적격이라 우긴다. 이건 블랙 코미디의 요소를 잃을 수 없게끔하며 시작한다.

반면에 멀어지려 했던 두 남녀가 우여곡절 끝에 결국에 만나서 함께 하게 된다는 엔딩을 떠올리자면, 일종의 로맨틱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즉, 나레이터 (에드워드 노튼 분)가 처음에는 말라 (헬레나 본햄 카터 분)를 멀리 하기 위해 타일러 (브래드 피트 분)를 이용하지만, 다시 타일러를 멀리 하기 위해서 말라에게 접근한다. 이 만남을 엔딩에 배치하는 낭만이라니, 이것은 로맨스가 되지 않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자기 계발은 매우 소중하다. 그러나 타일러에게 그런 것은 자위행위 쯤에 속한다. 그에게 자기 계발은 자기 파괴 행위보다 질이 낮으며, 가식적인 것으로 인지 된다. 그러면 자기 파괴가 진정한 득도일까? 영화에서 타일러의 이런 주장은 전파될 듯 하다가도 설명하는 타이밍을 놓치거나 방해받아서 전달하는데 실패한다. 파이트 클럽에서의 음성적 싸움은 겉멋들고 끝내주는 싸움이 아닌, 직설적이며 파괴적인 본능 분출에 가깝다. 이런 요소들 또한 타일러의 설득을 막는 요소다. 영화는 폭력을 아름답게 윤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기파괴가 정답인냥 던지지도 않는다. 양면을 모두 꼬집는 태도를 보면 관객이 떠올리는 반응은 뭐 어쩌라고? 에 가깝다. 영화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환상인 자기 계발과 자기 파괴를 조롱하며 그 사이 쯤 어딘가에 있는 타일러 더든이라는 초상을 비춘다.

이쯤되면 <파이트 클럽>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을 하는 것 같다는 인상도 생긴다. 이것을 굳이 장르화하자면 도시괴담 풍자활극 정도가 아닐까싶은데.

장골능은 진한데 반해 하복근이 약한 것은 복직근 운동에서 고립이 덜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좋은 트레이너를 만났어야 했는데!

소유와 광고

자본주의의 첨병에는 광고가 있다. 나레이터의 나레이션처럼,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비를 종용한다.타일러와 나레이터가 처음 만나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소비자’라고 대답하기도 한다. 기가막힌 현답이지 않은가.

영화의 연출자인 데이빗 핀처는 <에어리언3>(1992)로 데뷔하여 <세븐> (1995)이라는 걸작을 만들고 봉준호 감독이 좋아하는 <조디악>(2007)을 거쳐 대화씬의 신기원을 보여준 <소셜 네트워크> (2010)와 커리어 하이를 찍은 <나를 찾아줘> (2014)를 만들어낸 영화감독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80년대에 이미 광고감독으로 엄청난 실력을 뽐내던 경력이 있다. 광고제작사를 설립하여 나이키, 코카콜라 같은 초대형 광고를 시작으로 버드와이저, 리바이스, 샤넬등의 브랜드에서 엄청난 퀄리의 결과물을 냈다. 뿐만 아니라 롤링스톤즈, 마돈나, 조지 마이클등 대형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도 만들어서 MTV계의 탕아로 불리기도 했다. 85년의 암협회 공익광고에서 손가락을 빨던 뱃속의 태아가 담배를 피는 장면으로 수 많은 끽연가들을 등돌리게 만든 일화는 유명하다.

90년 mtv어워드 후보 4개중 3개가 그의 작품이었다.

<파이트 클럽>의 나레이터의 삶은 불타버린 그의 집에서 튕겨져 나온 물건들을 보며 내뱉은 탄식에서 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냉장고에 튀어나온 것들인데, 음식은 없고 죄다 양념이다. 그의 실속없는 냉장고 같은 삶은 다양한 브랜드들을 소비하며 스스로의 물리적 곳간을 채워왔지만 얻은 것은 불면증과 공허 뿐이다.

그의 불면증은 극중 의사에 의하면 경증이다. 그래서 불면증 해결을 위해서라도 그는 소유에 집착한다. 불필요한 가구를 들이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을 수집하듯 구매한다. 즉, 현대의 소비자들처럼 무언가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거대 자본이 필요하다고 일러주기 떄문에 소비한다. 그러면서 소비된 주역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하고 그저 구입하는 행위자체에 만족한다. 이것은 끝을 모르는 행위로, 욕구라는 갈증만 커진다.

그에게 극도의 무상감을 안겨준 시스템은 광고였다. 그 최첨단을 달리던 사람이 영화의 연출이라는 사실 또한 이 작품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풀소유가 주는 무상

보금자리가 없어진 나레이터지만 그렇게 불타버린 흔적을 보며 느낀 것은 묘한 차분함과 해방감이었다. 인류가 수렵을 끝내고 농경을 시작하며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탐구가 아니라 순응이었다. 반대로 적응의 테두리에 있던 나레이터가 타일러를 만나며 추구하는 것은 자극이 되었다. 인류는 정착하며 안정을 찾아가지만, 역설적으로 지루함과 싸우기 위해 지난한 세월을 보낸다. 반대로 나레이터는 촉발을 찾아간다. 폭력을 통한 배설감을 느낀 그는 본능에 기대 살아간다. 타일러는 곧 원초적 감각을 상징하는 어떤 욕구가 된다. 그것은 언뜻 보기엔 악의 구름이 모여 폭풍우를 이룬것 같지만 <파이트 클럽>의 첫 쇼트, 즉 총에 겨눠진 나레이터를 생각해보자.

시냅스 신경에서 뻗어져 나오는 쇼트의 시작부는 혈관과 모공을 지나 총신으로 빠지는 굉장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이것은 나레이터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존재인 타일러는 주인공의 내부에서 비롯됐다는 뜻이다. 오프닝과 수미상관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은, 이윽고 아주 아름다운 자태로 무너지는 신뢰와 허상을 보는 것 같다. 우리의 무의식에 깔린 원천적 본능의 요소들이 허상의 탈을 쓰고 스멀스멀 기어나온다면 이렇게 곱고 갸륵하게 자빠질 것이라는 강력한 영상언어인 것이다.

진짜 자유를 원해? 그럼 다 잃어봐.

현재의 초상

거대한 농짓거리 같더라도, 미디어에 종속되지 말고 ‘꽤 어려운’ 작업에 속하는 스스로를 깨닫는 일에 집중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러면 이 영화의 엔딩처럼 거스를 수 없는 사람과 함께 기꺼이 붕괴되는 쾌락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영화가 개봉한지 24년이나 됐다. 당시에 카탈로그를 받아 전화로 통신판매를 하던 시절에서 지금은 엄지손가락이 휘두르는 몇 번의 탭만으로 너무나 손쉬운 소비가 가능해졌다. 냉소한 소비자들은 더욱 비대해졌고 주문했는지 조차 까먹고 뜯지도 않은 택배에 깔려 압사하기 직전의 쇼퍼들이 넘쳐난다. 개봉 당시에 흥행 실패의 이유 중 하나로 꼽혔던 반금융적인 정서는 이제와 돌이켜 보면 꽤 납득된다. 풍요는 선순환을 넘어서 천민 자본주의가 됐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장르가 명확해지네, 이건 블랙 코미디가 아니라 호러였어.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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