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 서영이> 속 故 김민경 배우의 초록빛 유작, 삶을 애도하는 모두의 시간

<초록밤>

어느 날 갑자기 집주인이 집을 팔 거라 예고하고 이사 갈 것을 통보한다. 가족은 예상치 못하게 이사 갈 위기에 처한다. 얼마 안 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족의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을 치른 가족은 할아버지의 집을 처분하러 함께 차를 타고 간다. 그곳엔 어떤 할머니가 살고 있다. 윤서진 감독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집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또 누군가를 쫓아내러” 간다. 7월 28일 개봉을 앞둔 영화 <초록밤>의 이야기다.

제26회 부산 국제영화제 한국 경쟁부문으로 초청받은 <초록밤>은 좋은 평가를 받아 CGV 아트하우스상까지 거머쥐었다. CJ CGV 콘텐츠 기획 담당자 조진호는 “흔히 생명력을 상징하는 초록의 이미지를 가족의 죽음으로 인한 어둡고 공허한 감정을 표현하는 장치로 활용해 눈길을 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초록밤>은 초록빛의 미장센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초록빛 화면으로 가족 개개인을 둘러싼 울창한 외로움에 대해 표현하고 있다.

<초록밤>, @리버스

언론배급 시사회에서 윤서진 감독은 초록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다”라고 밝혔다. 원래는 그저 “이미지가 화사하게 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고. 윤서진 감독이 “우리 영화는 우울한 영화이니 오히려 낮이나 이런 장면들을 굉장히 화사하게 한 번 찍어보면 어떠냐”고 촬영 감독에게 묻자 그는 오히려 “밤도 초록색으로 물들여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했다고 한다. 그렇게 탄생한 초록빛의 연출은 효과적이었다. 보편적인 독립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색감을 영화 속에 담아 이 자체로 작품의 개성이 되었기 때문. 탁월한 팀플레이라고 볼 수 있다.

<초록밤> 속 세상은 저녁도 푸르고 낮도 푸르다. 이것도 계획한 연출은 아니지만 말이다. 곧 철거를 앞둔 상황이라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철산 주공 아파트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 윤서진 감독은 나무들을 보며 “우리 이거 영화에 다 담아내자. 초록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촬영 감독은 초록의 조명으로 인식하였고 결국 촬영 디자인을 초록빛으로 뒤덮었다고. 어찌 보면 오해에서 비롯된 실수지만 이 오해가 <초록밤>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모두 이사를 가고 사라진 아파트, 자연만이 잔류한 아파트 그 자체가 이 영화를 의미하는 듯하다.

<초록밤>, @리버스

물과 햇빛, 양분이 없는 집. 보살핌을 받지 못한 식물은 아주 조용히 메말라간다. 식물의 죽음은 경고 메시지나 카운트다운도 없이 이뤄진다. 윤서진 감독의 <초록밤>은 방치된 식물의 움직임을 가진 세 인물을 조명한다. 오랫동안 앓아온 가난이 그들의 삶에 자연스레 뿌리를 내린 상황. 그렇기에 서로를 잡아먹을 듯 싸우진 않아도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산다.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밥을 먹지만 서로를 방관한다. 적나라한 현대 가족의 초상이지 않은가.

극중 ‘아버지'(이태훈)는 아파트 경비원이고 ‘어머니'(김민경)는 매일 가족들을 챙기느라 지쳐있다. ‘아들'(강길우)은 장애인 활동 지원사로 일하며 살아간다. 이 셋은 주인공인데도 말이 없다.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대체로 ‘아버지’와 ‘아들’은 입 다물고 있고 ‘어머니’만 신세한탄을 하는 식이다. 나이들 수록 몸은 힘들고 돈은 많이 들고 할 일은 태산 같고. 아침이 되어 ‘아버지’가 돌아와도 아무도 다정하게 말을 걸지 않는다. ‘어머니’는 평생토록 했는데 앞으로도 해야 할 집안일에 질린 상태다. ‘아들’도 만만치 않다. ‘여자친구'(김국희)가 있지만 돈이 없어 결혼을 미루고 있다. 그들의 삶엔 진전이 없고 생길 것 같지도 않다. 곪을 대로 곪아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한 상태다.

<초록밤>은 소멸한 대화와 생기 없는 얼굴들로 가득한 영화다. 의도된 여백이라 할까. 빈자리를 차지하는 건 초록빛과 풍부한 사운드다. 윤서진 감독은 인물들의 대사가 없기 때문에 소리에 더 집중했다고 말했다. 촬영이 끝난 후 소리의 90% 이상을 추가했다고. 그뿐만 아니라 아오야마 신지, 하마구치 류스케와 작업했던 나가시마 히로유키가 음악감독을 맡았다. 감독의 말처럼 “누구 하나 튀지 않는 밴드 연주 음악”으로 느껴지도록 신경 쓴 흔적이 보인다.

<초록밤>, @리버스

<초록밤> 속엔 세 번의 죽음이 있다. ‘아버지’가 목격하는 고양이의 죽음, ‘할아버지’의 죽음, 마지막 죽음. 이 세 번의 죽음은 비극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끌고 가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저 죽지 못해 살아있는, 좀비 같은 가족의 마음속에 균열이 가도록 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다 보면 초록빛이 그들의 균열 속으로 스며든 듯해 보인다. 그 빛이 의미하는 게 죽음인지, 아니면 생명인지 모르겠지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그들은 무심한 얼굴 속에 불안을 숨기고 있다. 차마 무시할 수 없는 불안이 러닝타임 내내 지속된다. 이게 <초록밤>이 가진 힘이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윤서진 감독은 “언젠가부터 내가 인물의 모든 감정을 알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영화를 만들면서 특정한 감정을 고집하지”는 않았다고. 배우들에게도 상황은 쥐어주되 감정은 강요하지 않아 더욱 자연스러운 연기를 자아냈다. 우울한 상황들이 연속되지만 인물들 간의 침묵이 이어지는 것도 앞의 이유와 같다. “‘이제 저 가족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도록 공간이 충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이 <초록밤>의 모든 정적을 대변한다. 영화의 마지막을 관객이 완성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 멋대로 흘러가는 영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초록밤>은 그렇지 않다. 관객과 보폭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귀중한 이유는 고 김민경 배우의 유작이기 때문이다. 고 김민경 배우는 <타짜>와 <동백꽃 필 무렴>, <내딸 서영이> 등에 출연했으며 40년간 연극과 영화를 오가며 다양한 활동을 한 중견 배우다. 이번 <초록밤>에서도 어머니 역할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다. 윤서진 감독은 고 김민경 배우의 죽음에 대해 “현장에서 기다리는 시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처럼 저희 모두를 챙겨주셔서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나고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며 고인의 따뜻함을 떠올린 뒤 애도를 표했다. <초록밤> 속에 고 김민경 배우의 마지막 모습이 담겨있다. 7월 28일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씨네플레이 김다이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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