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영화 <오펀: 천사의 비밀>, <오펀: 천사의 탄생>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나 휴먼 드라마의 주인공보다 호러물의 메인 캐릭터가 컬트적 인기를 끄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대개 전자가 잘 짜여진 내러티브 위에 등장인물들을 얹는 식이라면 후자는 스토리보다 캐릭터의 콘셉트 조각에 공을 들인다. 이를테면 <어바웃 타임>의 남자 주인공 이름이 팀(도널 글리슨)이라는 걸 떠올리지 못하더라도 <주온>에 나오는 하얀 얼굴의 꼬마가 토시오(오제키 유우야)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더 잘 안다는 것이다.
또 그래서 공포 영화의 줄거리는 평면적이고 인과 관계가 헐겁게 보일 때가 많다. 특히 ‘양산형’이라 불리는 작품들은 두세 편만 보면 대강의 공식을 읊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콘셉트가 잘 잡힌 캐릭터의 힘은 강하다. 시각 단계에서 이미 관람자의 만족을 이끌어 낸 후 시작한다.
2009년작 <오펀: 천사의 비밀>(천사의 비밀)이 2022년 <오펀: 천사의 탄생>(천사의 탄생)의 등장과 함께 <오펀> 시리즈로 거듭난 것도 주인공인 에스더(이사벨 펄먼)의 압도적 존재감 덕임을 부정할 수 없다. ‘천사의 집’이라는 고아원에 사는 이 9살 짜리 소녀는 ‘에스더’라고 불리지만 그 이름이 진짜일지 의심을 품게 하는 인물이다. 고아원의 다른 아이들보다 차분하고, 어른과도 말이 통할 만큼 영리하지만 가끔 또래들처럼 천사 같은 미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목과 손에는 늘 검은 공단 리본을 두르고, <샤이닝>의 쌍둥이가 입을 법한 원피스를 고집한다.
늘 얌전한 에스더도 화를 내거나 어떤 요청에 거부 의사를 표하는 등 부정적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 목과 손목에 맨 리본을 벗기려고 할 때, 씻을 때 욕실에 들어오려고 할 때, 늘 지니고 다니는 성경책을 건드리려 할 때, 그리고 치과 진료를 받자고 할 때다. 그의 양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은 이 같은 상황에서 과하게 분노하는 에스더를 보며 당황하지만, 훈육을 하거나 기행의 원인을 추적하려 하지 않는다. 에스더를 이루고 있는 대외적 요소들이 면죄의 대상인 탓도 있지만, 양부모와 고아원 수녀들은 그의 내면을 쫓는 일을 정신과 의사에게 외주 맡기는 데 그친다.
사회적으로 가장 연약한 존재라는 것에 이견이 없을 이 아홉 살 고아 소녀는, 역설적이게도 극 중에서 거의 전지전능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가장 부서지기 쉽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이는 에스더와 본질적 교감을 나누는 인물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에스더가 그런 환경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과 반대로, 그의 주변에서 에스더를 이해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영화에는 에스더의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는 자만만이 팽배하다. <오펀> 시리즈의 서스펜스는 이 괴리에서 비롯된다.
<천사의 비밀> 속 에스더를 보자. 셋째 아이가 뱃속에서 죽으며 악몽에 시달리던 케이트(베라 파미가)는 남편 존(피터 사스가드)와 상의 끝에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심하고 고아원 ‘천사의 집’을 찾는다. 그 결심은 쇼핑에 가까운 것이었다. 유산 후 알콜 중독으로 가정을 파탄낼 위기에 처했던 케이트는 와인숍에서 와인을 고르는 대신 고아원에서 에스더를 택했다. <천사의 탄생>에서도 마찬가지다. 정신병원을 탈출한 리나(이사벨 펄먼)는 미국 실종 소녀들 중 자신과 비슷한 얼굴을 한 에스더를 사칭하기로 하고, 진짜 에스더의 부모인 앨런(로지프 서덜랜드)과 트리샤(줄리아 스타일스)의 가족이 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진짜 에스더는 이미 친오빠의 손에 죽은 상태고, 트리샤가 이를 은폐할 목적으로 가짜 에스더인 리나를 받아 들인 상황이었다. 케이트와 트리샤 모두 에스더를 도구화했으며, 에스더와 가장 갈등을 빚는 인물들이다. 에스더가 반사회적 인격장애 환자라는 설정이 영화를 피칠갑으로 만드는 데 타당성을 부여한다면, 에스더를 대하는 양부모들의 태도는 <오펀> 시리즈를 명백한 복수극으로 만든다.
에스더라는 캐릭터에게 주어진 가장 돋보이는 반전은 그가 사실 아홉 살 소녀가 아닌 30대 성인이었다는 사실이다. 뇌하수체 기능 부전증으로 발육이 멈춘 그는, 오랜 시간 아이의 모습을 한 채 새로운 가족들을 옮겨 다니며 귀중품을 훔치는 식으로 삶을 영위했다. 그런 그가 처음 에스토니아의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건 머물렀던 가정의 모든 구성원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병원을 탈출해서 만난 트리샤의 가족도, 그 이후 입양된 케이트의 가족도 에스더에게 몰살될 위기에 처한 이유는 동일하다. 양아버지에 대한 육체적 욕망을 표출하고 이를 거절당했을 때 에스더는 가장 큰 분노에 휩싸였다.
성장하지 않은 것은 몸 뿐이지만, 그래서 에스더에게는 가능성이 희박한 영역이 있다. 화목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가 되거나, 원하는 대상과 성애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천사의 비밀>과 <천사의 탄생> 속 에스더는 양아버지인 존과 앨런을 성적으로 갈구하는데, 이를 가장 먼저 눈치채는 건 에스더의 도전을 받는 양어머니 케이트와 트리샤다. 에스더는 양아버지를 손에 넣기 위해 자신이 양어머니에게 학대 당하는 듯한 상황을 꾸미고, 아내에 대한 실망으로 낙담한 양아버지를 유혹한다. 그리고 에스더의 황당한 고백을 받은 양아버지들이 거절 의사를 표하면 가족을 전부 죽이려 하는 식이다. 이 기괴해 보이면서도 일관된 욕망의 발현은 에스더의 캐릭터성을 강화한다.
에스더라는 캐릭터 구축에 공을 들인 탓인지 <오펀> 시리즈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며, 먼저 나온 <천사의 비밀>과 프리퀄인 <천사의 탄생>의 내용이 거의 동일하다. 자유가 억압된 공간, 고아원 혹은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에스더가 감정적 결핍을 공유하는 가족의 일원이 된다. 공통적으로 양오빠들은 처음부터 에스더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며, 종종 튀어 나오는 에스더의 이상한 행동에 위화감을 먼저 느끼는 건 양어머니다. 에스더는 우연히 양부모의 성관계 장면을 목격한 후 양아버지에게 성적 욕망을 품으며, 점점 심해지는 위화감에 스트레스를 받던 양어머니는 정신과 의사에게 가족 상담을 받는다. 상담을 받아도 해결되는 것은 없는 와중에 에스더의 과거를 추적하는 인물, 고아원 수녀(캐롤 크리스틴 힐러리아 파운더)와 형사(카나가와 히로)는 살해당한다. 양부모를 이간질하고 양아버지를 유혹하다 거절당한 에스더가 가족 몰살극을 벌이며 이야기가 끝난다.
<오펀> 시리즈에서 이야기의 단순함보다 완성도를 저해하는 건 에스더의 전지전능함을 이해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언급했듯 그는 가장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도 깊이 다가서지 못하고, 거기서 예측 불가능성이 생긴다. 하지만 예측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에스더에게 초능력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에스더는 아무렇지도 않게 성인 남녀를 물리력으로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하며, 최면을 거는 수준의 세뇌 기술을 펼친다. 그의 막강함에 몸만 큰 어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따름이다. 에스더는 호러 캐릭터의 또 다른 전형을 완성했지만, <오펀> 시리즈는 그 캐릭터의 존재감에 기댈 뿐이라는 인상이 드는 이유다.
칼럼니스트 라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