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주의: 영화 <헌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전두환이 사망한 이듬해 여름, 전두환을 ‘사냥’하는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이정재 감독의 영화 <헌트>다. 솔직히 전두환이 죗값을 치루고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전두환을 너무 일찍, 혹은 너무 늦게 떠나보낸 아쉬움을 달래고자 스크린 앞에 앉아, 그가 먼지범벅이 된 채 총구 앞에서 엉망이 되는 장면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웬걸. 전두환은 ‘안 나오지는 않는’ 정도로 짧게 얼굴을 비추더니 곧바로 퇴장한다. 그것도 멀쩡히 살아서. 이거 뭐야, 당황한 가운데로 더 어이없는 대사가 울려 퍼진다.
“박평호!”
전두환을 그토록 죽이고자 했던 김정도(정우성)의 목소리다. 아니, 전두환이 도망쳤는데 왜 엉뚱한 박평호(이정재)의 이름을 부르짖나. 이유는 바로 박평호가 전두환 사냥, 아니 ‘베드로 사냥’을 방해한 일등공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박평호도 불과 30분 전까지 베드로를 암살하려고 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왜 변심했을까. 왜 사냥을 포기하고 심지어는 방해했을까. 그 이유는 평호, 아니 평화에 있다.
표면적 평화냐, 독재자 사살이냐
베드로 사살 즉시 북한은 전쟁을 일으킨다. 적화통일과 민간인 학살. 그것이 박평호가 방콕 암살 작전 개시 직전에 알아차린 ‘베드로 사냥’의 결과였다. 민간인들의 죽음을 원치 않던 박평호는 사냥을 포기하고 남북 간의 표면적인 평화라도 유지하는 게 낫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이는 그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베드로 사냥’만 바라보고 달려온 김정도로부터 베드로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사냥을 포기한 박평호가 손을 내저으며 달려나가 외친 말은 바로 “애국가 중지!”. VIP 차량이 저격 범위 내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박평호의 외침은 두 가지로 읽힐 수 있다. “이 차에 탄 놈은 애국가를 들을 자격이 없다”와 “(그럼에도)이 차에 탄 놈이 죽어서는 안 된다”로. 전자가 오늘날의 관객이 떠올릴 법한 일종의 감상적 판정이라면 후자는 극중 박평호가 내린 현실적 판단인데, 둘은 묘하게 연결된다. 결국 베드로는 도망치고, 숙원 사업에 실패한 김정도는 죽어가면서 “박평호!”를 불러 추궁한다. “살고 싶었냐”며.
대의를 위해 ‘정도’와 ‘평화’ 깬 두 남자
“살고 싶었냐”는 김정도의 질문에 “살리고 싶었다”라고 변명하는 대신 박평호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대신 우리는 김정도가 ‘베드로 사냥’을 결심한 계기가 바로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 현장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을 떠올릴 수 있겠다. 살아야 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당시의 현장은 군인으로 투입된 김정도가 군부 내 소신파로 활동하는 이유가 되었고, 나아가 ‘베드로 사냥’이라는 명목 하에 그가 벌이는 모든 일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되기도 했다. 여기서 모든 일이란, 그가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 차장으로서 지시하고 수행한 갖은 종류의 폭력과 살인을 의미한다. 작품의 원제이기도 한 ‘남산’에서, 김정도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다.
정도를 넘어선 것은 박평호도 마찬가지다. 그 또한 한 명의 안기부 차장으로서 수없는 사람들을 남산으로 잡아들였고 그중 다수는 다시 빛을 보지 못했다. 전부 ‘평화’를 위해 한 일이라기에 12년은 너무 긴 시간이었고 목숨의 무게는 무겁다. 그의 인생 전반이, 그가 막판에 지키고자 한 ‘평화’와 대치됨은 분명하다. 결국 정도가 ‘정도’를 거스르고 평호가 ‘평화’를 부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 대의, ‘베드로 사냥’은 수단적 측면에서나 목적적 측면에서나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짓밟힌 수많은 ‘소(小)’들은. 그 ‘소’들의 총합은, 결코 대의만 못하지 않다고 영화는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대의에 희생되는 다수의 ‘소(小)’들
박평호의 보좌관 방주경(전혜진)과 김정도의 보좌관 장철성(허성태). 둘은 대의에 희생되는 ‘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이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안기부 요원이라는 점에서 무고한 희생자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 종래에는 가차 없이 버려진 도구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다. 방주경과 장철성에게 내려진 퇴장 선언은 그들이 충성을 바친 상사의 결정이라는 점에서, 그러나 이야기는 애도의 시간도 주지 않고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헌트>의 사건이 진행되는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어떤 사고나 불행이 일어나도 감상에 젖을 시간은 극중 인물에게도, 관객에게도 없다. 정신 차리면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 있는 와중에 여러번 마주치는 장면이 있으니. 바로 요원들의 사망 사실을 알게된 가족의 반응이다. 극 초반 일본에서 임무를 수행하다가 의식불명이 된 양보성 과장(정만식)이 사망했을 때. 일본 정보원 조원식(이성민)이 총에 맞아 사망했을 때. 그리고 ‘베드로 사냥’에 실패한 김정도가 사망했을 때. 영화는 그들의 죽음에 얽혀 있는 삶들을 보여줌으로써 ‘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따라서 드러난 것보다 그 실체가 훨씬 클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스토리 반전과 윤리적 반전 있어
<헌트>에는 두 개의 반전이 있다. 첫 번째는 스토리 상의 반전이다.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를 ‘동림’이라는 간첩이라 의심하며 술래잡기를 벌이다가 멈춘다. 둘 다 같은 적을 노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서로를 향해 겨누던 두 개의 총구는 제 3의 표적을 향해 돌아가고, 그것이 방콕에서 벌어진(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한) ‘베드로 사냥’이다. 말했다시피 이 사냥은 수단적·목적적 측면에서 전부 실패하는데, 놀랍게도 영화는 그 완전한 실패를 말미암아 또 한 번의 반전을 일으킨다.
두 번째 반전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일어나는 윤리적 반전이다. 모든 의심과 작전, 싸움을 겪고 끝의 끝까지 온 박평호. 그가 내린 결론은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김정도와 서로 ‘동림’으로 몰아간 것과 ‘베드로 사냥’이라는 대의에 몸 바친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또 그 자신도 끝내 사냥꾼/사냥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자 다른 가능성에 대한 염원이었다. 사냥감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냥 자체를 끝내는 것이 이제는 필요하다고,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야기한다.
이제 알겠다. 왜 전두환의 얼굴을, 전두환이라는 폭력과 악의 상징을 그토록 꽁꽁 싸매고 보여주지 않았는지. 왜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거기에 침을 뱉으라고 부채질하지 않았는지. 이는 전두환이라는 공인된 죄인의 얼굴을 핑계로 분노의 벽난로에 땔감을 넣어주지 않기 위해. 폭력과 사냥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꿈꾸기 위해. 그렇게 해보자고 제안하기 위해. <헌트>가 택한 길이었다.
*베드로는 전두환의 세례명이다.
씨네플레이 유해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