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 성수기 극장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르가 있다. 시원하고 짜릿한 액션, 공포, 재난이다. 특히 몇 년 사이 세 장르를 적절히 버무렸거나 독특한 소재를 활용한 재난 영화가 인기를 끌면서 영화계에서도 이에 꾸준히 응답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재난 장르를 취하는 영화에선 배우들의 연기가 몰입도를 크게 좌우하는데, 그 못지않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공간도 중요할 터. 배경 공간이 돋보이는 국내 재난 영화 가운데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흥행작 5편을 선정했다.
2019년 여름을 책임진 영화 <엑시트>. 도심에 피어오른 의문의 유해가스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인물들의 고군분투를 다룬 신개념 재난영화다. 지하로 숨어들거나 끝없이 도망치는 일반적인 재난물과 달리 빽빽하게 둘러싼 도심 속 건물들을 수직으로 오르고, 그 위에서 건물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시도를 더했다. 생존 스킬로 급부상한 클라이밍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게 만든 작품으로, 조정석과 윤아가 유쾌하면서도 짠한 생존 콤비를 이루어 활약한다. 윤아의 재발견이라 할 수 있으며, 용남을 연기한 조정석 특유의 찌질한 연기가 영화 전반에 포진되어 웃음을 유발한다. ‘따따따, 따따, 따, 따따따’, ‘사람~ 살려~ 주세요~’ 등 명대사 명장면을 함께 빚어낸 조연들의 매력도 다채롭다. <엑시트>는 취업난과 각종 난관에 부딪힌 2030 ‘헬조선’ 세대들의 현실을 가스에 은유적으로 빗대었다는 감독의 의도까지, 재미와 메시지를 고루 갖춘 재난물로 942만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며 흥행에 성공했다. 킬링타임에 제격인 103분의 콤팩트한 러닝타임 역시 장점이라 할 만하다.
한국 영화계에 고퀄리티 좀비의 등장도 신선한 판에, 달리는 KTX까지? <부산행>은 여러 방면에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으며 관객들의 기대를 증폭시켰다. 지금에야 <킹덤>, <창궐>과 같은 ‘K-좀비’ 콘텐츠가 많이 제작되어 있지만 그 시작은 <부산행>이었다. 한국 최초의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은 <돼지의 왕>, <창> 등 신랄한 사회 비판으로 ‘어른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온 연상호 감독의 첫 실사영화다. 극의 중심은 딸 수안을 좀비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석우의 이야기지만, 임신한 성경(정유미)과 남편 상화(마동석) 부부, 고등학생 야구부 영국(최우식), 그를 짝사랑하는 진희(안소희), 이기심의 끝판왕 용석(김의성)까지 제각기의 사연과 성격을 지닌 주연들의 활약이 더욱 눈에 띈다. 공포스러운 스피드로 달려오는 좀비와 뛰어내릴 수도 없이 빠르게 질주하는 KTX의 길고 좁은 객실 내부가 짜릿한 스릴감을 자아낸다. <부산행>은 개봉 7일 만에 620만 관객을 돌파, 19일 차에 2016년 첫 천만 영화로 등극했다.
폭발이 예견되어 있거나(<더 테러 라이브>, <백두산>), 무너져 내렸거나(<터널>), 갇힌 채 목숨을 위협받는(<PMC: 더 벙커>) 곳엔 하정우가 있다는 게 학계의 정설(?). 목숨이 달려있는 재난 상황의 긴박감을 표현하는 데 특화된 하정우는 <끝까지 간다>로 쫀쫀한 긴장감을 선사한 김성훈 감독과 손을 잡아 1인 재난극에 도전하게 된다. 영화 <터널>은 블록버스터급의 스케일이나 눈을 사로잡는 액션은 없지만, 언제 다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점차 불투명해져가는 구조 상황이 맞물리며 차분한 속도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부산행> 개봉에 이어 2016년 마지막 타자로 여름 극장가에 찾아온 <터널>은 <부산행>의 열기를 이어받아 개봉 후 27일간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712만 관객을 동원했다.
흥행작에서 신파가 빠질쏘냐. 특히 가족‧연인 간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수밖에 없는 재난영화에서 신파는 어쩌면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일지도 모른다.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만, 그래도 신파라는 MSG 한 수저가 들어간 영화들이 좋은 성적을 낸 것은 사실이다. 관객들의 눈물 버튼을 자극하는 데 특화된 감독, 윤제균의 <해운대>도 두 요소가 버무려져 시너지를 낸 케이스다. 이제 막 연인이 된 남녀와, 이혼한 전 부부, 서로 마음이 끌리고 있는 청춘들이 지옥도로 변해버린 해운대에서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친다. 2009년 개봉 당시 개봉 34일 차에 천만 관객을 돌파, 총 1132만 관객을 동원하며 여름 극장가 관객을 쓸어 담았다.
한국 재난영화의 계보에서 연출, 작품성, 배우들의 호연, 사회적 메시지 등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최고의 작품을 뽑으라면 90% 이상이 <괴물>을 뽑지 않을까. 이는 괴수 장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에게 처음으로 천만 관객 타이틀을 안겨주며 대중성을 획득하게 한 <괴물>은 괴수영화, 크리처물이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지닌다. 14년 전 작품이지만 지금 개봉해도 모자람이 없는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당대 사회 풍경이 지금 현실에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재평가를 거듭할수록 명작으로 언급되며, 봉준호 팬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베스트 작품 중 하나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같이 곳곳에 서려있는 코믹한 풍자들과 팽팽한 긴장감 사이를 탁월하게 오고 가는 것이 매력인 영화로, 개봉 당시 한국 영화 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흥행을 기록했다. 올여름 <기생충> 아카데미 수상을 기념하며 한강 잔디밭에 누워 <괴물>을 보심이 어떠하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