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사람은 돈을 덜 내고 싶어 하고, 파는 사람은 돈을 더 받고 싶어한다. 양측의 입장 차이가 언제나 첨예한 탓에 덜 내는 것도 더 받는 것도 ‘능력’이다. 그리고, 자본의 교환이 시작된 이래 이 명제들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발품 팔기와 대면 흥정의 시대엔 깎으려는 쪽도 깎아주지 않으려는 쪽도 모두 고통받았다. 쿠폰의 등장은 이전보다 할인 과정을 단순하고 투명하게 바꾼 것처럼 보이는 ‘할인 정찰제’였다. 소비자는 매번 판매자와 실랑이를 하지 않아도 되고, 남들보다 덜 할인을 받은 것 같은 느낌도 없다. 이 혁신적 발명품, 쿠폰에 적힌 할인 금액이 이미 소비자 가격에 반영돼 있다는 사실이 보편적으로 알려진 건 꽤 나중의 일이다.
그럼에도 쿠폰의 시대가 저물지 않는 까닭은 매우 분명하다. 시장경제 시스템 안에서 쿠폰을 사용하는 소비자는 할인을 받을 때마다 작은 효능감을 얻는다. 이는 판매자를 상대로 단돈 100원이라도 이득을 봤고, 현명한 소비에 성공했다는 착각에서 나온다. 허나 자신이 고작 쿠폰 한 장을 써서 소비의 전 과정을 통제했다는 건 오만이다. 명백한 실체적 진실은 소비를 자제했을 때 지갑에서 돈이 적게 빠져나간다는 것 뿐이다. 그다지 필요 없는 1000원 짜리 물건의 50% 쿠폰은 500원의 이익이 아닌 500원의 소비를 부른다는 소리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쿠폰을 사용해 사려는 물건에 ‘어차피 나중에 쓸 것’, ‘언젠간 반드시 필요한 것’, ‘있으면 좋은 것’ 등의 이미지를 덧입히고 기꺼이 자기최면을 건다. 더 나아가면 필요에 의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쿠폰 사용을 위해 소비를 하게 된다.
정리해 보자. 지금은 필요 없지만 어차피 나중에 쓸 것 같은 물건의 쿠폰을 얻었다. 상점에 가서 쿠폰을 내밀고 할인된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쿠폰으로 깎은 금액은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고 작은 성취다. 아무것도 통제되지 않는 인생에 유일한 낙이라고 봐도 좋다. 집에는 힘들게 모은 쿠폰으로 산 물건들이 방 하나를 꽉 채울 만큼 쌓여 든든하고, 남들이 쓰레기통에 버린 치약 포장에 붙은 쿠폰들을 주워다가 통신비 할인을 받는 것이 자랑스럽다. 주변에서 이런 사람을 본 적 있다고? 이건 영화 <쿠폰의 여왕>의 코니(크리스틴 벨)의 얘기다. 또 2012년에 미국에서 벌어진 사상 최대의 쿠폰 사기범들의 얘기이기도 하다.
코니는 올림픽에서 세 번이나 금메달을 딴 경보 선수 출신의 주부다. 매일 신문과 함께 각종 할인 쿠폰들을 받아 분류하고, 마트 직원의 따가운 눈총도 아랑곳 않고 계산대에서 쿠폰 한 뭉치를 내민다. 코니는 이런 일상을 ‘이기는 습관’이라고 부른다.
그가 날 때부터 쿠폰에 집착한 건 아니다. 몇 차례의 난임시술 끝에 임신에 성공했지만 결국 유산을 경험하며 심신은 물론 경제적으로도 타격을 입었다. 궁핍한 생활은 아니지만 어쨌든 돈을 아껴야 하는 환경이다. 여기서 코니가 절약의 해법으로 찾은 것이 쿠폰이었다. 세 개의 금메달을 따고도 마음처럼 풀리지 않는 삶을 살던 코니는 쿠폰을 만난 후 완전히 달라졌다. 식탁에 앉아 쿠폰만 쳐다 보거나, 아기 방으로 꾸며 놓았던 공간을 마트에서 산 물건으로 채우는 코니와 남편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그러던 중 코니는 마트에서 산 시리얼이 상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제조사에 항의 메일을 보낸다. 그가 제조사의 사과 편지와 함께 받은 건 시리얼 한 박스 무료 쿠폰이다. 대단히 현명한 소비자가 된 듯 득의양양한 코니는 제조사에 거짓 컴플레인을 걸어 제품 무료 제공 쿠폰을 수십 장 타 낸다. 그리고 그는 쿠폰들을 공짜로 얻어다가 싼 값에 팔기로 결심한다. 규칙대로 살았다가 별 볼 일 없는 자신이 됐다고 굳게 믿는 코니는 조금 규칙을 어겨 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물건 못 파는 판매자’인 이웃 조조(커비 하월 바티스트)를 꾀어 대기업 발행 쿠폰 인쇄를 하는 멕시코의 공장까지 간 코니. 청렴해 보이지는 않는 직원 한 명의 협조를 받아 공장에서 나오는 여분의 쿠폰들을 빼돌린 그는 온라인 상에서 본격적으로 쿠폰 장사를 시작한다. 결과는? 대박이다. 코니 일당이 붙잡힐 즈음 이들이 수십 개의 기업에 입힌 손해 금액만 4000만 달러가 넘는다. 경제 사범에게 제대로 철퇴를 내리치는 현지 법 상으론 무기징역이 구형되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다.
코니와 조조의 범죄 행각을 눈치 챈 손실 방지 전문가 켄(폴 월터 하우저)가 다방면으로 이를 알리려 했지만 당국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동네 마트에서 쓰는 쿠폰으로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몰락하는 범죄가 벌어지는 중이라고 주장하는 켄을 FBI는 가볍게 무시한다.
한편 코니 일당의 사기 규모가 커지는 동안 영화는 이들에게 각종 사회적 문제들을 당면케 한다. 직원들에게 시급을 2달러만 줘도 되는 멕시코로 공장을 옮긴 기업,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며 총을 맨 채 카페에 나타나 커피를 사는 민병대, 돈 세탁을 하겠다며 이들에게 대량의 총을 파는 코니와 조조, 놀랄 만큼 허술한 공무원 사회와 법 체계까지. 심지어는 흑인인 조조 엄마의 입을 빌려 인종 차별 문제까지 거론하는 식이다. 이 모든 문제적 장면들을 현실 반영 선에서 녹였다면 이야기가 매끄러워 보였을 터다. 그러나 영화는 관객들에게 자신들이 만든 불편한 곳들을 전부 봐 달라고 소리친다. 그래서 영화가 핵심적으로 가한 비판의 날카로움까지 무디게 만들고 만다.
‘쿠폰 중독자’ 코니가 ‘쿠폰의 여왕’이 되는 과정을 통해 꼬집은 건 소비로 자존심을 채우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 중 하나다. 코니는 경보가 비인기종목인 탓에 금메달을 세 개나 따고도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 나은 삶’을 살 자격과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끊임 없는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뇌내에서 만든 환상임은 무시해야 견딜 수 있다. 코니는 쿠폰 한 장과 동전 몇 개 만으로도 약간의 성취감을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에 중독되며, 소비를 통해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됐다는 착각에 빠져 버린다. 코니의 자존심을 쿠폰이 채워 준 셈이다.
돈에는 도덕이 없다. 소비 만으로 간단히 성취를 얻는 것에 익숙해진 삶은 돈 그 자체와 가까워지기 마련이다. 쿠폰 사기로 꽤 많은 돈을 손에 쥐고 난 후에도 코니는 결승선에만 도달하면 어떻게 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끝까지 자신은 더 잘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혼잣말처럼 되뇌이는 코니의 연약한 자존심이 유독 슬펐던 건 그가 앓고 있는 중독이 현대인 모두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라효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