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건: 매버릭>, 우리가 바라던 아날로그 영웅담 : 패기 그 자체인 젊은이가 겸손을 배울 때

* <탑건: 매버릭>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세상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식의 영웅담에 길들여진 지 오래다. 시작은 <아이언맨 3>였을 것이다. 히어로가 변신 전후의 정체성을 고민한다는 설정은 많았지만, 이 영화에선 그 고민이 이야기의 전면으로 드러났다. 이미 <아이언맨 1>에서 자신이 히어로임을 고백해 버린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이언맨 2>와 <어벤져스>를 거치며 혼란을 겪는다. 아이언맨은 토니 스타크인가, 아니면 수트인가?

영화 <아이언맨 3>

토니 스타크가 느끼는 이런 불안과 압박은 관객에게로 온전히 가 닿았다. 히어로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시민으로서의 자신과 자연인으로서의 자신 사이의 갈등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아이언맨 3>은 토니 스타크가 자의식 과잉으로 탄생한 영웅이자 수트 없이 물리적 전투는 할 수 없는 보통 사람임을 폭로한다. 그러면서 아이언맨을 비로소 땅에 발을 붙인 영웅으로 거듭나게 한다.

이후 MCU 솔로 무비들은 판타지라는 본래의 정체성을 축소하고 히어로들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얻는 친근함이나 유머 같은 효과는 매우 분명히 드러났다. 하지만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바뀐 MCU는 다소 무리한 세계관 확장과 함께 히어로 무비의 본질적 통쾌함을 잃어가고 있다. 영웅들이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영웅들을 지배하는 모습이다. 많은 마블 팬들이 떠난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그 대표적인 예다.

영화 <탑건: 매버릭>

판타지도, 현실도 아닌 애매한 행보 탓에 영원할 것 같던 MCU 왕국에 균열이 노출되자 그 반동으로 고전적 영웅에 대한 갈망들이 힘을 얻는다. <탑건> 개봉 후 36년 만에 돌아온 속편 <탑건: 매버릭>은 이 갈망에 완벽히 부합하는 영화다. 이 명제를 증명하는 건 성적이다. 월드와이드 스코어는 이미 올해 1위에, 여러 프랜차이즈의 원톱을 맡은 톰 크루즈의 필모그래피 중에도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 작품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팬데믹 이후 첫 개싸라기 흥행(개봉 첫 주보다 둘째 주에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한 경우)을 보여 주는 중이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프로파간다 무비라는 누명(?)을 쓴 전편과 비슷하게 흐른다. <탑건>에서 매버릭(톰 크루즈)이 냉전 말 미그기를 격추했다는 설정을 부여했듯, <탑건: 매버릭>에선 ‘무허가’ 우라늄 공장 가동을 시도하는 가상의 국가를 적으로 상정한다. 36년 전이나 현재나 여전히 세계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의 모습이지만 그건 영화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CG와 젠Z의 시대에 영화를 꽉 채운 아날로그 액션과 베이비 부머 감성이 먹혔다는 점이다.

영화 <탑건: 매버릭>

<탑건>을 36년 동안 가슴에 품어 온 사람이라면 새로 녹음된 메인 타이틀과 케니 로긴스의 ‘Danger Zone’까지 전편과 동일하게 연출된 <탑건: 매버릭>의 오프닝을 보고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전편에서 매버릭을 태웠던 당시 가장 빠른 바이크 가와사키 닌자가 최신형으로 바뀐 채, 다시 주인과 함께 노스 아일랜드의 활주로를 달릴 때의 전율은 어떤 영화적 성취로 다가온다. 배우들이 초음속을 견디며 찍은 전투 장면은 보는 이들에게 <인터스텔라>의 무중력 안에 있는 듯한 호흡 곤란을 유발한다.

그러나 <탑건: 매버릭>의 미덕은 아날로그 액션의 위대함을 자랑하듯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젊은 매버릭 대위의 패기 그 자체였던 <탑건>은 긴 세월 겸손을 배웠다. ‘악의 축’들에게 뒤를 밟혀 영원한 패왕의 자리를 위협받는 미국, 그리고 죽을 때까지 현역이고 싶지만 멸종(extinction) 선고를 당하는 파일럿 매버릭이 처한 현실을 영화는 숨기지 않는다. 이제 <탑건>의 베이비 부머들은 관리직이 됐고 명예나 부 같은 사회적 가치들을 얻었다. 또 거기에 안주하거나 순응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테다. 하지만 손에 쥔 것들이 많아지면 꿈꾸기 어려워진다. 탑건 시절 라이벌이자 태평양함대 대장이 된 아이스맨(발 킬머)과 제독들이 결국엔 매버릭의 고집을 꺾지 않는 건 아직 그의 얼굴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탑건: 매버릭>은 ‘노병은 죽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전투기와 하늘이 있는 한 노병 따윈 없다’라고 주장하고픈 지도 모르겠다.

영화 <탑건: 매버릭>

짠한 베이비 부머들의 현실 자각 타임을 부수고 젠Z들까지 스크린 앞에 앉힌 건 매버릭과 탑건 학생들이 수행한 작전이다. 경험이 없으면 절대 생각할 수도, 성공할 수도 없는 작전을 이끌기 위해 결국 교관 매버릭은 전투기에 오른다. 그리고 매버릭이 과거 윙맨이던 구스의 아들 루스터(마일즈 텔러)에게 강조한 건 실전에서 쓸 수 있는 본능과 감이다.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조언에도 루스터는 각성하고, 작전 역시 성공적으로 끝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들이 탄 슈퍼 호넷이 지대공 미사일에 포착된 찰나, 적의 5세대 전투기까지 뛰어들어 교전이 벌어진다. MCU 히어로 무비였다면 매버릭 팀의 누군가를 반드시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위대한 아날로그 영웅담은 그 누구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진에 표류하게 된 두 비무장 군인이 36년 전 매버릭이 몰던 모델인 톰캣을 탈취해 이미 박살난 탈주로에서 날아 오른다. 그리고 톰캣 한 대로 5세대 전투기와 도그 파이트를 벌인다. ‘각그랜저로 부가티와 레이싱하는 격’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영화 <탑건: 매버릭>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이 대목은 좌절 일색의 현실을 말도 안되는 판타지로 껴안아 주는 것이 히어로물의 본질임을 믿게 한다. 랜딩 기어가 박살나고 엔진 일부가 불탔지만 모두의 도움으로 안전히 항공모함에 착륙한 구식 전투기는 매버릭과 루스터, 베이비 부머와 젠Z의 화해 혹은 화합의 상징과도 같다. 그 모든 냉소들이 걷힌 자리에는 동화 속 ‘Happily ever after’ 같은 완벽히 닫힌 결말이 존재했다.

<탑건> 시리즈에서 난처하거나 부탁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거나, 땅을 등지고 하늘로 날기 전의 매버릭을 본 사람들은 “그런 표정 짓지 마”라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매버릭은 “늘 이 표정인데”라고 대꾸한다. 그 얼굴은 가장 솔직한 자신이자, 언제나 변하지 않는 꿈이었다. 그래서 <탑건: 매버릭>은 매버릭의 얼굴을 가진 모든 이들을 위한 헌사로 남을 것이다.


칼럼니스트 라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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