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이 마초>의 기묘한 영화적 여행에 대하여

불화의 여정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크라이 마초>는 자동차에 탄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목가적인 풍경을 지나쳐 주변에 말들이 묶여 있는 마구간의 사무실에 도착하는데, 도착하자마자 남자를 기다리던 한 동료에게 늦었다는 말을 듣는다. 사물함을 제때 비우지 않았다는 범상한 말이지만, 서사 바깥에서 또 다른 느낌을 주는 대사다. 이스트우드가 직접 연기한 마이크라는 남자는 스크린에 뒤늦게 도착한 존재다. 과거 로데오 챔피언이었던 그는 예기치 않은 낙마 사고 이후 보잘것없는 카우보이로 살아가고 있다. 이 노년의 카우보이는 더이상 무엇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마이크는 텅 빈 주인공이다. 그의 주변에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 이렇다 할 적대자도 없고, 이뤄내려는 욕망도 보이지 않는다. 종교적 믿음도, 신념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액자에 걸린 흑백사진들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시피 한 그의 작은 집이 마이크의 상태를 지시한다. 전성기를 넘기고 너무 늙어버린 마이크의 삶은 적잖이 단조롭고 지나칠 정도로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마이크에게 유일한 동료인 하워드(드와이트 요아캄)가 한 가지 임무를 건넨다. 멕시코시티에 있는 13살짜리 아들 라파엘(에두아르도 미넷)을 구출해 국경 지대로 데려오라는 것이다. 이 단순하기 그지없는 여정이 <크라이 마초>, 혹은 마이크를 움직이게 하는 단초가 된다.

<크라이 마초>의 밀도는 희박하다. 그 옅고 희박한 밀도는 인물과 화면에 별다른 긴장감을 허용하지 않는 연출의 선택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도주와 추격이라는, 간단히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을 법한 이야기적 상황을 설정하지만 이스트우드는 그것을 황당무계할 정도로 느슨한 리듬과 속도로 소화한다. 마이크에게 전화를 걸어 독촉하는 하워드의 말에 따르면, 길어야 3일이나 4일쯤 걸릴 것이라 예측했던 계획은 2주가 넘어서도 완수되지 못한다. 마이크와 라파엘은 계속해서 마을과 길 위에 머물러 있다. 그러는 동안 카메라의 시선에는 자꾸만 원래의 목적을 벗어난 다른 것들이 들어온다. 여정의 시간을 한없이 늘어뜨리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유일한 목표인 것처럼 여겨질 만큼 <크라이 마초>는 게으르게 움직인다. 이는 개별적인 장면의 속도나 리듬과는 무관하다. 마이크가 라파엘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치는 장면이나 마르타(나탈리아 트라벤)와 춤을 추는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드물게 몸짓의 활동성으로 충만한 매혹적인 대목이지만, 그 행위가 여정의 목표와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야기를 전진시킨다기보다 그것을 지연시킨다. 그렇게 이스트우드는 이야기의 운행을 중단시키고 여정 안에 또 다른 여정을 만들어내는 장면들로 마치 목적지와 방향감을 잊어버린 듯한 기묘한 영화적 여행을 그려낸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영화에는 서부극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활동적 요소들이 제거되어 있다. 마이크의 여정에는 풍경이나 장소의 감각이 극도로 결여되어 있고, 말들은 울타리 안에서만 잠시 날뛸 뿐이다. 자동차와 총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긴박한 추격과 총격전의 액션은 없다. 마이크는 제때 임무를 완수하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여유롭게 쉬거나 잠든다. 이야기가 도저히 진행되지 않을 때마다 라파엘의 어머니인 레타(페르난다 우레졸라)가 고용한 추격자들과 부패한 연방 경찰들이 그들을 뒤쫓지만 터무니없을 만큼 짧은 해프닝으로 퇴치되어버린다. 유난히 액션이 적고 정적인 공간들로 가득하다는 점을 거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중심은 술집의 식탁이고, 그 자리에서 주고받는 대화에 가깝다. 활동성이 넘치는 카우보이의 시간은 사진 속에만 박제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크라이 마초>는 서부극을 정립하는 본질적 요소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웨스턴이라 말하고 싶다. 이스트우드는 웨스턴을 이루는 영화의 조건들을 지워나가면서 단지 하나의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 텍사스에서 멕시코시티로, 이름 없는 작은 마을에서 국경 지대로 움직이는 느긋한 동사의 움직임을 펼쳐보인다.

심지어 여정의 동선이 직선적인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마이크와 라파엘은 목적지로 이행하면서 우회하고 멈춰 서고 되돌아가기를 반복한다. 예컨대, 마이크와 라파엘이 자동차를 도둑맞는 장면은 두 사람의 여정에 심화된 곤경을 드리울 것처럼 보이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라파엘이 빌렸다고 말하는 또 다른 자동차가 주어지면서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얼핏 보기엔 서사적 시간을 낭비하듯 배치된 장면의 흐름에서 영화가 역설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이스트우드의 이 간결한 소품은 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여정의 힘과 그 여정을 멈춰 세우고 다른 곳을 둘러보게 하는 정지의 순간들이 충돌하는 영화적 우화이다. 마이크를 연기한 이스트우드는 그런 이중적인 힘을 느긋하게 오가는 특유의 몸짓으로 잠정적인 영화의 상태를 지속한다. 달리 말하면, <크라이 마초>는 둘로 분기하는 형식과 상태를 통과하는 운동의 영화다.

하지만 그런 느긋하기 짝이 없는 말년의 운동성이 영화의 전부라고 말하는 건 과장일 테다. 이 완만한 여정의 저편에는 영화가 관측하지 못하는 다른 반쪽의 이면이 비가시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이는 마이크와 짝을 이루는 라파엘이라는 소년과 연관된 질문이다. 그는 투계장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마이크 앞에 나타난다. 라파엘은 하워드가 묘사하던 것처럼 학대당하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고, 그의 어머니 레타의 말처럼 길거리에서 도박과 싸움을 일삼는 거친 괴물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한쪽의 면모가 묘사된다면 우리는 쉽게 앎에 도달할 테지만, <크라이 마초>의 화면은 무엇도 확실히 택하지 않는다. 예컨대, 두 사람을 쫓아온 추격자를 따돌리는 대목에서 라파엘이 드러낸 몸의 상처가 학대의 흔적인지 싸움의 기록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영화는 라파엘을 둘러싸고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스트우드는 이 진동조차 너무나 부드럽고 완만한 여정의 한 부분으로 소화하기 때문에, 그것을 영화의 주요한 부분으로 관측하기란 쉽지 않다. 라파엘을 둘러싸고 있는 말들과 반대로, 이 13살의 소년은 너무나 평범한 얼굴과 행동을 보여줄 뿐이다. 그는 학대의 피해자와 길거리의 폭력적인 문제아 사이에서 확신할 수 없는 범상한 얼굴로 여정에 합류한다.

로버트 워쇼는 웨스턴의 남자들을 설명하면서 서부극 장르의 영화 속 주인공을 일컬어 ‘해야 할 일은 아는 인물’이라 이야기했다. 서부극적 여정이란 그러므로 주인공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실행하는 도정의 기록이다. 주인공은 주어진 임무와 그것을 수행하는 행동을 결합함으로써 영웅으로 거듭난다. <크라이 마초>에서 이스트우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간극을 통해 주인공이 해야 할 일과 실행하는 일의 지위를 미묘하게 뒤흔든다. 주어진 과업과 실행된 행동의 실체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다. 마이크가 해야 할 일은 어머니로부터 방치되고 학대받는 아이를 구출해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와 재회하게 하는 것이었지만, 여정이 진행될수록 과업과 눈앞의 실체가 어긋난다는 것을 인지한다. 하워드는 사업의 수익을 협상하기 위해 레타에게서 라파엘을 빼돌리려던 것이고, 소년은 학대당하는 피해자인지 비행을 일삼는 불량아인지 불분명하다. 대상을 하나씩 알아가는 과정이 전개될수록 역설적으로 마이크의 임무에 불확실한 얼룩을 드리운다. 명확한 목적과 동선으로 출발한 것과 다르게, 시간이 지나면서 목적지에 가까워지지만 그럴수록 마이크는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극히 단순하고 정적인 장면들로 가득한 <크라이 마초>의 아름다움은 여정의 목표와 부가적인 갈등마저 허무하게 만드는 한없이 단조롭고 평이한 운동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 자명한 여정의 궤도 밑에서 표면적인 세계와 부딪히는 불투명한 긴장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하여, <크라이 마초>가 구축한 영화의 현재는 서로 다른 이질적인 충동들이 나란히 대적하는 겹쳐진 세계로 변모한다.

불화하는 몸

흔한 플래시백도 없이 현재만을 주시하는 영화는 그 모순된 긴장을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카우보이로서의 마이크의 경력을 끝장낸 낙마 사고와 그의 아내와 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자동차 사고를 전해 듣지만 사건의 직접적인 표상은 화면 바깥으로 밀려나 있다. 과거의 기록은 사진적 이미지들로 간신히 전해질 따름이다. 이 영화에서 눈앞에 나타난 현실의 얼굴과 사진에 담긴 과거의 얼굴이 경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이크는 더이상 과거의 사진 속 카우보이가 아니다. 레타는 라파엘이 사진에 나온 것처럼 순진한 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은 단순히 과거를 지시하는 향수 섞인 소품이 아니라 현재와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불순한 사물이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화면에서 뒤엉키면서 영화는 시제가 불분명한 끝없는 긴장에 직면한다.

<크라이 마초>에서 이스트우드가 구축한 긴장이 가장 주의 깊게 새겨진 곳은 무엇보다 마이크의 몸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끊임없이 이동하면서도 때로 느긋하게 멈춰 서는 노인의 몸. 텅 빈 상태로 출발한 그의 신체는 여정의 길목에서 새롭게 맞닥뜨린 서로 다른 타인과 풍경을 마주하면서, 그 몸에 익혀둔 특정한 동작들을 다시 가동한다. 동물을 치료하거나 자동차를 수리하고, 어린아이들과 수화로 대화하거나 술집 주인 마르타와 춤을 추는 장면에서 마이크는 그의 신체에 축적되어 있던 몸을 움직이는 규칙과 방법을 현재에 가져온다.

그런데 현재에 불려오는 것은 마이크의 능숙한 동작들만이 아니다. 마이크의 기억의 한 부분 또한 되돌아온다. 비가 내리는 밤, 마이크와 라파엘은 성모 마리아의 성지에 들러 휴식을 취한다. 의자에 누워 쪽잠을 청하는 마이크 앞에서, 라파엘은 의자에 어색하게 걸터 앉아 질문을 한다. 할아버지에게도 자식이 있냐는 라파엘의 말에 마이크는 오래전 아들과 아내를 차 사고로 잃었다고 고백한다. 어두워진 실내 공간 내부에서 카메라는 모자로 반쯤 가려진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마이크의 고백을 듣는다. 명확히 밝혀지지 않지만, 자동차를 운전하는 모습으로 프레임에 나타난 이 남자는 어쩌면 사고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내밀한 말은 단순한 감정적 고백일 뿐 아니라, 마이크와 라파엘의 관계가 지속될 수 없음을 알리는 필연적 근거이기도 하다. 현재의 여정을 통해 춤과 수화를, 대화와 온갖 기술을 다시 드러내 보이고 있음에도 여전히 마이크는 과거의 어둠에 붙들려 있는 자다.

이스트우드의 영화에 서사의 맥락으로 채워지지 않은 또 다른 종류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사 바깥의 어둠으로 픽션 내부를 불길하게 채우는 독립적 공간일 것이다. 좁고 어두운 방에서 전쟁의 기억을 말하던 <그랜 토리노>의 고해성사의 공간이 그 예시에 해당한다. 이스트우드의 인물들이 떠올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은 화면 바깥에서 엄습하며 프레임 내부와 기묘한 긴장을 맺는다. 사라져버린 세계의 기록이, 현재와 불화하는 과거의 선택이 그 어둠 속에 깃들어 있다. 마이크의 몸은 그런 불화로 얼룩진 비가시적 투쟁의 장소다. 그의 떨리는 손짓과 목소리는 눈에 비치는 현재를 흔드는 영화적 동요로 나타난다.

이스트우드의 인물들에게 기억은 현재의 선택을 결정 짓는 절대적인 기제로 자리 잡고 있다. 기억은 그들의 신체를 구속하고 말과 행동을 좌지우지한다. 그렇게 과거의 한순간은 눈앞에 비치는 현재와 더불어 적대적으로 공존한다. 이스트우드의 영화에서 내러티브 내부의 질서와 인과관계로는 설명되지 않는 인물의 선택을 목격한다면 이는 영화가 설정한 범위로는 마주할 수 없는 과거의 어둠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다. 다만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잠시 그 어둠을 응시하지만, 끝내 그 자리에 멈추거나 머무르지 않는다.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크라이 마초>는 영화의 여정을 운행하는 조건을 재고하고 여정의 다른 궤도를 탐색하지만 여정 자체를 중단하지 않는다. 마르타의 집에 잠시 머물던 라파엘은 마이크에게 텍사스에 가는 것보다 이곳에서 지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워드와 레타 두 사람 모두 없는 편이 라파엘에게 좋을 것이라 말하던 마이크도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여정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숙명처럼 두 사람은 원래의 목적지인 국경 지대로 향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여정의 끝에 도착한다. 이스트우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주어진 과업과 드러난 실체 사이에서 모호하게 진동하는 기이한 서부극적 여정을 조직한다.

마이크는 영화의 시작부에 제기된 임무를 완수하면서 주인공의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임무를 부여받은 남자가 목표물과 더불어 목적지에 도달하는데, 정작 무엇도 이뤄냈다고 말할 수 없는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영화가 목표물과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 다른 질문들이 제기된다. 목표는 정말 이것이었을까? 목적지는 과연 이곳이었을까? <크라이 마초>는 영화의 표면적 서사가 영화가 품은 다른 가능성들과 불화하는 희소한 영화적 작법의 사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몽상가의 안식처

걷기보다는 앉아서 쉬기를 택하고, 이따금 피로를 이기지 못해 잠에 드는 이 느릿한 여정의 한가운데에 영화의 제목이 가리키는 ‘마초’라는 이름의 수탉이 있다. 화면의 모든 요소가 한가롭게 방치된 이 영화에서 드물게 역동적인 존재감을 드리우는 수탉은 마이크의 잠을 깨우고, 뒤쫓아온 추격자를 공격하기도 한다. 라파엘은 헤어지면서 마이크에게 바로 그 마초를 건네준다.

영화의 결말부, 자동차를 타고 떠난 마이크는 잠시 머물던 마르타의 술집으로 향한다. 닫힌 문을 지나쳐 빛과 먼지가 피어오르는 술집 안에서 마르타와 느릿한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에 도달한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유일하게 평온을 얻었던 공간으로 되돌아간 엔딩이라는 감상이 가능할 테지만, 여기에는 다른 뉘앙스가 감지된다. 술집 문은 닫혀 있고, 두 사람이 춤을 추는 장면은 이전에 나온 그들의 춤 장면을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로 재현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화면이 꺼지면 마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마이크가 잠을 잘 때마다 깨우던 수탉의 울음소리다. 어쩌면 마이크는 어느 곳으로도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차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죽음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검은 화면에서 들려오는 수탉의 울음소리는 잠든 세계에서 깨어날 것을 요청한다. 끝내 목적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스트우드는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끝없이 지연되고 이행하는 움직임의 세계에 속하기를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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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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