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리얼한 코시국이라니? 모두가 마스크 끼고 버티는 한여름 꿉꿉함! <습도 다소 높음>

* 이 기사에는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

WHO가 뒤늦은 팬데믹을 선언했던 2년 반 전만 해도, 전국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100명을 넘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다. 모두가 처음 겪는 21세기 역병의 시대에 감염자 수는 억제됐다가도 튀어오르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마스크가 의무인 세상에서 세 번의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이전엔 알지 못했던 진실들이 여럿 폭로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이었던 건 개인의 자유 제한 문제였다. 강제로라도 사람 간 거리를 두고, 바깥 출입을 삼가며,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하라는 등의 규칙들이 생겼지만 이를 모두가 지킨 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이 규칙에 따르고 있는 와중에도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 등을 주창하고 있는 사람도 여전히 존재한다.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가장 무섭고 슬펐던 말은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라는 각계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렇게 무서워 할 필요도 없었다. 팬데믹이건 아니건 다만 24시간 전의 세상으로도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찾아와 버린 그 흐름을 굳이 거스르고 싶었던 까닭은 나름대로, 제법, 꽤 아름다웠던 팬데믹 이전의 일상이 다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있었다. 휴가를 다 쓴 치약 튜브 짜듯 짜내서 공항으로 향하던 순간들, 1년에 몇 없는 고주망태 기간 오가던 뻔한 수작질들, 퇴사 타령을 비롯해 마스크가 가리지 않는 긴 대화들이 돌아올 거란 확신 없이는 이 오랜 시간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분명 그 기억들은 굉장히 사소한 욕망 충족의 자유가 제한당하는 상황에서 미화된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런 확신 속에서도 ‘코로나 이전의 세상이 정말 돌아올까?’라는 두려운 의문은 기어코 찾아왔다. 3년 동안 꾸준히 불어서는 도무지 줄어들 생각을 않는 살이나 극도로 내향화한 성격은 둘째 치고, 마스크를 하지 않은 모든 인간들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그 위화감은 극에 달했다. KBS 2TV <오케이 광자매>가 아무리 막장의 끝을 달려도 마스크를 하고 있는 극 중 인물들의 모습 만큼은 편안했다. 끝까지 적응하기 싫었던 코로나19 시국에 적응하고 만 자신을 본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하루에 한 자리에서 영화 네 편도 해치우던 건 아득한 과거의 일로 느껴질 만큼, 영화관을 찾는 횟수는 놀랍도록 줄었다. “코로나는 사라지고 영화관은 예전처럼 돌아올 것”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말이 꿈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

영화 <습도 다소 높음>은 ‘코시국’이 어느덧 익숙해진 낡고 오래된 극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독립영화의 세상은 코로나19 창궐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힘들지만, 영화가 말하는 건 ‘그럼에도 그 극장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화려한 마천루 같은 대작들 속에서 독립영화는 늘 반지하의 습함을 머금고 있었다. 그건 늘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현실적이어서 불쾌한 축축함을 안기기도 했다. 하지만 <습도 다소 높음>은 마스크를 낀 채 한여름을 버텨 낸 모두의 일상으로, 그 꿉꿉함의 영역을 확장한다.

겉멋만 잔뜩 든 한 영화감독(이희준)의 신작 <젊은 그대>의 시사회 날, 극장을 지키는 건 건달 차림을 한 사장(신민재)과 알바생(김충길) 둘 뿐이다. 지금 두 사람의 공통점은 온 얼굴과 몸이 땀 범벅이라는 것. 닦는 것도 지친 듯, 땀 방울은 얼굴에 맺히다가 코 끝에 겨우 걸쳐 쓴 마스크에 스민다. 에어컨 빵빵한 극장에서 봐도 불쾌지수가 폭등할 상황이거늘, 영화 속 극장에는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다. 사장이 ‘비말 확산 방지’를 핑계로 에어컨을 틀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있던 직원들이 다 잘려서 홀로 매표소, 매점, 상영관 관리는 물론 관객 발열 체크에 출입 명부 작성 감독까지 해야 하는 알바생은 사장에게 임금 인상을 타진하지만 어림 없다. 삼복더위에도 손님이고 나발이고 에어컨을 틀지 않겠다는 사장에게는 이도 안 들어가는 소리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

그래도 극 중 더위를 체감하기 힘든 관객들이 있다고 여겼는지, 카메라는 <젊은 그대>에 출연한 승환(백승환)의 소개팅 장소를 포착한다. 30분 늦게 도착한 승환이 마스크를 벗으니 드러나는 건 얼굴을 뒤덮은 수염. 경악하는 소개팅 상대(이자은)에게 승환은 <젊은 그대>의 시사회에 함께 가자고 청한다. 온갖 핑계를 대며 택시 대신 버스를 타야 한다는 승환의 고집 탓에 두 사람은 거의 땀으로 샤워를 한다. 상대가 싫은 티를 낼 때마다 승환의 배낭에서는 휴대용 선풍기, 운동화, 쿨 스프레이가 차례로 나온다. 가까스로 극장에 도착했지만, 에어컨은 커녕 카라멜 팝콘과 콜라도 없는 극장에서 결국 소개팅 상대는 몰래 사라지고 만다.

영화 <습도 다소 높음>

시사회 시각이 가까워 오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그 수가 ‘삼삼오오’를 넘지는 못한다. 배우 말고 생계를 꾸릴 길이 없어 약혼녀에게 차일 위기에 처한 <젊은 그대>의 남자 주인공 주환(고주환), 칸 영화제 급 복장을 하고 나타난 여자 주인공 지혜(차유미), 승환의 영화 데뷔 축하를 위해 시골에서 감독 줄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큰형(고성완)과 작은형(최영), 감독의 광팬인 외국관객(티나)에 GV 모더레이터를 맡은 평론가(전찬일)까지. 모두가 코로나19와 더위가 합작한 상황 속에서 이미 예민함의 최대치를 경신한 모습이다. 영화가 중반 즈음 진행됐을 때야 어슬렁어슬렁 나타난 감독은 “개인정보가 중요한 사람”이라며 한사코 출입 명부 작성을 거부한다. 이 3년 동안 각종 서비스업 종사자들이 가장 많이 겪었을 유형의 인물일 것이다. 그래서 알바생과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물어볼 수밖에 없다. “선생님, 제가 혹시 뭐 어려운 걸 부탁드렸나요, 제가?”

극 중 인물들은 시사회라는 단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며 모였지만 자리가 파한 후 남은 감정들은 모두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원하던 걸 얻지 못해 약이 올라 돌아갔고, 누군가는 그저 이 모든게 끝나 행복했다. 다만 한낮의 해처럼 뜨겁기만 하던 모두의 짜증은 하루의 끝에 적당히 식어 내일을 준비하는 힘이 됐다. ‘그럼에도’ 시사회를 끝까지 지켰던 이들처럼, ‘그럼에도’ 우리는 내일로 움직이기 위해 오늘을 살고 있다. <습도 다소 높음>이라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재난 영화는 그런 말들을 소소하게 준비해 두었다.


칼럼니스트 라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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