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긴 오이’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그려낸 팽팽하고도 낯선 서부극 <파워 오브 도그>

가을엔 역시 데님셔츠죠

* 이 글은 넷플릭스 영화 <파워 오브 도그> (2021)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전투의 승리자

구약성서 시편은 다윗이 부른 노래를 옮긴 것이다. 그는 자그마한 체구로 골리앗이라는 3미터가 넘는 괴물을 이겨버린다. 이스라엘에서 다윗의 인기는 끝을 모르고 치솟게 되지만, 사울 왕은 그에게 온갖 박해를 가한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이 점지한 왕인 사울을 배신할 순 없다며 그의 핍박에 부드러움으로 화답한다. 이에 감동해 뉘우치는 사울, 그러나 질투심은 다시 고개를 든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을 떠나고 사울의 왕국엔 또 다시 적이 침입한다. 전쟁통에 사울은 세 아들을 잃고 절망하여 자결한다. 후손이 뒤를 잇지만, 돌아온 다윗을 따르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아 이윽고 다윗이 왕좌에 오른다.

사울은 왕에서 늪으로 떨어졌고, 목동이었던 다윗은 왕이 된다. 사울은 여호와를 끊임없이 의심했는데 반해 다윗은 신실한 믿음을 유지했다. 사울과 다윗, 둘 모두 생사의 갈림길에 섰지만 믿음의 크기가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신을 찬양한 다윗의 노래는 시편이 되어 성경에 기록된다. <파워 오브 도그>의 엔딩에서 피터 (코디 스밋 맥피 분)가 읊조리는 구절 또한 시편에서 빌어온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다윗은 유혹과 핍박의 의미로 짐승을 대표할 수 있는 ‘개’라는 수사를 이용했다. 사람을 죽인 피터는 불온한 기운으로 밧줄을 쓰다듬으며 저 문구를 낭송한다. 그는 다윗에 비견할만한 긍정과 빛을 보이는 인물일까? 이 영화의 제목인 개의 세력 power of dog 과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에른스트 요셉손의 <사울 앞에서 비파를 타는 다윗>

으이그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왜 그랬어

한번도 본적 없는 웨스턴 무비

<황야의 무법자> (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 이른바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불리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인기가 사그라든 줄 알았던 서부극에 산소호흡기를 장착해주며 단숨에 건맨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랬던 그가 30년이 지나 빼든 카드는 늙은 총잡이가 창녀를 구하는 <용서받지 못한자> (1992) 였다. 우상이 스스로의 이미지를 깨어 권좌에서 내려오며 안녕을 고하면서 장르의 속성을 비켜간 것이다. 공공재라 불리는 장르적 장치는 익숙함을 품는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변용되며 재탄생한다. <파워 오브 도그>는 웨스턴 장르를 기본으로 하되, 괴물같은 사내와 그 주변을 보여주기 위해 심리 스릴러의 장치들을 차용한다. 그런데 그 변화의 정도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일군 낙차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총 한번 쏘지않고, 대결씬 없이도 차돌같이 단단하지만 생경하고 신선한 긴장을 선사한다.

물론 건맨 이미지 형성에 <더티 해리> 시리즈를 빼놓을 순 없다

웨스턴과 2차 산업혁명

서부극의 백미는 역시 개척시대에 활약한 보안관과 카우보이의 이야기다. 여자들이 들어올 곳이 없는 무대인 것이다. 여자는 단지 남자들이 서로의 결투를 위해 전리품처럼 등장하면 그만이었다. <파워 오브 도그>는 1925년이라는, 그렇게 낙후된 시절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연히 발전이 이룩된 시기도 아니다. 당시의 미국은 혁신제품의 보급 사이클과 대소비의 시대를 맞이했다.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미 포드 모델 T 자동차는 10초당 한대를 생산해내기 시작하던 시기다. 생산성의 증가는 가격하락으로 이어져 영화의 배경이 되는 몬타나주의 촌구석에도 자동차가 들어온다. 그러나 이를 수긍하지 않고 과거로만 흐르려는 사람이 있었다. 부유하지만 여전히 직접 소소를 거세하고 장갑없이 밧줄을 꼬는 필(베네딕트 컴버배치 분)이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컴버배치의 <셜록> 짤.

<파워 오브 도그>에서도 여전히 친구는 없다.

미래, 그리고 과거

필은 늘 말을 타고 다닌다. 이외에 그의 동생인 조지(제시 플레먼스 분) 와 아내인 로즈(커스틴 던스트), 그리고 그녀의 아들인 피터는 자동차에 탑승한다. 이렇게 과거에 머무르는 필과는 달리 문명과 비야만으로 가는 세력의 대조가 돋보이는 것은 극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로즈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자동으로 재생되는 피아노가 있다. 햇볕을 받으며 자동피아노를 즐기는 사람들을 향해, 필은 버럭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필이 실내에서 원쇼트로 잡힐 때는 어둠속에서 직접 손으로 연주하는 밴조의 구슬픈 음이 들릴 뿐이다. 그가 빛을 바라보는 장면은 대부분 역광으로 찍혀있어서 그의 실루엣이 강조된다. 필의 바지에는 챕스라는 거죽이 있어서, 그의 외곽선은 마치 ‘유일한 것을 개의 힘에서 구해야 할’ 짐승처럼 비쳐진다.

그런 그도 딱 한 번 차에 올라탄다. 피터에 의해 이미 탄저균에 노출되어 죽기 위해 병원으로 갈 때 뿐이다. 만약 여기서 필이 과거를 상징한다면, 그 과거가 품고 있기 때문에 종식되는 것은 무엇일까?


필의 바지는 마치 반은 염소, 반은 인간인 사티로스를 연상시킨다.

가부장 문화

필은 게이로 추정된다. 브롱코 헨리와 맨살을 맞댄 이후, 아마도 동생인 조지와도 동성애적인 행위를 해왔을 것이다. 이후 조지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찾아 평범한 이성애자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필은 그렇지 않다. 동생과 제수씨가 내는 신음소리를 참지 못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호모 섹슈얼의 기질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자답게 행동해야 한다는 어떤 강박은 그를 계속해서 과거에 머무르게 하고, 그 태도는 주변인들로 하여금 미움을 사고, 결국 피터라고 하는 레이더에 걸려 죽음을 맞이한다.

<파워 오브 도그>의 원작 소설은 1967년에 출판됐다. 당시 여성은 은행계좌를 개설 할 수도 없었고 배심원 참여도 불가했으며 아이비리그 대학에 입학 조차도 불허했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은 되려 남자 가장들에게 짐이 됐다.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할 수 없으며, 가족 구성원을 위해 희생하지만 수고로움에 대한 언급이나 보상을 바라는 것은 금기시 되었다. 가부장 문화는 기본적으로 여성을 핍박헀다. 그러나 그 화살촉은 결국 남자에게로도 향했던 것이다. 연출자인 제인 캠피온은 남성성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론으로써 조소나 야유를 택하지 않는다. 실은 그런 어법은 그간 남성들이 자신과는 다른 어떠한 측을 공격할 때 견지했던 태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중간점에서 약간 기울여 필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을 뿐이다.

피터는 다윗일까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가 행복하기만을 바랬다.

엄마를 돕지 않으면 난 사내도 아니지. 엄마를 구할 수 밖에

피터의 오프닝 내레이션은 묘하게 마지막 구절과 맞닿는다.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칼은 필을 뜻하고, 개의 세력은 그를 따르는 카우보이 및 과거의 어떤 낡은 남성성을 뜻한다. 그러면 유일한 것(= 피터의 엄마)을 구하기 위한 피터의 행동은 짐승의 세력에 맞선 다윗만큼이나 정당할까? 피터는 유약한 외면에 비해 계획적이고 잔인한 내면을 숨기고 있다. 드러내는 방법이 다를 뿐, 남성성의 특성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가 마지막에 띄우는 야릇한 미소는 제인 캠피온 감독의 전작, <피아노>(1993)의 엔딩에서 끝없는 침잠을 나름 찬양하던 맥그레스(홀리 헌터 분)를 보는 것 같다.

즉, 겉으로 드러나는 짖는 개의 힘도, 속으로 감추던 개의 이빨도, 그저 잔인한 폭력성일뿐 진정한 남성성은 아니라는 주장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프리랜서 막노동꾼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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