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잘못된 거 아냐?” 왜 ‘김민영의 성적표’ 아니라 <성적표의 김민영>일까?

왜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니지?

얼핏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제목이다. <성적표의 김민영>. 제목을 이루는 ‘성적표’도 ‘김민영’도, 한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니까. 막연히 김민영이 성적표를 받겠거니, 그것이 중요하겠거니,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수상하다. 의아하다. 왜 단어 순서가 반대지? 왜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닌 거지? 의문을 품고 들여다 보게 된다.

영화가 시작해도 제목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고, 오히려 점점 커져만 간다. 제목에 따르면 주인공은 ‘김민영’이어야 하는데,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은 아무리 봐도 정희(김주아)였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수능을 마치고 대학에 가는 대신 테니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스무 살 정희의 일상을 따라간다. 제목이 ‘정희의 성적표’나 ‘성적표의 정희’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의구심이 짙어지는 가운데 그 이유가 밝혀진다. 절친 민영(윤아정)이 정희를 자취방으로 초대해놓고 몰두하는 그것. 바로 재학 중인 대학의 교수님에게 보내는 이메일 ‘성적 정정 요망의 건’ 때문이었다.


대학 성적표의 김민영은 한참 모자라다

아,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성적 정정 요망의 건’을 쓰느라 청주 사는 친구를 서울까지 불러놓고 귀찮은 티를 팍팍 내는 김민영. 대체적으로 C, B 그리고 D와 드물게 A인 성적표에 사로잡힌 김민영. 더 높은 성적이 필요한 김민영. 그렇다면 제목은 ‘성적표의 김민영’이 되는 게 맞다. 그리고 그런 민영을 만나러 캐리어에 보드게임, 퍼즐, 참외, 햇반을 싸온 정희는 영화의 주인공이자 김민영의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정희에게 민영은 고등학교 기숙사 시절을 함께 한 둘도 없는 친구지만 이날만큼은 가장 야속하고 서운한 상대다. 대학에는 관심없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자신에게 “너는 왜 현실에 없는 말만 해?”라고 하지를 않나, 기껏 도와주려고 교수님에게 보낼 새 메일을 쓰는 와중에 연결선을 빼버리지 않나. 샤워하는 동안 교수님을 직접 만나야겠다며 몰래 도망치지를 않나. 정말이지 김민영은 대학 성적표에 나온 점수 그대로였다. 노트북만 들여다보는 민영에게 정희가 한 말처럼 “성적. 네가 한 만큼 받은 거”였다. 하지만 그해 여름, 김민영이 받게 된 성적표는 그게 다가 아니다.


민영 없는 민영 집에서 민영을 이해한 정희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한 방을 썼던 정희와 민영이지만, 정희는 민영이 없는 민영의 집에 혼자 남아 비로소 민영의 마음을 알게 된다.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너무 좋고, 친해서 모르는 감정과 생각이 있다. 그것은 완전해 보이는 우정이 흔들릴 때 비로소 굴 속에서 머리를 든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아니 별로 믿고 싶지 않은 말을 한다. 나도 우정이야.

정희는 민영이 돌아오지 않는 자취방에서 하루를 머문다. 민영이 세계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들의 위치를 바꿔놓기도, 책장에 꽂힌 책을 펴보기도 하며 거기에서 민영이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려고 한다. 그 마음은 호기심이나 의무감과는 좀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고양이가 낯선 공간에 풀려났을 때 온도를 재고 누울 자리를 찾아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발로 툭툭 건드려보는,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다. 본능적으로 편한 곳을 찾아내는 고양이처럼, 정희도 무언가를 발견하는데. 바로 민영이의 비밀일기다.

붉은색 표지의 비밀일기에서 정희는 편치 않은 진실을 발견한다. 민영 역시 자신에 대한 서운함을 안고 혼자 고민했던 것. 진짜 이루고픈 꿈이 있지만 막막한 것. 관계로 인해 고민하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친한 정희에게조차 숨긴 것. 자신이 모르는 민영의 얼굴이 있었음을. 정희는 민영이 빠져나간 민영의 자취방에서 맞닥뜨린다.


정희가 쓴 성적표의 김민영은 ‘F’다

중간고사든 자격증이든 성적표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것은 어지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성적표는 판결 선언문처럼 단단하고 묵직해서 때로는 개인을 짓누르는 힘이 되기도 한다. 고작 알파벳 몇 글자인데. 그게 노력과 지식의 전부를 대변하려고 한다. 대학교 학사 시스템에 접속해 성적표를 확인한 김민영은 그 알파벳 무리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려면 더 좋은 성적이 필요한데. 성적표에 따르면 김민영은 그게 어려울 것 같다. 넌 안 돼.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학교 성적표의 김민영은 답답하고 초조하고 우울하다. 친한 만큼 편한 정희를 홀대할 정도로. 절박해진다.

민영이 나간 집에서 민영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민영의 다이어리를 읽고, 민영의 긴장과 애절함이 담긴 CD를 보고 민영의 이웃사촌을 만난 정희. 민영이 무엇을 했고 하고자 하는지 알게 된 정희는 마침내 펜을 잡고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그것은 삼행시도, 편지도, 아닌 성적표. 김민영의 새로운 성적표를 정희는 나름의 기준과 이유를 제시하며 썼다. 교통의 요충지에 살아 ‘경제력’은 A+, 꾸미는 것에 관심이 많고 옷을 잘 입어 ‘패션 감각’은 A,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말을 잘 하지만 친해지면 말이 없어져 ‘사회성’은 B+…

결국에는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성적표의 역할인데, 정희가 쓴 민영의 성적표는 솔직하고 담백하며 무엇보다 애정이 있다. A는 그냥 A가 아니며 F도 그냥 F가 아니다. 사실 성적표는 정희의 솔직한 생각을 전하기 위한 핑계다. ‘경제력’, ‘패션 감각’, ‘사회성’ 등으로 운을 띄운 다음, 민영에게 그냥은 못할 말을 하는 것이다. 마치 3행시처럼. 민영과 정희 그리고 수산나라는 또 하나의 친구가 고교 시절 함께 했던 3행시 클럽의 활동처럼. 수능 100일을 앞두고 클럽의 해체를 결정하며 김민영이 마지막으로 낭독했던 바로 그 시처럼 말이다.

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너무 많아 김씨들은 누군가를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민: 민영아, 네가 나가

영: 영원히 제가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예요

“앞으로 뭘 하든 그때의 우리 같았으면 좋겠”다는 정희와 “영원히 이대로 살아가진 않을 거”라는 민영의 엇갈린 바람은 둘의 우정이 계속 좋을 수만은 없겠다는 느낌을 준다. 민영이 정희가 남기고 간 성적표를 읽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영화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 기분이 더 상했을 수도, 뭔가를 깨달았을 수도 있다.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도, 서랍 속에 고이 보관할 수도 있다. 딱 떨어지지 않는 모호한 연출이 민영과 정희의 스물을, 그리고 스물의 우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떤 성적표의 김민영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한 학생이라는 게 전부다. 실습을 열심히 했다는 변명은 어림도 없다. 교수님을 직접 찾아가 애원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어떤 성적표의 김민영은, 제멋대로지만 사교적이고 남을 이해할 줄 아는 멋쟁이다. 그런 민영에게 A도 B도 C도 D도 아닌 F를 줘 도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정희 교수님. 이 엉뚱하고 마음씨 따뜻한 교수님에게 민영 학생은 과연 어떤 메일을 보낼지, 무척 궁금하다.

8월 2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영화의 공동 연출을 맡은 임지선 감독은 “제목이 ‘김민영의 성적표’가 아닌 ‘성적표의 김민영’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영화는 ‘민영이에 대한 정희의 마음’에 대한 영화다. 정희에게 있어 ‘김민영’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그렇기에 ‘김민영’이라는 이름의 소중함이 더 잘 전달되는 제목이었으면 해 <성적표의 김민영>으로 지었다”라고 답한 바 있다.


거북이, 테니스 공, 제주도의 공통점은?

영화를 다 보고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거북이, 제주도, 테니스 공, 그리고 깊은 숲속을 그린 정희의 그림… 이 이미지들의 공통점은 바로 초록색이다. 초록은 3행시 클럽 모임에서 민영이 입은 스웨터의 색이며 정희가 테니스 장에서 입은 유니폼의 색이다. 도로 위에서는 앞으로 가라는 신호이고 많은 경우 긍정의 표시로 인식된다. 잔디가 자라고 나뭇잎이 돋는 봄-여름에 가장 많이 발견되는 색이기도 한 초록. ‘성적표’를 제목으로 삼고도 한 번도 시험지를 채점하지 않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화면 곳곳에 등장했던 수많은 초록색들이 서로 느슨하게 연결돼 하나의 거대한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이재은 감독이 2017년도 겨울에 쓴 짧은 단편 “정희가 민영의 집에 놀러가 느끼는 ‘서운함'”에서 출발했다. 이후 이지선 감독과 함께 내용에 살을 붙여 2019년도에 공동으로 연출했으며 제 22회 전주국제영화제와 제 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총 6개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올해의 기대작으로 주목받고 있다. 엉뚱하지만 차분한 ‘정희’ 역에 김주아, 외강내유 ‘민영’ 역에 윤아정, 하버드에 입학한 수재 ‘최수산나’ 역에 손다현, 그리고 테니스장 사장님 아들 ‘정일’ 역에 임종민이 맡아 연기했다. 9월 8일 극장 개봉.


씨네플레이 유해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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