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놉>, 조던 필 감독의 세계관 ‘이상한 우연’과 ‘나쁜 기적’

* 이 글에는 영화 <겟 아웃>, <어스>, <놉>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여러 설이 있지만, 보통 ‘최초의 영화’라 한다면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파리 카퓌신 대로의 그랑 카페 지하에서 상영한 10편의 영화 중 <열차의 도착>이 거론된다. 단지 달려오는 증기기관차를 촬영한 짧은 영상이었지만, 당시 이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자신에게 기차가 달려오는 줄 알고 몸을 피하기 바빴다.

영화 <놉>

조던 필 감독은 영화 <놉>에서 에메랄드(케케 파머)의 입을 빌려 ‘최초의 영화’는 사진가 에드워드 머이브릿지의 활동 사진 중 하나인 <달리는 말>이라고 정정하듯 말한다. 동양의 주마등을 떠올리게 하는 이 사진의 탄생 배경은 매우 재미있다. 경마광이었던 미국 스탠포드 대학 창립자인 릴랜드 스탠포드는 달리는 말의 네 발이 모두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이 존재하는지를 두고 친구와 내기를 했다. 스탠포드는 한두 개의 발굽은 무조건 땅에 닿는다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 머이브릿지에게 달리는 말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결과는 스탠포드의 패배. 말이 달리면서 네 발 모두 땅을 박차는 순간이 사진에 포착된 것이다.

하지만 에메랄드가 머이브릿지의 활동 사진을 언급한 이유는 백인 사진가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사진 속 말에 탄 흑인 기수, 즉 세계 최초 영화배우의 후손임을 알리며 늘 문명사에서 주역을 뺏긴 흑인의 존재를 상기한다. 감독의 전작 <겟 아웃>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딸 로즈(앨리슨 윌리암스)가 데려온 흑인 남자친구 크리스(다니엘 칼루야)에게 딘(브래들리 휘트포드)은 자신의 백인 조상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흑인 선수 제시 오언스에게 졌던 과거를 언급한다.

에메랄드는 할리우드에서 오빠 OJ(다니엘 칼루야)와 촬영에 필요한 말을 공급하는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농장주였던 아버지는 갑자기 하늘에서 고속으로 떨어진 동전에 ‘눈’을 맞아 그대로 사망했다. 남매는 계속 가업을 잇고자 하지만, 촬영장에 데려간 말이 주의 사항을 무시한 현장 스태프의 오만 탓에 거울을 보게 된다. 거울 속의 스스로와 ‘눈’이 마주친 말은 공격성을 보이며 사람에게 뒷발질을 하고, 결국 남매와 말은 촬영장에서 쫓겨난다.

영화 <놉>

남매는 농장 운영을 위해 키우던 말을 한 마리 씩 테마파크에 판다. 테마파크의 주인은 주프(스티븐 연), 어린 시절 인기 시트콤에 출연했던 아시안 배우다. OJ와 에메랄드는 주프의 테마파크 창고에서 그가 출연했던 시트콤 <고디가 왔다>의 기억들을 접한다. 고디라는 침팬지를 출연시킨 이 시트콤은 시즌2의 한 에피소드를 촬영하던 중 갑작스레 종영을 맞았다. 고디가 주프를 제외한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침팬지를 흥분하게 하는 행동을 알고 있었지만 이를 무시했다. 마치 남매가 사전 고지한 주의사항을 깡그리 무시한 할리우드 촬영장의 사람들처럼.

주프가 <고디가 왔다>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가 될 수 있던 건 고디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수직으로 곧게 선 스튜디오의 운동화를 바라보다가 흥분한 고디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그 사이 고디는 진정을 찾고 주프와 인사를 나누려 하다 사살된다.

인간의 언어를 쓸 수 없는 동물이 감각으로 인간이 지배한 세계와 소통한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의 언어로 동물과 소통하려 한다. 이미 폭력의 형태로 동물들을 길들여 발 밑에 두었다고 여기는 오만은 <놉>에서 죽음이란 결과를 낳는다. 영화에서 목숨을 잃는 모든 인물들은 ‘동물의 눈을 바라보면 안 된다’라는 간단한 섭리를 무시한 벌을 받는다. 대상에 대한 존중 없이 감히, 함부로 보려고 한 사람들은 무조건 죽는다.

영화 <놉>

주프의 시선이 고디의 눈을 향하지 않도록 해 준 운동화가 ‘나쁜 기적’이었던 건, 주프가 그런 엄청난 사건을 겪고도 여전히 오만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를 피칠갑으로 만들고도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고디를 보고 주프는 이 침팬지를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그리고 6개월 전부터 하늘 위에 나타나는 거대한 비행물체 역시 스스로 능히 조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나쁜 기적’은 감독의 전작 <어스>에서 ‘이상한 우연’으로 등장한다. 극 중 과거의 미국은 지상의 인간과 1:1로 연결된 복제인간들을 만들어 지하시설에 두었는데, 이는 복제인간으로 지상의 인간들을 조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실험은 실패로 끝나고 복제인간들은 지하 터널에 갇힌 채 토끼의 날고기를 뜯어 먹으며 지상의 인간들이 행동하는대로 움직이는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들의 생명이 다하면 미국의 실험은 조용히 묻힐 터였지만, 각각 인간과 복제인간인 애들레이드(루피타 뇽)와 레드(루피타 뇽)가 마주친 ‘이상한 우연’ 탓에 반란의 불씨가 켜진다.

영화 <어스>

이는 <겟 아웃>에서도 마찬가지다. 흑인 크리스는 백인 로즈의 집에서 불편한 상황에 처한다. 마치 백인의 노예인 것이 당연하던 시절처럼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기던 크리스. 파티를 열 거라는 로즈 가족의 말에 당황한 듯 따르던 아이스티를 흘리는 흑인 가정부와 갑자기 터진 카메라 플래시에 코피를 흘리는 흑인 남성이 보여 주는 이상한 우연 속에서 “겟 아웃”, 이 마을을 벗어나라는 메시지를 접하게 된다.

이처럼 감독의 세계가 작은 마을(<겟 아웃>)에서 미국 대륙(<어스>)으로, 우주(<놉>)로 향하는 동안 극 중 인물들은 일관되게 평범한 기억 속에 감춰진 착취적 시선을 이끌어 낸다. <겟 아웃>의 크리스가 가진 어머니의 기억, <어스>의 애들레이드/레드가 품고 있는 정체성 혼란, <놉>의 남매와 주프 머릿 속 끔찍한 죽음의 장면들에는 저마다 착취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이를 전달할 목적으로 감독은 ‘본다’라는 행위에 천착한다. 카메라, 거울, CCTV 등의 영상 촬영 기기 등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발명품들이 각 영화의 주요한 오브제인 이유다.

영화 <겟 아웃>

그간 감독은 특히 흑인이 겪은 불평등의 서사를 이야기에 담아 왔다. 트럼프의 시대에 내놓은 두 편의 영화에는 그런 의도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놉>에서는 영화가 대변하고자 하는 소수자의 범위를 확장한다. 주인공처럼 보였던 OJ 대신 흑인이자 여성이고 레즈비언인 에메랄드가 영화의 마지막 ‘보는 행위’를 독점하고 시대적 영웅으로 거듭나는 설정이 그렇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맥스(톰 하디)가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의 조력자로 완벽히 기능했던 것처럼 말이다.

P.S.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 속 명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헤이워드 농장의 핏물 샤워(?) 신은 오오토모 카즈히로의 <아키라>를 오마주한 것으로 보이는 에메랄드의 바이크 질주 만큼이나 볼 만 한 시퀀스다.


칼럼니스트 라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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