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하얗다> – 죽기 위해 사는 사람들

“죽어야지. 오늘은 죽어야지.” 모인(강길우)은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죽기를 다짐하고, 그것을 잊은 채 잠자리에 드는 남자다. 기억을 잃는 이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다. 생의 흔적이 말라붙은 그의 집엔 소주병과 밧줄만 가득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화림(박가영)도 종일 술을 마신다. 슈퍼에 들러 술을 사고, 방에 앉아 명상하고, 가끔 이유 없이 눈물 한줄기 흘리는 게 일과다. 화림은 모인처럼 기억을 잃진 않으나 거짓말을 한다. 매번 이름과 직업을 새로 꾸며낸다. 어느 날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후로 둘은 같이 술을 마신다. 모인은 종종 화림을 잊어버리지만, 가까운 사이라는 화림의 말을 그럭저럭 믿는다. 그러더니 둘은 죽기 위해 함께 길을 떠나기로 한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온 세상이 하얗다>는 구태여 인물의 내면을 파헤치려 들지 않는다.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 시간을 쏟지도 않는다. 감독의 말처럼 “서로 거짓말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관계”인 모인과 화림을 그저 느긋하게 지켜볼 뿐이다.

둘에게 사연이 없는 건 아니다. 모인에겐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닌다. 그에게만 보이는 군복 입은 시커먼 남자는 원인 모를 죄의식을 자극한다. 게다가 모인의 어머니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친척의 말로 미루어볼 때, 모인은 그다지 좋은 아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은 전부 사족이 돼버렸다.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사는 게 힘들다고는 하나, 가끔 그는 죽으려는 이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화림은 자신에게 무섭게 집착하는 폭력적인 남자에게서 멀어지려고 한다. 화림이 그것 때문에 죽음을 결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어쨌거나 그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모인과 동행한다. 이 여정에서 중요한 건 세세한 전후 사정이 아니라 길 자체의 표정이다. 어두운 단서들에도 불구하고 죽으러 가는 길은 나른하고 엉뚱하다. 라디오에선 갑자기 남북통일 소식이 들려오고, 둘은 휴게소에서 불량배를 만나며, 산속에 차려진 신당을 발견하곤 우스운 놀이도 한다. 그들은 가만히 함께 걷고 술을 나눠 마신다. 둘의 시간에 이상한 활기와 편안한 온기가 스며든다.

모인과 화림은 물론 목적지에 도착한다. 탄광 인부들과 그 아내들의 죽음이 서려 있다는 까마귀 숲이다. 모인은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죽기를 소망했다. <온 세상이 하얗다>는 딴눈 팔지 않고 죽음을 향해 가는데도 우울이나 비장의 정서와 멀리 떨어져 있다. 오히려 차분하고 정중하다. 모인과 화림에게 죽음은 그들이 간신히 찾아낸 목표이자,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의식이다. 그들은 숲을 거닐며 적당한 나무를 찾고, 튼튼한 의자를 고르고, 알맞은 밧줄을 추린다. 이 활동들은 생략 없이 온전히 드러난다. 오로지 그 리듬에 집중한 덕에 영화의 호흡은 점차 깊어진다. <온 세상이 하얗다>는 주인공들이 그런 것처럼 현실 세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영화다. 몇몇 대사를 통해 이따금 모습을 드러내는 현실은 탐욕과 폭력이 마구잡이로 출몰하는 곳이다. 영화는 그 안에서 추함을 끄집어내 공격하거나 냉소하는 대신, 식물과 동물을 외로이 돌보는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눈길을 돌린다. 죽음을 소재로 삼은 영화에 그렇게 생명의 귀함이 함께 담긴다.

겨울 강원도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정경, 가벼움과 무거움을 능청스럽게 넘나드는 음악도 영화의 분위기를 풍성하게 완성한다. 카메라는 공간과 인물의 모습을 한꺼번에 다 담을 필요는 없다는 듯 시선을 천천히 옮긴다. 아득한 산자락과 곧고 높게 자란 나무들 사이의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처럼 평온해 보인다. 광고계에 몸담은 김지석 감독은 이 장편 데뷔작에서 조급함 없이 영화의 여러 요소를 안정적으로 매만지며 아이러니한 상황과 감정을 무리 없이 조율한다. 인물의 전사나 심리가 함축된 탓에 자칫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는 대목들이 천연히 표현된 데에는 무엇보다 배우들의 공이 크다. 강길우는 죽음을 선택한 이를 고요하고 존엄하게 그려내고, 박가영은 노래하는 새처럼 극에 활력을 불어넣다가도 금세 글썽거리며 인물의 아픔과 슬픔을 넌지시 보여준다. <온 세상이 하얗다>는 술, 거짓말, 죽음이란 소재를 두루 아우르면서도 소재에 엉긴 빤한 이미지에 머물지 않는 작품이다.


리버스 손시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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