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세월을 물방울 하나에만 천착한 화가가 있다. 한국이 낳은 추상화의 거장 김창열(1929~2021)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조금 지난 2022년 9월, 그의 이야기가 스크린에서 부활한다. 다큐멘터리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다. 감독은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그의 둘째 아들 김오안이다.
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브리짓 부아요 감독이 공동 연출로 참여하면서 이 영화는 김창열이라는 한 남자가 굳게 싸워온 세계사와 연결되는 한 시대의 광기, 공백, 단서를 드러낸다. 물방울을 따라갔더니 역사 속에 한 사내가 보였던 것. 영화는 그렇게 기묘한 단절의 분위기를 풍기는 한 아버지와, 한국 전쟁을 거쳐온 한 사내라는 두 줄기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된다. 마치 물이 흐르듯이.
먼저 드는 생각. 김창열은 왜 물방울에 천착했을까? 아니, 무엇이 그를 예술가의 삶으로 이끌었던 것일까? 영화에서 김창열은 그를 애지중지 키웠던 조부 덕분이라고 술회한다. 아직 호랑이가 살던 평안남도 맹산의 산속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여섯 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서예를 배웠다. 그가 천자문을 쓰면 할아버지는 “너는 어쩌면 이렇게 잘 쓰냐, 동그라미를 잘 그리느냐”라며 감탄했다. 김창열은 “아마 거기가 시작이었다. 내 병적인 창조력이 간질거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의 유년기는 이미 미술과 가까웠다.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서 수학하며 화가로 활동하기도 잠시, 김창열은 일제강점기, 6·25전쟁과 같은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는다.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격문을 쓴 그를 본 경찰이 김창열을 체포하려고 했고, 그는 길을 떠나야만 했다. 밤에는 걷고 낮에는 잤다. 38선에 도착했을 때는 열다섯 살. 혼자였다. 어두웠고, 기관총 소리가 간간이 적막을 깨웠다. 휴전선으로 달리기 전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만약, 당신이 존재한다면 나를 도와달라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오는 데 사람의 머리가 탱크가 지나가서 바람 빠진 럭비공처럼 뒹굴고 있어요. 그게 필경 한국 군인의 머리였을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었죠. 시체 수백 구가 누워있고.”
김창열은 캔버스에 전쟁의 상흔을 그만의 방식으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거대하고 거친 붓자국들은 마치 탱크에 짓밟힌 듯한 흔적처럼 느껴진다. 마치 일종의 전쟁과도 같은 비정형 예술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화풍을 확립한 것. 전쟁이 아니었다면 필경 평온한 자연 풍광, 꽃, 아름다운 나신을 캔버스에 그렸을 천상 예술가 김창열은 불운한 시대를 만나 비명, 곪아버린 상처와 같은 주제를 강렬한 색채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화풍이 바뀐 건 단돈 4달러를 들고 갔던 미국에서였다. 팝아트의 수도이자 소비의 도시 뉴욕에서 그는 예술가로 존재하기 위해 스스로를 재발명해야 했다. 마치 외계인처럼 느껴진 뉴욕사람들을 관찰하며 그의 그림은 하얗고 차갑고 단순해졌다.
실의에 빠진 그를 눈여겨 본 사람은 다름 아닌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었다. 1969년 김창열은 백남준의 부름으로 프랑스로 간다. 68혁명으로 온 유럽이 소용돌이치고 있던 바로 그때, 김창열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마구간에서 드디어 물방울을 만난다. 달마대사가 9년간 면벽수행하다 마침내 도통했던 순간이 마흔둘 김창열에게 고국도 아닌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 프랑스 파리에서 말이다. 그는 영화에서 그 마법 같은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파리에 정착한 첫해에 참 많이 우울했어. 어느 날 한밤중에 깨어나서 무척 불안했는데, 내 그림 중 하나를 뒤집어 놓은 걸 보고 물을 부었더니, 셀 수 없이 많은 물방울들이 맺혔고 빛이 나면서 그림이 됐어. 무척 놀라운 현상이었어.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했지.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그의 물방울은 세계에 첫선을 보이고 캔버스라는 틀을 벗어나 마대, 신문, 천자문, 나무, 한지 등 다양한 질료에 글자와 물방울을 결합시키며 <물방울>, <회귀> 시리즈로 탄생한다. 결국 그는 ‘아름다운 물방울을 그려낸 추상미술의 거장’<뉴욕타임스>, ‘추상미술의 선구자’<OCULA> 등 국내외의 찬사를 받으며,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가로 거듭난다.
그가 그린 물방울을 보면 마치 눈물처럼 느껴진다. 한없이 영롱한 자태를 보이는 물방울들은 오히려 물방울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로 인해 그 질감이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하지만 아들 김오안 감독은 영화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물방울 하나를 그리는 건 하나의 구상이지만, 백 개, 천 개의 물방울을 그리는 건 계획이다. 하지만 만 개, 십만 개의 물방울을 그리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이런 종류의 예속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까? 인내심이 많은 사람일까? 야망 있는 사람일까? 아니면 미친 사람인가?”
어쩌면 그가 그리고 싶었던 것은 물방울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모양의 물방울을 통과한 빛이 남긴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물방울을 그리는 건 모든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라는 김창열의 말처럼, 그에게 물방울은 일제강점기에 또 한국전쟁 통에 스러진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제각각의 모양으로 오롯이 빛을 만나 영롱하게 맺어졌을 물방울 하나하나는 다름 아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었을까? 그가 매일매일 의식처럼 노트에 적었던 ‘현자는 물처럼 산다. 물은 모든 존재에 봉사하고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라는 <도덕경>의 경구처럼, 그는 물방울을 통해 스러진 죽음들을 위한 소리 없는 진혼곡을 매일매일 불렀던 것은 아닐까? 몇백 개, 몇천 개 아니 몇만 개의 물방울을 그려야 그는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을까?
“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같이 행군하는 전우 여럿이 한 번에 폭사하는 경우도 있었죠. 중학교 동창 반 이상이 6·25때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김창열은 침묵하고, 울음을 토해내기도 하며, 낮은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도통 세상과 타인과 조우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한 남자.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독일의 극작가이자 시인이며, ‘낯설게 하기’ 기법으로 유명한 브레히트는 분단의 아픔을 겪은 동독에서 활동했고, 10년이 넘는 미국 망명 생활을 했다. 50대 중반에 쓴 이 시에는 아마도 1,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어낸 자신의 모습이 투영됐으리라. 마치 시인 윤동주가 <쉽게 쓰여진 시>에서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얼 바라 /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가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읊조렸던 것처럼. 어디 이 둘 뿐이랴. 소설가 박완서는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된다’라면서 부끄러움을 가르쳤다. 시대와 나라는 달랐지만 고민하고 저항했던 예술가들의 부끄럽고도 슬펐던 마음. 그 먹먹함.
하지만, 그는 결국 해냈다. 두 물방울처럼 서로 닮지 않은 것도 없다는 것을 수백, 수천 개의 다른 모양의 물방울을 그려냄으로써 말이다. 동그랗고, 타원형이고, 완성되지 않았고, 흑백이며, 구름 같기도 하고, 무리 짓기도 하며, 돋보기처럼 보이기도 한 각기 다른 모양의 물방울이 바로 그 방증이다. 그의 작품에서 물방울은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춤추며, 울고 불타면서 얼룩지기도 하고 확장하기도 한다. 마침내 빛의 그림자마저 지워버리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오롯이 드러내면서 말이다.
평범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침략국 일본의 법을 따르다가, 자유를 너무 사랑한다는 이유로 공산당이 된 한국 해방군에 구금됐던 한 사내. 러시아군을 따돌리고 남한에 왔지만, 북한의 군대가 그의 새 나라를 점령했을 때, 공산군과 싸우도록 징병됐다. 미군의 폭격을 받고 겨우 남한군에 합류하지만, 남한군은 그를 북한 지지자로 판단해 처형하려 했다. 그 청년을 아낀 마을 사람들 덕분에 최후의 순간에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격동의 역사의 현장에서 살아나온 한 사내를 기억하기 위해 김오안 감독은 카메라를 들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평생의 주제, 물방울을 찾아낸 그가 일평생에서 가장 잘한 것이 뭐냐는 아들의 질문에 “수영을 배운 것”이라고 답하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강가에서 조심스럽게 수영하는 김창열의 모습에서 우리는, 50년 넘게 물방울을 그리며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을 평생 속죄하고자 구도자적인 모습으로 살았던 한 남자를 본다. 그렇게 물방울들이 모여 이룬 강에서 먼저 가버린 전우, 친구, 부모를 만나 큰 물방울 하나로 녹아 스며든 한 사내는 이제 비명의 악몽을 벗어났을까. 한 남자가 평생 천착했던 물방울이 더 이상 추상화로 느껴지지 않는 깊어가는 가을, 제주도립 김창열 미술관을 찾아 치열한 세계사의 한 장면을 살아낸 이 사내의 영면을 늦게나마 빌어야겠다. 영화가 끝나고 든 생각이다.
윤상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