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찾아온 <화양연화> 속 음악

왕가위의 걸작 <화양연화>(2000)가 개봉 20년 만에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한국 관객과 만나고 있다. 2000년대 로맨스 영화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작품인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도 <화양연화>에 대한 영화 팬들의 사랑이 뜨겁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화양연화>를 채운 음악들을 소개한다.


Yumeji’s Theme

梅林茂

마치 <중경삼림>(1994) 속 ‘California Dreamin”처럼 <화양연화> 하면 곧장 떠오르는 음악, 바로 ‘유메지의 테마'(Yumeji’s Theme)다. 영화가 시작한 지 5분, 같은 날 이사 온 수(장만옥)와 차우(양조위)가 마작을 하고 있는 공간에서 살짝 눈인사를 한 이후, 엔딩 크레딧까지 영화 내내 총 9번 사용됐다. 단골 식당에 가기 위해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스치는 신에선 배우 장만옥과 양조위의 미모와 섬세한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펼쳐지면서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 ‘유메지의 테마’가 비단 수와 차우가 서로 스쳐지나갈 때만 쓰이는 건 아니다.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 외도를 하고 있다는 걸 안 두 사람이 차우의 집에서 그리고 차우가 글을 쓰기 위해 마련한 호텔방에서 화목하게 무협 소설을 쓸 때, 이웃의 눈총을 받고는 서로 만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낼 때, 이별 연습을 하고는 수가 차우의 품에 안겨 목놓아 운 날 오늘밤은 집에 안 들어가겠다고 말하고 손을 꼭 잡을 때, ‘유메지의 테마’가 함께 한다. 이 음악이 쓰이는 대목이 쓰이지 않는 대목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에 집중해서 보는 것도 <화양연화>를 즐길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절대적인 빈도에도 불구하고 사실 ‘유메지의 테마’는 <화양연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니다. 일본의 영화음악가 우메바야시 시게루(梅林茂)가 자국의 거장 스즈키 세이준 감독의 1991년 작 <유메지>를 위해 쓴 메인 테마다. 20세기 초 활동한 시인이자 화가 유메지 타케히사의 생애를 그린 <유메지>와 <화양연화>는 그다지 닮은 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메지와 테마’와 <화양연화>는 완벽하게 부합한다. <화양연화>에 맴도는 차우와 수 사이의 관능과 어긋남의 순간을 모두 끌어안는다. 왕가위는 <화양연화> 이후 <2046>(2004)과 <일대종사>(2013)에 우메바야시의 음악을 사용하면서 편애를 드러내 왔다.


Aquellos ojos verdes

NAT KING COLE

같은 건물에 살면서 종종 스치듯 가볍게 안부만 묻던 두 사람은 식당에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눈다. 냇 킹 콜(Nat King Cole)이 스페인어로 노래하는 ‘Aqullos ojos verdes’가 어색한 분위기를 가까스로 녹이고 있다. “개인적으로 물을 게 하나 있어서요. 아까 본 핸드백 어디서 사신 거죠? 아내에게도 하나 사줄까 하고요” “정말 자상한 남편이시네요. 그런데 제 것이랑 똑같으면 안 좋아하실 텐데” “미처 그 생각은… 싫어할까요?” “아마 좋아하진 않겠죠.” 대화가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점차 예상되는 가운데, 수도 차우의 넥타이에 대해 묻는다. 전과 달리 빠르게 두 사람을 오가는 카메라. 거의 비슷한 대답을 돌려주는 차우의 말을 듣고는 수는 대뜸 “사실… 제 남편도 똑같은 타이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어렴풋하게 느끼고 있던 고통스러운 비밀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바로 그때, 음악이 딱 멈춘다. 가까스로 짓누르고 있던 불안이 쾅 터져버릴 것 같은 순간에 오히려 정적이 흐르게 내버려 두는 왕가위의 결정이 돋보인다.


Te quiero, dijiste

NAT KING COLE

“제 아내도 같은 핸드백이 있죠” “사실.. 봤어요. 짚이는 거라도…?” 잠시의 적막을 깨는 것도 냇 킹 콜의 노래다. 마찬가지로 그가 스페인어로 부른 노래 ‘Te quiero dijiste’. 그렇게 속에 묻어둔 비밀을 털어놓은 두 사람은 함께 밤거리를 걷는다. 서로 어긋나기만 했지만, 처음으로 서로 같은 곳을 보고 나란히 걷고 있는 투샷을 비춘다. 상쾌하게 들리기만 하는 ‘Te quiero dijiste’의 리듬이 수와 차우가 품고 있는 비애를 다독이는 것 같다. 재즈 보컬리스트 냇 킹 콜은 1958년 라틴 시장을 노리고 만든 앨범 <Cole Espanol>을 발표했다. 쿠바의 하바나에서 오케스트라를 녹음해, 냇 킹 콜은 미국에서 노래를 얹는 식으로 제작된 앨범. 그리고 각각 다른 편곡자를 기용해 비슷한 앨범 두 개를 더 내놓았다. ‘Aqullos ojos verdes’, ‘Te quiero dijiste’, 그리고 바로 다음에 소개할 ‘Quizas, quizas, quizas’까지, 모두 이 연작을 통해 발표된 노래들이다.


花樣的年華

周璇

왕가위는 <화양연화> 곳곳에 1962년 홍콩 사람들이 즐겼을 법한 노래들을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것처럼 배치했다. 수와 차우가 서로 몸을 기댄 채 손을 맞잡고 밤을 통과한 다음날, 라디오에선 어느 사연과 노래가 들린다. “그리고 사업 때문에 일본에 있는 첸 선생도 이 노래를 청했군요. 아내의 생일을 축하한다면서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뜻하는 ‘화양적연화’입니다.” 아마도 수의 남편이 보낸 것 같은 사연이 끝나고, 3~40년대 큰 인기를 누린 중국 가수 주선(周璇)의 노래가 흐른다. 수는 그 노래를 가만히 듣는다. 얼굴은 비추지 않은 채, 천천히 벽에 몸을 기댄 채 ‘Happy Birthday’의 그대로 따온 듯한 도입부를 들으며 몸을 움직이는 수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이면 같은 노래를 듣고 있는 차우가 보인다. 바로 옆집에 사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공간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도록 묘사해왔던 영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참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데, 이 대목의 편집은 수와 차우가 그 가까운 거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큰 벽에 기대어 각자의 ‘화양연화’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탄식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이 함께 밤을 보냈던 바로 다음 장면에 배치된 신이라 더더욱 그렇다. 수와 차우가 함께 만든 비밀은 이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과거’가 되었다.


Quizas, quizas, quizas

NAT KING COLE

차우는 수에게 싱가포르에 함께 가자고 말한다. 그리고 홀로 2046호를 떠난다. 수가 급하게 집을 나서지만 결국 홀로 텅 빈 2046호에서 눈물을 흘린다. 냇 킹 콜의 ‘Quizas, quizas, quizas’는 차우와 수가 서로 헤어진 이후의 시간을 채우는 노래다.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배치와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을 뜻하는 노랫말은, 두 사람이 어쩌면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한다. 화양연화 같던 1962년 홍콩이 지나간 후에도 수와 차우는 만날 듯 말 듯 4년의 시간이 흘러도 자꾸 어긋나기만 한다. 노래는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는데, 수가 다시 돌아와 살고 있는 집 문 밖을 차우가 가만히 바라볼 때, 관객은 차우가 저 문을 두드리기를, 차라리 이 노래가 끝나지 않아서 언젠가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노래는 거기서 멈춘다. 그리고 자막.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Angkor Wat Theme

MICHAEL GALASSO

“옛날에는 뭔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으면 산에 가서 나무에 난 구멍 속에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을 채웠어요. 비밀을 영원히 묻어두는 거죠.” <화양연화>는 캄보디아 앙크로 와트에서 끝난다. 차우는 이 먼 유적지에 와 어느 돌기둥에 대고 오랫동안 속삭인다. 그가 왜 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아마 수와의 비밀을 틀어놓기 위해서 이 곳을 찾아왔을 것이다. 이 풍경을 수식하는 음악은 미국의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갈라소(Michael Galasso)의 ‘앙크로 와트 테마’. 어쩌면 <화양연화>의 유일한 오리지널 스코어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낮은 현악기들이 서로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며 끝나지 않을 것처럼 뒤엉키는 곡조는 차우가 비밀을 묻어두는 행위야말로 그의 사랑이 끝난 게 아니라 마치 이 유적지처럼 영원히 살아 있을 거라고 전하는 것 같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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