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서와 영화의 구분을 위해 도서는 작은따옴표(‘ ’), 영화는 부등호(< >)로 표기한다.
1986년부터 약 1년간 연재되었던 그래픽노블인 ‘왓치맨’은 동 장르 중에서 유일하게 타임지가 선정한 ‘1923년 이후 최고의 영문 소설 100선’에 들어가기도 했던 작품이다. ‘브이 포 벤데타’의 작가로도 유명한 앨런 무어가 스토리를 쓴 ‘왓치맨’은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명작 중 하나.
슈퍼히어로 코믹스 전체에 미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장대한 수준인데, 히어로가 단순히 적과 전투를 벌이고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영웅신화로서의 작품들 일색이었던 기존 코믹스 시장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작중의 캐릭터들은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향을 미쳐 다양한 오마주로 재탄생하기도.
2009년에 한 번 영화화된 적이 있으나 잭 스나이더의 뚝심과 원작 재현으로 인하여 매우 암울한 분위기의 작품이었다. 물론 원작을 아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결과이긴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발랄한 슈퍼히어로물을 기대했던 관객에게 충격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런 <왓치맨>이 다시 드라마로 등장할 예정인데, 정식 방영까지 한 달 정도 남은 지금 원작 ‘왓치맨’을 중심으로 작품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정리해 본다.
감시자들은 누가 감시하는가
‘왓치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자경단원 히어로들이 미닛맨이라는 팀으로 모였지만, 각자의 개인적인 문제와 사건으로 분열하게 되고 이후 정부 승인 없이 활동하는 히어로들을 범죄자로 규정하는 법령이 제정되면서 히어로들 대부분이 은퇴하게 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현대 미국의 대체 역사를 채택하고 있는데, 베트남전에서 미닛맨의 일원이었던 초능력자 히어로 닥터 맨하탄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여파로 리처드 닉슨이 5선에 성공해 1985년까지 냉전 체제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 무려 5선에 성공한 닉슨 체제는 독재 상태에 가까워져 있으며, 현대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듯하면서도 유사한 부분이 많은 느낌을 주지만 전반적으로 미국 사회 내부의 병폐와 문제점들을 꼬집고 있다.
한때 히어로로 활동하며 대중의 관심을 독차지했지만 이제는 잊힌 지 오래인 많은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흔히 슈퍼히어로들이 대중의 인기를 얻어 환호 받는다는 점을 완전히 비틀어 버리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또한 캐릭터 하나하나의 개인적인 욕망과 문제들이 충돌하면서 이들 내부의 어둡기 그지없는 진실이 드러나는 과정은 일품.
히어로 역시 인간이며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욕망을 갖고 있고, 이런 문제 때문에 ‘정의’를 위해 싸우는 히어로들의 신념과 성향은 각기 너무나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지점을 후벼 파듯 각각의 캐릭터들이 갖고 있는 비밀과 어두운 면에 대해 다루며 역으로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모까지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다. 때문에 밝고 정의로운 느낌으로 다루어지던 실버 에이지(Silver Age, 인간적인 히어로 묘사를 중시한 1950년대~70년대)의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좀 더 현실적이고 원론적인 사유를 하는 ‘고뇌하는 히어로’로서의 이야기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했다.
차가운 도시의 아나키스트 만화가…? 앨런 무어
스토리 작가인 앨런 무어는 ‘브이 포 벤데타’와 ‘미라클맨’, ‘스웜프 씽’, ‘헬 블레이저’(<콘스탄틴> 원작), 조커 코믹스 중에서도 명작으로 꼽히는 ‘킬링 조크’ 등을 쓴 사람으로, 그래픽노블을 고전의 반열에 올렸다는 평가까지 듣고 있는 작가다.
앨런 무어 작품의 특징은 집요할 정도의 자료조사를 토대로 한 날카로운 심리 묘사, 독특한 연출, 기획과 구성 면에서 보여주는 참신함이라고 할 수 있으며 아나키즘(무정부주의)적인 성향도 갖고 있다. 이런 아나키즘 성향이 가장 크게 드러난 것이 바로 ‘왓치맨’.
이 때문에 사실, ‘왓치맨’ 코믹스는 편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미국 현대사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도 필요한 부분이고, 슈퍼히어로 장르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고 있어야 이 작품에 들어가 있는 냉소적인 시선에 대해 이해할 수 있기 때문.
그 외 앨런 무어는 자신의 작품들이 미디어믹스되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래픽노블에서 보여줄 수 있는 깊은 고찰들이 영화화되는 과정에서는 아무래도 생략되거나 축약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참을 수 없는 듯.
영화 <브이 포 벤데타>와 영화 <왓치맨>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2009년에 개봉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왓치맨>이 영상미와 원작 재현도, 고증 면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지만 원작 ‘왓치맨’에 비해선 비교당하는 걸 생각해 보면 원작자의 기분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아마 드라마화에 대해서도 별로 호의적이지는 않을 듯..).
DC 유니버스 편입과 ‘둠스데이 클락’
왓치맨 코믹스는 1986년 첫 연재될 당시 DC 소속이긴 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DC코믹스와는 별도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2016년에 DC코믹스가 뉴 52(플래시포인트 이벤트 이후 이루어진 세계관 재정립)를 단행하는 과정에서 2017년, 기존 DC 코믹스의 세계관으로 정식 편입되었다.
이후 DC 코믹스에서 새롭게 후속작으로 내놓은 ‘둠스데이 클락’이 출시되었다. DC의 대표 캐릭터인 슈퍼맨과 ‘왓치맨’의 독특한 캐릭터인 닥터 맨해탄, 로어셰크와 오지만디아스 등의 캐릭터가 등장하며 왓치맨과 DC코믹스의 크로스오버 작품이자 공식 후속편으로서의 자리를 확실히 했는데.
시대의 명작이란 말에 한 점 흠잡을 데가 없는 ‘왓치맨’과 DC의 크로스오버라는 면에서 엄청난 기대를 받기도 했지만 이미 훌륭한 완성도를 인정받으며 완결 지어진 기존의 ‘왓치맨’을 괜히 끄집어내서 건드리는 게 아니냐 하는 부정적인 반응도 있다.
특히 로어셰크의 재등장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편이기도. 가장 큰 이유는 원작자인 앨런 무어가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기도 한데, <브이 포 벤데타>의 실사화를 전후해 DC와는 연을 끊어버렸기에 애초부터 불가능한 이야기긴 하다.
국내에는 지난해 시공사에서 기존의 2권 분량 왓치맨 코믹스를 단권 양장본으로 새롭게 출간했는데, 출간 전 텀블벅 펀딩을 통해 ‘둠스데이 클락’의 한정판 렌티큘러 커버 이슈를 포함한 디럭스 에디션을 판매했다. 더불어 ‘둠스데이 클락’은 호불호를 떠나 모든 독자들이 성토할 정도로 느린 연재속도(그래도 <헌터X헌터>의 토가시 요시히로 수준은 아니다)로도 유명해 아직 완결 난 상태는 아니다.
두 번째 실사화, 새로운 DC TV 시리즈 ‘왓치맨’
1980년대 중후반 당시의 슈퍼히어로 코믹스들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졌던 ‘왓치맨’이기에, 바야흐로 슈퍼히어로의 전성시대가 도래한 2010년대 말 현재에도 이 질문은 아직 유효할지 모른다.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에게 개인적인 고뇌와 암울함, 부정적인 요소들을 집어넣고 그것들을 묘사하는 기술이 꽤나 발전한 현재이기는 하나 아직 ‘왓치맨’처럼 진중하고 우울하며 정치적이기까지 한 작품은 아쉽게도 없었다.
일전에 이야기했듯이 원작이 존재하는, 그것도 장시간에 걸쳐 걸작으로 손꼽혀 온 작품을 다른 장르로 재창작을 거치는 미디어믹스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원작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따올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기초적인 작업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테고, 기존 팬들에게는 만족감을 주는 동시에 새로운 관객이나 시청자에게도 매력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왓치맨’의 경우에는 이런 문제가 한층 더 심각한 편이다. 앨런 무어의 기라성 같은 작품들은 다수 영화화가 된 바 있는데, 그중 가장 수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 영화 <왓치맨>인 데다가 원작자가 호의적으로 협력해 줄 리도 없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이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부담감은 한층 클 것으로 보인다.
북미 현지에서 10월 20일에 첫 방영 예정인 이번 드라마는 HBO에서 방영 예정이다. HBO는 최근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드라마인 <체르노빌>은 물론이고 <영 포프>, <실리콘 밸리>, <퍼레이즈 엔드>, 그리고 <왕좌의 게임>과 <럭키 루이>, <안투라지>, <섹스 앤 더 시티> 등 미국 드라마 중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 작품들을 만들어 왔던 방송사다. 국내에서는 OTT 플랫폼 중 하나인 왓챠플레이에서 HBO 유명 드라마들의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제작자인 데이먼 린델로프는 <로스트>의 주역이기도 했고, <레프트오버> 등에도 참여해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는 인물이다. 더불어 왓치맨 원작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으니 원작 훼손급의 망작이 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봐도 좋을 듯하다.
원작이 원작인지라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나인 인치 네일스가 참여하는 OST에 데이먼 린델로프 그리고 HBO까지 검증된 인물들이 진행하는 프로젝트이기에 드라마 <왓치맨>에 좀 더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
희재 / PNN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