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여피족 이야기라고? 아니지, 2023년 한국에도 있는 <아메리칸 사이코>

“첫 번째 있지? 쟤가 P아파트 살아. 그리고 저기 두 번째 있는 애가 그냥 일반 그 앞에 단지인데, 그 단지 건물주야. 그러니까 결국 쟤가 제일 잘 사는 거야. (중략) 세 번째 X아파트 엄마가 그것도 모르고 으스댔어. 그런데 결국 (두 번째 아이 집이) 건물주여서 깨갱 하잖아.”

신도시 사는 서준이네 부모는 영어 유치원에 보낸 아들 학예회에서 이런 말들을 나눈다. 주차장이 협소했는지 남편은 계속 “차 빼 달라”라는 전화에 불려 나가고, 처음에는 잔뜩 풀이 죽어 돌아온다. 주차장에서 자신에게 연락한 유치원 다른 아빠는 2억 원 짜리 수입 SUV를 타는데, 우리집 국산 RV가 창피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차를 빼 주러 나갔다 온 남편은 피식대며 자리에 앉는다. “아니 웃기고 있어. 차가 빠져 나갈 수가 있는데 계속 빼 달라는 거야. 내가 한 바탕 했어.” 남편에게 전화한 사람의 차는 2015년식 국산 준중형 SUV였다. 그리고 이건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콘텐츠 ‘서준이 영어유치원 학예회 ASMR’의 내용이다.

영상은 신도시 부부 배용남(이용주)과 류인나(박세미)가 학예회장에 나타난 모든 사람들을 주제로 나눈 20분 동안의 대화를 담았다. 두 사람은 끊임 없이 타인이 거주하는 아파트와 그들이 몰고 다니는 차로 이야기한다. ‘이웃집 숟가락 개수도 다 안다’는 옛말은 서준이네의 시대에 더 이상 동네 사람들과의 깊은 친분을 표현하지 못한다. 이웃집 숟가락 개수보다는 숟가락 브랜드를 알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걸 왜 알아야 하느냐고? 우리집 것보다 좋은 걸 쓰는 지 신경이 쓰여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부부는 아들이 연극 주인공을 맡은 줄 알고 주변에 자랑을 했지만, 막상 서준이는 주인공이 아닌 ‘나무 1’ 정도의 작은 역할을 맡았다. 남편은 자신이 국산차를 타서 그렇게 된 거라고 투덜댄다. 여기서 재밌는 건 아들 서준이가 출연한 연극이 <어린 왕자>라는 점이다. 소설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4번째 별의 주인, 얼굴이 붉은 아저씨 ‘사업가’는 하루 종일 자신이 본 별의 숫자를 세는데만 몰두한다. 그 행위 자체가 별을 소유했다는 증거이고, 그로써 부자가 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린 왕자는 이 아저씨에게 묻는다. “별들을 소유하는 게 당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나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의 패트릭 베이트먼(크리스찬 베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여피(Yuppie)족이라 불렸다. ‘영 어번 프로페셔널즈(Young Urban Professionals)’의 머릿글자 ‘YUP’과 히피(Hippie)의 끝글자 ‘PIE’를 합성해 만든 단어로, 물질적 부유함을 갖춘 ‘화이트 칼라’지만 기성세대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1980년대 중반 청장년층을 일컫는 말이다. 2023년 한국에서 아파트와 차 브랜드가 이름처럼 통용되듯 여피족들의 시대에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스타일이 한 개인을 증명했다. 이들은 종아리까지 떨어지는 캐시미어 코트 아래 발렌티노 수트를 입고 올리버 피플스의 안경을 쓸 뿐만 아니라 옷 아래의 체형까지 철저히 관리했다. 이야기가 좀 더 복잡해 지는 건, 이들이 돈으로 사기 어려운 정신적 충만과 정치적 올바름까지 스타일의 영역에 넣으려 했기 때문이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27세에 이미 월스트리트의 인수합병 전문 회사 피어스&피어스의 부사장인 패트릭은 ‘상류층’이라는 말에 꼭 어울리는 인물이다. 집안부터 유복한 데다가, 명문 사립고를 거쳐 하버드에서 학부와 MBA까지 마친 그는 스스로도 인정한 ‘잘 관리된’ 생활을 향유하고 있으며 이성적이고 반듯하기까지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상류층인 약혼녀 에블린(리즈 위더스푼)이 있고, 월세가 가늠도 안 되는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 산다. 그럼에도 인종차별적 발언에 발끈할 줄 알고, 기아 퇴치를 외치며 여성들의 권리 신장을 역설하는 면모까지 갖췄다. 그저 술집에서 현금만 받는다는 여자 종업원이 잠깐 뒤를 돈 사이 시끄러운 음악의 힘을 빌려 “널 찔러 죽인 다음 피칠갑을 해 주겠다”라는 끔찍한 말을 소리치기도 하지만.

극 초반까지, 패트릭이 이 같이 어딘가 뒤틀린 내면을 내비치는 대상은 매우 한정적이다. 비서 진(클로이 세비니)을 비롯해 ‘상류층이 아닌’ 이들 앞에서는 가면을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친구와 바람을 피우는 약혼녀 몰래 그의 사촌과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패트릭이 외적 절제를 멈추기 시작한 건 비교에서 기인한 열등감 때문이었다. 대상은 월스트리트에 소문이 쫙 퍼질 만큼 큰 인수합병 건을 맡은 폴 앨런(자레드 레토). 패트릭은 뉴욕 최고의 핫플레이스 도르시아에 겁도 없이 당일 예약을 하려다가 비웃음을 사게 되는데, 이튿날 회사에서 만난 폴이 이 식당을 가볍게 예약하는 것을 보고 질투에 휩싸인다. 게다가 미감을 쏟아 부어 만든 자신의 명함보다 폴의 명함이 훨씬 세련된 것을 보고는 폭주하기 시작한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처음 그의 분풀이 상대는 골목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흑인 노숙자였다. 이미 우연히 만난 여성들을 집으로 데려가 죽이는 걸 취미처럼 즐기고 있던 패트릭은 노숙자에게 “멀쩡한 몸으로 왜 일을 안 하느냐”라는 둥의 설교를 퍼붓더니 결국 그와 그의 개까지 죽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폴과 마주친 패트릭은 자신의 이름을 마커스 핼버스트램으로 착각하는 폴에게 앙심을 품고 잔뜩 술을 먹인다. 취한 폴은 패트릭을 마커스라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하고, 패트릭은 그 앞에서 마커스인 척 연기를 하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그러던 중 폴이 패트릭의 이름을 언급하며 얼간이라고 욕을 한다. 패트릭은 그런 폴을 집에 데려가 그를 도끼로 살해한다. 뜬금없이 밴드 ‘휴이 루이스 앤 더 뉴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다가, “지금 도르시아 예약해 봐, 이 미친 놈아!”라고 화를 내면서.

패트릭은 폴이 런던에 여행을 간 것처럼 꾸미지만, 이를 믿지 못한 폴의 약혼녀는 일을 ‘실종 사건’으로 크게 만든다. 폴의 약혼녀가 고용한 탐정 도널드 킴블(윌렘 대포)은 곧장 패트릭을 용의선상에 올린다. 여기서 오는 불안은 패트릭을 더 끔찍하고 기괴한 연쇄살인마로 만든다. 패트릭의 농담은 에드 게인이나 테드 번디 같은 연쇄살인마들의 인생을 다루고, 그의 집과 폴의 빈 집에는 시체들이 쌓여 갔다. 이제는 돈을 뽑다가도 환각을 보는 상황에 처한 패트릭은 닥치는대로 사람을 죽이고 자신을 따라온 경찰차까지 폭파시켜 버린다. 경찰을 피해 사무실에 숨어든 패트릭은 변호사 해럴드에게 모든 살인 행각을 털어 놓는다. 하지만 다음날에는 아무도 그를 뒤쫓지 않고, 시체가 가득하던 폴의 집은 비워져 있었으며, 해럴드에게 했던 고백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패트릭의 모든 범죄 행위가 환각에 의한 망상이었는지, 남의 목숨보다 제 일이 더 소중해 연쇄살인도 묵인하는 사회였던 건지를 판단하는 건 <아메리칸 사이코> 관람자의 몫이다. 다만 이 이야기가 분명히 시사하고 있는 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는 살 만한 소비사회에서 개인이 철저히 소외된다는 점이다.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만족감을 누리기 위해선 남이 어떤 걸 가졌는지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고, 스스로 빈곳을 만들어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채우기를 계속해야 한다. 내가 남보다 낫다는 안도를 할 새도 없이 더 나은 타인들은 발견된다. 여피들의 시대에 패트릭이 고작 명함 디자인에서 사람을 죽이고 싶을 만큼의 결핍을 굳이 찾아냈듯, 2023년의 한국은 아빠가 국산차를 타서 아들이 학예회 연극 주인공에서 밀려났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회가 돼 버렸다.


칼럼니스트 라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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