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등 유명 포스터는 다 이 작가 작품? 90년대와 2000년대 한국영화 포스터계 대부

사진 작가 오형근의 개인전 <왼쪽 얼굴>이 서울 삼청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 중이다. 최근엔 <왼쪽 얼굴> 연작의 작업들을 모은 사진집도 출간됐다. 오형근은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일련의 영화 포스터 작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와 사진집 출간을 기해, 오형근 작가를 만나 지난 영화 포스터 작업과 <완쪽 얼굴> 전시를 두고 긴 대화를 나눴다.

오형근 작가


미국에서 영화와 사진을 공부하고 1993년에 귀국하셨죠. 포스터 사진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첫 포스터는 1994년 <세상 밖으로>예요. <아내가 결혼했다>(2008) 연출한 정윤수 감독이 고등학교 동창인데, 당시 <세상 밖으로> 조연출이었어요. 둘 다 미국에서 유학했고 동창이니까 오랜만에 만나서 고민을 토로했죠. 사진 공부는 많이 했는데 사실 영화를 하고 싶다 그런데 조감독은 하고 싶진 않고 시나리오를 쓴다든지 해서 감독의 길을 가고 싶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감독님이 예전에 사진 하던 분이래요. 직접 뵈니까 성격도 좋으시고 사진 하는 선배들도 좀 아시더라고. 현장 구경도 할 겸 와서 내 영화 포스터 사진 해주면 어떠냐고 하셔서, 어차피 나도 조감독을 우회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하던 참이니 제작자들한테 인사도 할 겸 하겠다고 했죠.

따로 시스템이 없으니까 필요할 때마다 부르는 거예요. 나를 정식으로 소개를 시켜주지도 않았고 나도 들이대는 성격이 아니니까 현장에서 아무도 상대를 안 해줘서 혼자 있었는데, 동해안 촬영장에 갔을 때 어떤 여자가 옆으로 와요. 그 분이 심재명 씨였어요. 뭐하세요? 묻길래 사진 찍으러 왔다고 하니 자기는 홍보를 맡았대요. 그때는 명기획이었죠. 제일 먼저 연결됐어야 할 사람인데 현장에서 그렇게 만난 거예요. 그 다음부터는 심재명 씨랑 얘기도 많이 하고, 어떻게 찍었으면 좋겠다 요구사항도 직접 받고, 스탭들도 잘 대해주기 시작했어요.

<세상 밖으로>

포스터가 코믹해요. 죄수복 입은 두 남자의 엉덩이가 부각되고, 드레드 머리를 하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기도 해요.

자칭 예술사진 한다는 사람이니까 그런 사진은 찍고 싶지 않았어요. 원래 포스터 사진으로 내 스튜디오에서 흰 벽을 이용해서 인물 위주로 찍은 게 있어요. 탈옥한 사람들 얘기다 보니까 초반엔 칙칙한 느낌이 있었어요. 그래서 가볍고 코믹한 영화처럼 보여야겠다 해서 시나리오 톤대로 안 찍고 기획의 톤대로 사진을 찍었죠. 당시만 해도 내가 답답한 사람이었던 게, 시나리오엔 이런 장면이 없을 텐게 내가 왜 찍어야 하지, 이렇게 생각했어요. 펑크 머리 하고 그런 건 홍보에만 쓴다고 해서 투덜거리면서 대충 찍긴 찍었는데, 그게 결국 메인으로 나가고, 예나 지금이나 내 관점을 고수해야 한다는 게 있어서 한달은 괴로워 했어요.

<영원한 제국>

두 번째 작업인 <영원한 제국>(1995)은 제대로 각잡고 진지하게 찍은 게 역력해요.

모든 게 내가 욕심 낼 만한 조건이었어요. 우선 원작 소설을 읽고 감동을 많이 받았어요. 그 책을 갖고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1992)의 박종원 감독님이 연출하니 나도 혼연의 힘을 다해서 좋은 작품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이것은 내가 잘하는 초상으로 해야겠다 하고 프로듀서와 포스터 디자이너를 열심히 설득했어요. 옛날에는 흥행에 도움 될 만한 요소 있으면 누끼 따서 자잘하게 다 집어넣는 식이었는데, 저는 안성기 선생님 얼굴만 스트레이트 하게 찍어보고 싶다 고집해서 스튜디오에다가 옥쇄를 3미터 짜리 벽화처럼 그렸어요. 대부분 스트로보라고 해서 펑펑 터지는 빛을 썼고 그걸 쓰면 피부톤이 단순해지는데, 나는 학부 때부터 텅스텐 조명을 이용해서 피부톤을 드라마틱 표현하는 걸 많이 연구했어요. 그렇게 대형 카메라까지 딱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몇 시간을 기다려도 안 오셔. 나도 약간 뿔이 났는데, 새벽 1시에 도착한 그 성격 좋은 안성기 선생님 표정이 너무 안 좋은 거예요. 새벽까지 촬영하고 포스터까지 찍는다니 화가 난 거죠. 그런데 그게 오히려 좋았어요. 대형 카메라라서 많이도 못 찍으니 빨리 찍고 쉬실 수 있도록 할게요 대신 렌즈만 똑바로 봐주세요, 하고 일곱여덟 컷 정도 찍었어요. 분장할 때 거즈 같은 걸 붙이는데 그게 떨어졌는데도 새벽에 그거 고치고 와달라는 말을 못해서 그대로 찍었어요. 당시 리터치 비용이 상당해서 지우지도 못했고. 조명이나 느낌은 내가 찍은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들게 나왔어요. 다 찍고 나서도 문제인 게, 사진이 좋다는 건 인정해도 영화가 너무 예술영화 같고 무서워 보여서 쓰지 말자는 의견이 있어서 무지 싸웠어요. 결국 영문판만 하는 걸로 타협해서, 디자이너도 영문판 한다고 부담이 없었는지 되게 크리에이티브 하게 잘 소화해서 결과물도 아주 훌륭했어요. 해외에서 반응이 좋아 국내판에도 그 사진을 쓰게 됐죠.

<닥터 봉>

<닥터 봉>(1995)은 <영원한 제국>이랑은 분위기가 전혀 딴판인 코미디인데 이것도 포스터는 얼굴 중심이에요.

<영원한 제국> 같은 작품성 있는 포스터를 하고 나니 이왕 이 길로 나선 김에 할리우드 포스터만큼이나 단순하지만 재미있게 기획영화 포스터를 찍어보고 싶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심재명 씨를 통해 <닥터 봉> 제안이 들어왔어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심재명 씨가 의식있고 진지한 기획자면서 흥행에도 굉장히 민감했어요. 영국의 ‘워킹 타이틀’처럼 품격 있는 로맨틱 코미디를 원했던 것 같아요. 사실 내가 카메라 앞에서 배우들 편하게 못 대해줘요. 너스레도 떨고 쇼맨십도 있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이게 나한테 챌린지였지. 당시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 포스터가 흰 배경을 걸고 많이 찍었어요. 한석규 씨를 휴 그랜트처럼 찍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서 조명을 진짜 잘해야겠다 하고 생각했죠. 근데 실상 그러지 못했던 게 그런 조명을 하려면 아주 큰 스튜디오가 필요해요. 흰 배경이라고 그냥 흰색 하나 놓고 툭 찍는 게 아니라 깊이감이 엄청나야 해요. 내 계획대로라면 20m 이상의 깊이가 있는 흰 배경이 필요한데 당시 상황에서 그걸 렌탈 할 수가 없어서 작은 조명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죠. 재미는 있었지만 나한텐 아주 어려운 작업이었어요.

<테러리스트>

최민수 씨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 된 <테러리스트>(1995)는 스틸을 사용했나봐요.

포스터 전체가 최민수 씨 얼굴로만 끝날 정도로 크게 찍은 게 있었어요. 정말 좋아하는 얼굴이었는데 영화사에서 안 썼죠. 너무 단순하니까 재미없어 보일 거라고 생각했나봐요. 그리고 그 스틸을 썼죠. 그때 찍었던 필름을 안 돌려줘서 저도 원본이 없어요. 재미있는 건 <테러리스트>를 찍으러 구리에 있는 폐공장에 갔다가 엑스트라 한 분을 만났는데, 제 개인 작업인 <아줌마> 시리즈 대표작 ‘진주 목걸이를 한 아줌마’의 그 분이에요. 말투부터 아줌마의 전형이라, 제가 중년 여성분들을 찍고 싶은데 원하는 얼굴을 찾기 힘들다 근데 너무 제가 원하는 아줌마의 느낌이다 했더니, 나같은 아줌마들 많으니 우리 밥집에 와요 하시는 거예요. 그때 아줌마를 롤플레이 할 수 있는 전문 배역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전에는 거리에서 실제 중년 여성분들을 하나하나 찾다가 카메라 앞에 서본 경험이 있는 분들을 섭외해서 인상 사진을 찍기 시작했죠. 진주 목걸이를 한 아줌마부터 싸움 잘하게 생긴 아줌마, 눈썹문신 한 아줌마, 화장이 너무 짙은 아줌마, 남자 같은 아줌마 등 다 그때 만났어요. 평소 하던 그대로 오시라고 아무리 말해도 엄청 멋을 내고 오세요. 만날 집에만 있다가 어디 잔칫집이나 결혼식 갈 때 차려 입는 느낌으로. 근데 그게 내가 정확히 원하는 것이었어요.

<아줌마> 연작 중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작품이긴 하지만 <헤어드레서>(1995) 포스터도 재미있었어요.

마틴 스코세이지 자서전에 영화 찍기 전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데 그건 무조건 찍는다는 대목이 있어요. 나도 그래요. 시나리오를 쭉 읽고 그때까지 나온 스틸을 쭉 보면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어요. <헤어드레서>는 처음부터 이건 실루엣이다 했어요. 인물이 포니테일을 했고 가위를 들고 있는 동작이면 충분하지 하고 실루엣만 찍었는데, 조건이 배우가 안성기 선생님인지는 알았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래서 얼굴이 드라마틱 하게 보이도록 열심히 찍었어요. 포스터 속 사진보다 더 잘 나온 게 있었는데 그것도 결국 안 썼어요. 10억이든 20억이든 대형 예산을 들여서 무엇이 흥행을 결정할지 모르는데 내가 작가주의만 고집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까 화가 나도 자제했죠.

<헤어드레서>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소재로 한 <꽃잎>(1996)은 역사적인 무게가 커서 작업하는 과정도 남달랐을 거 같아요.

<꽃잎>은 아무리 흥행을 고려한대도 영화의 역사적인 배경을 가볍게 넘어갈 수 없으니 나를 찾았던 거 같아요. 예술영화처럼 진지하게 찍어도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된대요. 결론적으로 <영원한 제국> 이후에 가장 내 마음에 드는 포스터가 나왔어요. 서정적이면서도 역사적인 모티브가 하나도 빠짐 없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것도 처음엔 안 쓴다는 거예요. 흑백인 데다가 신인이었던 이정현 얼굴 하나로는 힘들다는 거지. 그래서 암실에서 이만하게 포스터 사이즈로 인화해서 내가 원하는 위치에다가 ‘a petal’이라고 직접 써서 영문판이라도 해보자고 프로듀서를 설득했어요. 처음엔 싸늘한 흑백 톤이었는데 아무리 해외판이라도 너무 처절해 보인대서 핑크빛이 도는 앰버 톤으로 맞췄고. 결국 <꽃잎>이 영화 포스터 작업을 계속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됐어요.

<꽃잎>

<꽃잎> 촬영장에서 개인 작업 <광주 이야기>도 만드셨어요.

<테러리스트>를 하다가 아줌마를 만났듯, <꽃잎>의 금남로 시위 장면 촬영 현장에서 <광주 이야기> 시리즈를 찍었어요. 당시 실제 광주 시민 3천 명 정도가 집결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현장에 모였어요. 일반 광주 시민만 있었던 게 아니라 진짜 시위를 하기 위해 모인 시민 단체, 그걸 통제하려는 군인과 경찰, 그리고 군인과 경찰 등을 연기하는 엑스트라까지 다 한 곳에 있었던 거죠. 촬영 초반엔 정리가 잘됐는데 중간에 밥 먹고 나니까 그 인원들이 다 뒤섞여버렸는데 그 광경이 너무 재미있는 거에요. 어떤 아저씨들은 막 낄낄거리면서 촬영 장면 보고 있다가도 내가 카메라만 들이대면 민주화 투사처럼 굴어요. 내가 웃어봐요 해도 이런 거룩한 영화를 찍는데 웃으면 되나! 하는 거지. 내가 연기를 시킨 것도 아닌데. 모든 게 다 진실은 아니구나, 그때 다큐멘터리의 아이러니를 느꼈어요. <광주 이야기>는 <아줌마> 이전까지 내가 거리에서 찍은 마지막 다큐멘터리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데 외국 평론가들이 되게 흥미롭게 생각해서 해외에서 전시도 많이 했어요.

<코르셋>

1996년엔 심재명 씨의 명필름 창립작인 <코르셋> 찍었어요. 이전부터 합이 잘 맞으셨으니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입니다.

<코르셋>은 딱 두 가지가 떠올라요. 먼저, 배우 이혜은 씨. 체중을 일부러 늘리면서까지 영화를 위해 모든 걸 다 쏟아붓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르누아르 그림처럼 풍만하지만 아름다운 몸으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폴라로이드 필름을 이용해서 회화적인 느낌을 줘서 찍은 게 있는데, 그냥 쌩 사진을 썼어요. 그건 아직도 따로 발표하고 싶어요. 또 하나 기억나는 건 타이포그래피. 최정화 작가가 <코르셋> 아트디렉터를 했는데, 포스터 만들 때 제목 corset을 ‘콜셋’ 두 글자로 하느냐, 그냥 ‘코르셋’으로 하느냐, 받침에 티긑을 써서 ‘코르셑’으로 하느냐, 이슈가 됐어요. 받침 셰이프 하나가 갖는 시각적인 뉘앙스가 포스터 안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느냐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경험이었죠.

필모그래피에 1997년이 비어 있는 이유가 있을까요?

95년과 97년 사이가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영화 작업은 항상 부속품처럼 생각했고 재미도 있었으니 큰 의미를 두진 않았어요. 예술사진 작가로서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계기가 없어서 그 즈음 이민을 갈까 했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미술관에서 사진을 예술로 받아들이지도 않을 때고 사진 전문 갤러리라고는 한마당, 후지 포토살롱, 코닥 포토살롱 외에는 없었으니까. 97년은 <아줌마>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1995년엔 영화 작업은 하면서도 내 개인 작업은 슬로우 한 상태였는 지금 전시하고 있는 아트선재의 김선정 디렉터가 단체전 <싹>을 기획하면서 <이태원 이야기> 시리즈를 보여주자고 제의가 들어왔어요. 당시엔 굴지의 미술관에서 이불이나 최정화 같은 유명 작가가 참여한 그룹전에 노바디였던 젊은 사진가한테 같이하자고 하는 건 훌륭한 기회였어요. 전시 반응도 좋아서 그때 기운이 나서 이민 갈 생각을 접고 <아줌마> 시리즈에 아이디어도 떠올라서 1997년은 <아줌마> 작업을 되게 열심히 했던 시기라 영화 작업은 거의 안 했을 수 있어요. 그리고 <아줌마> 전시가 1999년 3월에 아트선재에서 열리면서 영화 작업과 개인 예술 작업도 활발히 병행하는 분기점이 됐죠.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1998년은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연풍연가> 등이 있어요.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하면서는 나는 진짜 코미디 영화는 못하는구나 깨달았어요. 일단 내가 배우들을 촬영장에서 재미있게 못해줘. 내 스튜디오에서 찍었는데 고소영 씨가 “선생님은 왜 촬영하면서 음악을 안 틀어줘요” 그러는 거예요. 난 오히려 음악이 있으면 방해나 되니까 끄고 집중하자 이런 생각이었으니, 완전히 내 위주였던 거지. 내가 그 정도로 센스가 없었어요. <연풍연가>는 내가 찍고도 한참 볼 정도로 너무 좋아하는 사진이 있어요. 나도 아름다운 걸 찍을 줄 아는구나 생각했지. 무엇보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되게 행복해 했어요. <접속> 때 만났던 장윤현 감독이 제작을 맡았는데 나한테 너무 서포트를 잘해줘서 작업 환경이 되게 좋았어요.영화 테이크가 진행되는 도중에도 사진 찍어야 하니 우리가 조금 양해를 해 줍시다 해서 길지도 않은 노을 시간에 영화 촬영을 멈추고 내가 사진 찍을 수 있게 해줘서 너무 고마웠지. 지금도 그 사진만 보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연풍연가>

<조용한 가족>

<조용한 가족> 같은 경우도 선생님 작품 중에서도 언급이 많은 작품 중 하나죠.

<조용한 가족> 할 때 아마 티저 포스터 개념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거예요. 티저는 아무래도 나한테 권한을 많이 줬어요. 메인에 들어가면 나를 배제시켰지만. (웃음) 배우들이 워낙 훌륭해서 표정만 봐도 주변에다가 이상한 거 안 집어넣어도 충분히 재미있겠다 싶어서 기념사진처럼 찍자고 정했어요. 구도는 단순해도 조명은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완성도 있는 조명을 써서 중량감 있는 피부 톤을 나오게 하고 싶어서 촬영 전에 테스트를 많이 하고 찍는 건 짧고 재미있게 했어요.

원래 난 사진관에서 찍듯 직립 자세로 찍으려고 했는데, 심재명 씨가 내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아도 조심스럽게 “조용한 가족이니까 다 같이 한번 이렇게 해보는 거 어때요” 하면서 쉿 하는 자세를 시켰어요. 심재명 대표는 <세상 밖으로> 할 때부터 내가 뭔가 점잖게 찍으면, 그 다음에 살짝 그걸 뒤트는 시도를 했는데, 그게 중요하게 작용했어요. <조용한 가족>도 가만히 서 있는 포즈였으면 재미없었을 거예요. 나중에 <그때 그사람들>(2005) 할 때도 원래 한석규 씨가 풍선껌 부는 건 없었거든. 근데 그것도 심재명 씨가 풍선껌 한번 불어보면 어떠냐고 해서 들어가게 된 거예요.

<그때 그사람들>

<그때 그사람들> 포스터에서 배우 이미지를 그림처럼 한 건 누구의 아이디어였나요?

디자이너 김상만 씨의 아이디어였어요. 원래 사진 자체는 무겁게 나왔는데 그 톤을 적절히 맞춘 게 너무 마음에 들었어. 포스터 하면서 김상만 씨를 만난 게 나한테는 대단한 행운이었죠. 사진이 갖고 있는 톤이나 스토리텔링을 너무 잘 이해해서 뭔가 딱 던져주면 금방 그것보다 더 나은 걸 내놓을 정도로 뛰어났어요.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이 진짜 천재야.

<텔 미 썸딩>

저는 개인적으로 장윤현 감독의 <텔 미 썸딩>(1998) 포스터가 인상깊었어요. 구도나 이미지 질감이나 평소 시도하지 않던 걸 하셨죠.

그 사진도 사실 거의 못 쓸 뻔했어요. 어떤 프로듀서가 그 사진을 얼마나 싫어했냐면 한석규 씨가 비 맞은 생쥐처럼 보인다고 했어요. (웃음) <텔 미 썸딩>은 내가 한강 고수부지에서 발견한 데서 찍었어요. <실미도>(2003)도 그렇고, 야외 촬영은 대부분 거기서 찍었어요. 한 20m 정도 시멘트로만 이뤄진 벽인데, 터널 옆에 있어서 공간이 기하학적이에요. 주변에 사람도 안 다녔고. <텔 미 썸딩>도 뒤 배경이 거의 날아갔는데, 땀 뻘뻘 흘리면서 거기를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찍어서 제일 영화답게 나온 걸 썼어요. 나도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예요. <텔 미 썸딩>도 인물 초상처럼 찍다가 신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영화랑 안 맞아서 그런 시도를 했어요. 영화적인 내추럴함, 일반적인 자연스러움이 아닌, 스릴러 영화 특유의 리얼리티가 잘 잡혔어요.

<반칙왕>

2000년엔 아무대로 <반칙왕>을 빼놓을 수 없겠죠. 명필름과 함께 작가님과 여러 작품을 같이 한 영화사 봄과 처음 만든 포스터입니다.

오정완 대표가 예전에 신씨네 있었을 때 이재용 감독하고 나하고 최정화 작가 등 해서 <한도시 이야기> 라고, 1994년 6월 9일 서울 시민의 하루를 담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어요. 이재용 감독이 <호모 비디오쿠스>(1991) 내놓고서 장편 데뷔작 들어가기 전에 감독이 워낙 독특하니까 신씨네가 용감하게 그런 프로젝트를 하게 해준 거죠. 한국의 별별 사진가랑 미술 작가 다 모였어요. 근데 그게 결국은 개봉을 못했지.

아무튼 그때부터 오정완 대표랑은 연이 있었어요. 김지운 감독은 <조용한 가족> 같이 했었고. 송강호 씨 목 졸리는 거랑 레슬링 대회 전단지 같은 거 두 개가 쓰였잖아요. 목졸림 당하는 송강호 씨 사진을 내가 너무 좋아했는데, 모 프로듀서가 무슨 중국집 포스터 같으니 쓰지 말라고 해서 제동이 걸리기도 했어요. 레슬링 포스터도 쉬운 것 같지만 거기 나오는 배우들을 전부 하나하나 찍었어요. 싼티 나는 포스터처럼 보여야 하니까 조명도 일부러 후지게 쓰고. 보통 나는 코믹한 건 잘 못하는데 아이디어랑 잘 일치돼서 재미있게 했어요.

<반칙왕>

<공공의 적>

2001년과 2002년 사이엔 <공공의 적>과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작업하셨어요. <공공의 적>은 희대의 캐릭터 강철중이 나오는 영화인데, 오히려 포스터의 그의 존재는 너무 작아 보여요.

원래는 설경구 씨가 펀치를 날리는 게 있었는데 그것도 쓰이질 않았어요. 세게 찍었어도 안 쓰면 도리가 없지. 포스터 둘 중엔 원화 버전이 더 마음에 들긴 해요. 이태원역 처음 만들어졌을 때 찍은 거예요. 그 당시엔 강우석 감독님하고도 잘 몰랐고, 포스터 디자이너도 처음 일해보는 사람이어서, 내가 원하는 사진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안 됐어요.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찍은 게 많은데 메인이 된 건 사람들이 걸어가고 뒤돌아보는 버전이예요. 이 좋은 영화에 내가 큰 역할을 못했구나 싶어서 미안했는데, 임순례 감독이 그 포스터를 아주 좋아했다고 해서 행복했어요. 제 첫 영화인 <세상 밖으로>의 조감독이셔서 그때 처음 뵀는데 정말 겸손하고 착한 분이었어요.

<와이키키 브라더스>

<바람난 가족>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2003년은 흔히 한국영화 최고 전성기로 불립니다. 그래서인지 이 해 작업량이 압도적으로 많아요. 전에는 많이 해봐야 5개 정도였는데, <바람난 가족> <장화, 홍련>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등 여덟 작품에 달해요.

내가 뭘 열심히 하겠다는 의지보다는 영화계에서 슬슬 저 사람 괜찮네? 하는 게 있었을 거예요.

김지운 감독과의 세 번째 협업작인 <장화, 홍련>도 워낙 인기가 많죠. 다리에 흐르는 피나 염정아 씨의 미묘한 표정 같은 건 다 작가님의 연출인가요?

영화 포스터 찍고 제작사한테 보너스 받아 보긴 처음이었어요.가족 사진으로 찍는 아이디어는 당시 영화사 봄 마케팅팀애서 같이 회의 하면서 나온 거예요. 톤앤매너나 표정 디렉션은 내가 다 했어요. 그것도 대형카메라로 찍었는데, 처음부터 그럴 계획은 아니었어요. 찍으면서 이 배우들 조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특히 염정아 씨가 너무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조용한 가족> 찍을 때처럼 배우들 자체의 아우라가 대단하니 난 가만히 그것만 잘 남겨놔도 된다, 이들을 만난 게 행운이다 싶었어요. 소품으로 온 의지까지 마음에 들었어요. 가격이 굉장히 비싸니 피 한방울도 묻으면 안 된대서 엄청 조심스럽게 다뤄야 하긴 했지만. (웃음) 그저 카메라만 직시하고 있는 거야 말로 완전 내 스타일인데, 그건 배우들이 진짜 강단 있어야 해요. 지나치게 눈에 힘을 주면 인위적이고 또 너무 힘을 빼면 재미가 없으니 과하게 연기하지 않으면서 캐릭터를 유지하는 걸 눈빛만으로 전달을 해야 하는 건데 <조용한 가족>도 <장화, 홍련>도 배우들이 훌륭했어요.

<장화, 홍련>

사실 사람들은 대형 카메라로 찍은 작품을 보면 더 공들여 찍었다는 느낌을 받잖아요. 대형 카메라를 가지고 찍은 영화와 그렇게 안 찍는 영화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개인적인 입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죠. 내가 대형 카메라를 아무리 쓴들 인쇄 환경이 안 좋으면 아무런 발휘가 안 돼요. <조용한 가족> 찍을 즈음부터 인쇄 환경이 월등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티저 개념도 나오기 시작했고, 포스터에 공들이면 흥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이 커질 때고. 영화 작업뿐만 아니라 내 개인 작업에도 대형 카메라를 많이 써요. 소형이나 중형까지는 리듬을 갖고 찍어요. 배우하고 같이 감정의 리듬을 갖고 가요. 대형 카메라의 장점이자 단점은 초점을 맞추고 움직이지 말라고 말하고도 길게는 30초도 넘게 걸려요. 거기서 어색함이 등장을 해요. 배우가 처음 감정을 잡았다가 처음에는 딱 각 잡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절묘하게 시선의 힘이 자연스러워진달까, 그런 순간이 딱 걸릴 때가 있어요.

대형 카메라의 극명한 퀄리티도 퀄리티인데, 그 묘한 어색함에서 나오는 긴장이 너무 좋은 거야. <영원한 제국>의 안성기 선배를 찍을 때도 그 분이 화가 나서 카메라를 보고 있어도 바로 안 찍히니까 그동안 그 화가 약간 중화되면서 묘한 지점이 나온단 말이에요. <장화, 홍련>도 그래요. 바로 찍었어야 하는데 묘하게 인터벌이 생기면서 염정아 씨 표정이 정말 잘 잡혔어요. 워크숍 하면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 중 하나가 어떻게 긴장감이나 어색함이 자연스럽게 나오느냐는 건데, 내가 아니라 카메라가 하는 것이라고 대답해요.

<주홍글씨>

2004년도 많은 작품을 했지만 <주홍글씨>의 임팩트가 가장 강렬했던 거 같아요.

한석규 씨 힘이 크죠. <주홍글씨> 때가 석규 씨한테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어요. 보통 포스터 촬영하고 나면 지치니까 금방 가거든요. 그때는 석규 씨가 남아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자기 고민에 대해서 얘기했던 기억이 나요. 선명한 악이 아니라 내재된 이중적인 악이랄까 그런 걸 끌어내려고 똑같은 장면만 필름 네다섯 롤을 쓸 정도로 무진 노력을 했어요. <텔미 썸딩> 때도 그렇고 딱 한 컷의 눈빛이 절묘했지. 사진 자체는 조금 너무 어둡게 나왔는데 김상만 디자이너가 두 사람을 회화적으로 처리를 잘해서 완성도 있게 나왔어요.

<해피엔드>(1999) 찍을 때만 해도 당시 사회적으로 원조교제니 뭐니 성적인 문란함 같은 게 이슈가 되는 시기였거든. 그래서 바람난 관계에 대해서도 죄의식이 보여지는 식으로 찍었어요. 전도연 씨한테도 고립되어 있는 불안함 같은 걸 요구했어요. <주홍글씨>는 시나리오도 그렇고, 나 바람 펴 근데 어때서? 이런 느낌이었거든. 그래서 배우들 다 모인 포스터는 모두 당당하게 보여요. 결국 안 쓰인 사진 중 하나가 두 사람이 붉은 색 소파 위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누가 갑자기 방에 들어오니 화내듯이 바라보는 게 있어요. 그게 정말 좋았는데 못 쓰게 돼서 많이 아쉬웠지.

<주홍글씨>

저는 2005년 작품들이 상업적으로나 미적으로 굉장히 안정적으로 느껴져요.

포스터에 대한 인식이 되게 좋을 때고 외적으로도 인정을 받아서 지원도 넉넉했던 때라 하고 싶은 걸 많이 시도해볼 수 있었어요. 그해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청연>이에요. 잊지 못할 작업 중 하나예요. 포스터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팀어서 한국은 물론 중국과 미국에 가서도 포스터를 찍었어요. 작업물 만큼이나 그 과정이 재미있었어요. 우선 두 배우 너무 좋은 사람들이에요. 작업하면서 창의적인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지만 사람 자체가 좋으면 찍는 내내 마음도 편하거든요.

<연풍연가> 이후에 노을을 배경으로 한 사진은 오랜만이었는데, 그 비행기 샷은 나도 굉장히 마음에 들어해요. 어린왕자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게 떠올라서 장진영 씨가 노을을 배경으로 비행기 날개 위에 서서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걸 실루엣으로 찍으면 정말 아름답겠다 싶어서 미국까지 쫓아갔어요. 근데 그 비행기가 보험가만 200만 불에 동체가 전부 헝겊이었어요. 그래서 주인은 그 위에 서서 올라가는 건 말도 안 된다 무조건 반대했죠. 한 시간 설득 끝에 홍보팀 누군가가 주변에서 박스 짚는 카트를 발견해서 스틸 프레임이 있는 유일한 자리에만 앉는 걸 허락해주겠다는 조건에 찍을 수 있게 됐어요.

또 문제는 황혼이었어요. 그 날 촬영이 오후 4시쯤 끝나서 비행기 위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황혼이 안 오는 거야. 그래서 거기에 한 2시간 앉아 있는 동안 나도 미안하니까 장진영 씨와 계속 얘기를 했어요. 그냥 살아가는 얘기 했던 거 같아요. 그렇게 기다리면서 장진영 씨도 그 무드에 젖더라고. 가까이 찍은 것도 좋은 거 많은데, 그 실루엣이 너무 좋아서 결국 그 샷을 쓰게 됐어요.

<청연>

감히 쓴소리를 하자면 2006년부터는 작업의 밀도가 급격히 떨어져요. 특히 전년도가 워낙 안정적이라 더 그렇게 느껴진달까요.

아쉽죠. 변명을 좀 하자면, 재미없어지기 시작했어요. (저도 그게 너무 느껴져서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포스터 작업이 아주 큰 돈을 주는 것도 아니라 나도 내 작품을 한다는 모티베이션이 제일 크거든요. 그 즈음부터 배급사가 나서기 시작을 했나? 예를 들어 <친절한 금자씨> 같은 경우는 두세 번 포스터 미팅을 따로 하고 준비하면서 작품 하는 맛이 났어요. 내가 이 영화에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했죠. 근데 그런 경우가 점점 줄어들고, 20대 초반에 나도 모르는 어떤 기획사 직원이 와서 영화 자체보다는 마케팅 측면에서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 하청받은 느낌이니까, 그 즈음부터 이제 좀 그만 해야 되겠다 싶었어요. 어떤 포스터는 내가 찍지도 않은 게 나간 것도 있어요. 별별 이야기가 많아요.

<화장> <헤어질 결심>

2008년 이후 작년 <헤어질 결심>까지, 명필름 작품인 <파주>(2009) <화장>(2015) <7호실>(2017)이 전부예요.

사실 <헤어질 결심>까지 노코멘트 하고 싶어요. <화장>까지는 굉장한 공명심으로 달려 들었어요. 심재명 씨의 명필름에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고, 창립 20주년 작품이고, 안성기 선배님 주연인 데다가 임권택 감독님의 102번째 영화니까. 원작소설도 워낙 흥미롭게 읽었어요. 단 하루 촬영이었지만 마음에 들게 작업했고 결과물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헤어질 결심>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영화니까 나중에 얘기할게요. 정말 B컷이 많아요. 지금도 한창 해외에서도 상영되고 있는 영화니까 나중에 혹시 인터뷰 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 가서 이야기 하고 싶어요.

<공동경비구역 JSA>

그럼 시간을 좀 돌려볼까요. 박찬욱 감독과는 <공동경비구역 JSA>(2000)부터 이후 <친절한 금자씨>(2005)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도 같이 하셨는데, 두 분의 협업은 아무래도 박찬욱 감독의 의지가 있었던 건가요?

<공동경비구역 JSA> 포스터가 나름 완성도 있게 나와서 박찬욱 감독도 좋아했던 거 같아요. 다만 한 번도 박찬욱 감독의 개인적인 의뢰로 작업했던 적은 없었던 거 같아요. 심재명 대표나 김상만 디자이너 추천으로 한 적은 있어도. <친절한 금자씨> 때 박찬욱 감독이 포스터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고 느꼈어요. 사진적인 식견도 대단하고. 그래서 항상 일할 때 보람을 느꼈어요. <친절한 금자씨>는 이야기 자체가 워낙 재미있고 이영애 씨의 변신도 있으니까 나한테도 챌린지 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았어요. 사전 미팅은 보통 제작자나 마케터 하고만 그땐 박찬욱 감독이랑 했어요. 티저랑 메인에 대한 얘기를 좀 하자, 그리고 레퍼런스를 가져오자 하고 만났죠. 그날 박찬욱 감독은 낸 골딘(Nan Goldin)의 다큐멘터리 사진집 <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를, 나는 디자이너와 사진 작가 듀오인 피에르 엣 질(Pierre et Gilles)의 작은 사진집을 가져갔어요. 그래서 티저는 피에르 앳 질처럼 찍고, 메인은 낸 골딘처럼 나가자는 결론을 냈어요.

티저 포스터는 스테인 글라스를 배경으로 해서 완벽하게 연출됐는데, 조명조차도 기존의 사진 조명이 아닌 영화 조명을 인위적으로 사용했고, 김상만 감독이 피부 톤 같은 걸 피에르 엣 질처럼 매만졌어요. 티저 찍을 때 경비가 많이 들었어요. 완벽한 미장센을 만들기 위해서 스테인 글라스도 한 거의 한 800여만 원을 들여서 제작하고. 그게 버전이 다른 배경에 다른 태도로 굉장히 많았어요. 모두 마음에 들어해서 저는 행복하게 헤어졌어요.

그러고 나중에 마케팅 팀장이 연락이 왔는데 거의 우는 목소리로 이걸 못 쓸 거 같다는 거예요. 당시 포스터가 나오면 여럿한테 모니터링을 여러명한테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그 파일을 노출시킨 거야. 그래서 그것들을 써야할지 말아야 할지 논의가 오고 갔는데 바로 다음날 너무 해피 해서 또 연락이 온 거야. 이게 인터넷 상에서 투표를 받았는데 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뭐가 나가도 된다는 거예요. 저도 인구에 회자하는 게 나왔으니 해피 했죠. 메인은 날 것처럼 찍는 아이디어가 진행되던 와중에 TV 뉴스에 물방울 무늬 원피스 입은 촬영현장이 나갔어요. 근데 그게 또 퍼져서 반응이 대단한 거예요. 근데 그 원피스는 날것 같은 느낌이 아니잖아. 날것 같은 거 찍어놓았는데, 결국 그 물방울 원피스가 너무 인상적이다 해서 그게 메인 포스터로 나가게 됐어요.

<친절한 금자씨> 티저 포스터와 메인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번 전시 <왼쪽 얼굴>에 대해서 이야기 해볼까요. 예전에 진행한 전시 소개글에 “나는 사람의 얼굴이 항상 아주 구체적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여겨 왔다. 그래서 사진을 만들면 마치 항해 지도를 보듯이 얼굴이라는 풍경 속에 담긴 작은 섬들을 찾곤 한다”라는 코멘트를 쓰셨어요. 근데 이번 전시는 그 이야기가 안 느껴지는 얼굴들만 모아 놓았다고 언급하셨어요. 이번 작품들 역시 ‘불안초상’의 연장선에 있긴 한데, 이전에는 피사체가 불안의 주체였다면, 이번 전시 속 사진의 불안은 작가 본인의 것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2006년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때 내가 봤던 불안은 일상적이면서 고립돼 있고 외로운, 얕지만 확연한 레이어가 드러나는 불안이었어요. 글에는 일상적이고 소소한 불안이라고 썼지만. 이번에 보여주고 있는 작업들은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코로나 전까지 촬영한 거예요. 예전에는 누가 봐도 꽂히는 구심적인 불안을 다뤘다고 한다면, 지금 전시하는 건 원심적으로 흐물흐물 퍼지는 불안이에요. 불안의 단상들이 명료하지 않아서 더 불안하다는 거예요.

<살인의 추억>이나 <조디악> 같은 영화 보면 범인의 얼굴이 모호하잖아요. 불안의 레이어가 잘 안 보이는 얼굴들이 많이 나타난다는 건 불안의 유형이 잠재의식화 되는 사회가 됐다는 얘기예요. 옛날에는 불안을 보는 게 쉬웠어요. 사회가 순진할수록 감정의 레이어가 확연해요. 지금은 찍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요즘 사람들은 워낙 뭘 숨기거나 지우는 데 능해요. 불안한 레이어조차도 지워버린 얼굴들이 지금 세상에 많고, 그게 나를 불안하게 해요. 사람이 분명 지도처럼 구체적인 얼굴을 갖고 있었는데 그 구체성 자체가 모호해지기 시작을 했기 때문에 내 작업도 모호한 초상이 될 수밖에 없죠. 지금 초상이 더 무서워요.

<아줌마>나 <소녀 연기> 작업할 때만 해도 유형을 잡는 게 너무 쉬웠어요. 한국은 그만큼 전형화 돼 있었기 때문에. TTL 소녀 나올 때도 신비하고 모호하다고 했지만 실은 그것조차도 전형적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유형학적 접근 방법을 이용해서 인물의 초상을 담기에 너무 좋았어요. 물론 유형이 사라지는 게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요. 어떤 유형에 안착해서 그걸 보여줌으로써 안도하기보다는 누구처럼 보여야 한다는 걸 무시하니까 좋은 세상이 온 건데, 동시에 감정의 레이어도 같이 사라지고 있는 거예요. 유형이 없어져서 좋긴 한데 그래서 더 위험한 사회가 돼가고 있다고 느껴요.

전시장을 젊은이들의 사진으로만 채운 이유가 있을까요?

전시에 맞춰 나온 사진집에는 아저씨도 있긴 해요. 이번 프로젝트 하면서 내가 찍은 사람들 중에는 6살 12살 짜리 애들도 많아요. 젊은이들만 채워야겠다는 의도는 없었는데 전시는 그렇게 모이긴 했어요. 인상에서 나오는 그런 레이어가 잘 안 보이는 사람들 위주로만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된 거 같아요. ‘하필’이라는 말이 더 맞을 수도 있겠네요.

전시 설치 하는 데에 주안점이 있었다면.

<소녀들의 화장법> 전시 할 때까지는 유형학적 접근 방법을 많이 썼기 때문에 그런 유형의 엄밀함이 느껴져야 했어요. 사진 크기도 똑같고 간격도 일정하고 조명도 일정하게, 도감식으로 나열하면 효과가 크거든요. 도감에서 비둘기는 웃고 까마귀는 울고 그러지 않고, 크기나 비례가 일정하잖아요. 근데 이번 작업은 그런 유형이 아니라 개별적인 초상으로 다가갔으면 했어요.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읽히기를 원했기 때문에 간격도 많이 떨어트렸어요. 전시 글에서도 평론가가 ‘구멍난 유형학’이라고 쓰셨거든요. 지난 20년 동안 계속 그쪽 접근 방법을 유지하다가 드디어 자신이 이제 구멍을 내서 거기서 남겨진 삐져나온 사진들을 갖고 전시를 한다고 썼어요. 맞아요. 지금은 유형화 시키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같은 사람의 얼굴 둘을 옆으로 나란히 놓는다거나 얼굴 없이 몸만 찍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고 봐도 될까요?

그건 아니에요. 반복 되는 사진은 예전부터 구사해 오던 것 중 하나인데, 불안 초상이기도 하지만 초상의 해석이기도 해요. 아주 쉽게 얘기하면 아우라 깨기 같은 거예요. 초상은 대부분 싱글로 찍잖아요. 그 인물이 갖고 있는 내면이나 아우라를 드러낸다고 많이들 얘기하거드. 근데 나는 옛날부터 아우라와 내면에 대해서 반기를 많이 든 사람이에요. 어차피 내면도 사람이 상상하는 거지, 그리고 아우라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지위나 백그라운드에서 우러나올 뿐이지, 그걸 어떻게 사진 작가가 끌어냈다고 얘기를 하느냐 말했어요. 한자를 이용한 기호학을 보면 구체적인 게 반복이 되면 추상이 나온다는 얘기가 있어요. 밝을 명자를 봅시다. 날 일에 달 월이 들어가잖아요. 태양과 달은 구체적인데 둘이 만나면 밝다 라는 추상이 돼요. 좋을 호자도 그래요. 여자라는 구체와 남자라는 구체가 만나면 좋다는 추상이 되죠. 구체적인 사람의 모습이 두 번 반복되면 사진 한 장에 있을 때 있던 아우라가 깨져버리거든. 그 중 하나가 이번 전시에 포함된 거예요.

‘몰괜(Molgwan)’

지금은 <파친코>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김민하 배우는 어땠나요?촬영하던 당시와 <파친코> 속 선자의 모습이 많이 다르지 않을 것 같아요.

묘하게도 똑같아. 그게 놀라워요. 확실히 배우는 아우라가 있다고 느끼는 게 찍으면서도 이 사람은 뭔가 좀 다르다 딱 휘어 잡는 사람이 온 거예요. 사실 그때 직업을 물어봤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분명 배우였다는 기억은 없어요. <파친코>에서도 젊은 선자의 표정이 있거든. 그거랑 똑같아요. 아우라를 믿지는 않는데 그 친구야말로 진짜 아우라가 있었어요. 사필귀정이란 말이 떠올라요.

‘민하(Minha)’

촬영하고 나서 나중에 다시 본 분들도 있겠죠. 그들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기도 할 텐데요.

전시장에 들어오면 오른쪽에 혼자 걸려 있는 파란 배경의 사진이 있는데 저는 그걸 이번 전시의 메인이라고 생각해요. 그 친구가 찍을 때는 빈틈 하나 없는 단정한 아름다움이었는데, 전시 오프닝에 왔을 때는 완전 캐주얼한 사람으로 변했더라고요. 그게 좀 신기했어요. 차이가 되게 큰 사람들도 많아요. <소녀 연기>에 참여한 친구 중 한 명은 성인이 돼서 이번 <왼쪽 얼굴> 사진집에도 나와요. 완벽하게 다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어요.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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