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 같은 ‘걸크러쉬’ 캐릭터를 만날 때 가끔 삭발한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애석하게도, 상상 속 나는 <군도>의 ‘쌍칼 도치’ 하정우와 많이 닮아 있다. 그렇다. 완벽한 두상과 잘 조화된 이목구비를 가지지 않은 이상, 민머리, 속칭 빡빡머리, 웬만해선 어울리기 쉽지 않다. 하지만 민머리를 하고도 살아남은 자들이 있으니, 우리는 그들을 배우라 부른다.
하지만 ‘역시 배우는 다르구나!’라고 감탄이 나오는 것이 비단 그들이 머리를 밀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삭발’은 연기를 위해, 연기를 통해 표현된 하나의 양식이자 결과일 뿐, 찬사가 향해야 할 곳은 머리카락을 포기하면서까지 인물의 캐릭터와 의지를 표현해 내는 배우들의 연기 열정이다. 오늘은 캐릭터를 위해 삭발을 단행한, 연기 열정 불사른 배우들을 살펴보겠다. 머리를 민다는 것이 좀 더 어려운 결정일 수 있는 여자 배우를 중심으로 모아봤다.
<절해고도> 이연
배우 이연은 나이를 뛰어넘고 성별을 뒤집는다. 작품을 위해서는 파격적인 변신을 마다하지 않는다. 다수의 독립, 단편 영화에 참여하며,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오고 있는 배우 이연은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의 오늘-비전’ 섹션 부문에 선정된 영화 <절해고도>에서 인물의 결연한 의지를 리얼하게 전달하기 위해 과감히 삭발을 감행했다.
20대 때 청년조각가상을 받았던 40대 이혼남 윤철. 여느 예술가가 그렇듯, 그는 예술만으로 살아가지 못한다. 조각가지만 인테리어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딸 지나(이연)는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전처와 함께 살며 미대 입시를 준비한다. 하지만 지나는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문제아로 낙인찍히더니 급기야 출가를 하겠다고 알려 온다. 지나 문제에 속수무책으로 고민만 하고 있을 때 늦은 나이에 만난 애틋한 연인 영지(강경헌) 마저 떠나겠다고 통고한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의 외딴섬’, 절해고도. 삶의 표류와 고독, 혹은 미지를 담담한 자태로 그려내는 이 영화의 성찰적인 정서는 우리 모두 저마다의 인생의 무게를 떠안고 사는 고독한 단독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연은 <절해고도> 이후에도 다시 한 번 머리를 짧게 깎는다. 넷플릭스 <소년심판>에서 만 13세의 미성년자로 촉법소년 ‘백성우’를 연기하며 성별을 뒤집는 파격적인 역할을 맡은 것. 28살의 여성 배우가 중학생 소년의 앳된 얼굴을 한 채 자신이 살인사건의 가해자임을 자백하는 백성우를 연기한 것은 단번에 큰 화제를 모았다. 1화의 파격적 인물 설정은 <소년심판>의 흥행에도 한몫 제대로 했다.
그는 최근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출연을 확정지었다. 영화 <길복순>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제70회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섹션에 초청받았던 변성현 감독의 작품으로 전도연, 설경구의 캐스팅 소식이 전해지며 큰 기대를 모았다. ‘이연’,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 중 단연 으뜸이다.

- 절해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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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미영
출연
박종환, 이연, 강경헌
개봉
미개봉
<검은 사제들> 박소담
<기생충>으로 세계적인 배우가 되었지만, <검은 사제들> 당시만 해도 박소담은 25살의 신인배우였다.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박소담은 ‘검은 사제들’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촬영 당시 어려웠던 점은 머리를 미는 거였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오디션 때부터 삭발 공지가 있었는데, 마음속으로는 ‘설마 삭발을 하겠어?’라고 생각했다”라며 “감독님이 머리를 밀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캐릭터적으로 설명해 주셨는데 그래서 와닿았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용기있던 박소담의 선택은 옳았다. 캐릭터를 위해 긴 생머리를 싹둑 자르고 소름 끼치는 연기를 펼친 덕에 극의 공포도 극대화됐던 것. 박소담은 <검은 사제들>에서 교통사고 이후 악령이 들린 소녀 영신 역을 완벽히 소화해 수많은 시상식에서 신인연기상을 꿰찬 후 명실상부 ‘믿보배’로 부상했다.

- 검은 사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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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재현
출연
김윤석, 강동원
개봉
2015.11.05.
<사바하> 이재인
영화 <검은 사제들>로 박소담을 일약 스타로 만든 장재현 감독은 영화 <사바하>를 통해 또 한 번 무한한 가능성의 배우를 발굴했다. 배우 이재인은 <사바하>로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신인 연기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의 기대주로 떠오른다.
“감독님이 이 역할을 하려면 머리를 밀어야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한 10초 정도 고민하고 하겠다고 했다.” 대본이 너무 좋아서 작품을 꼭 하고 싶었기에, 머리를 밀고 눈썹까지 밀어야 하는 순간에도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이 어른스러운 발언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2004년생이다.
배우 이재인은 ‘사바하’에서 금화 역뿐만 아니라 쌍둥이 언니인 수상한 존재 ‘그것’까지 1인 2역을 맡아 연기하며 15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복합적인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한다. 이재인은 쌍둥이 동생 금화를 연기할 때는 순수하지만 어딘가 어두움이 존재하는 중학생의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쌍둥이 언니로 분할 땐 머리카락과 눈썹이 없는, 신비로우면서도 섬뜩한 모습으로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나이 15세.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김없이 민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의 과감한 도전으로 극의 오묘한 분위기가 배가되고 극은 더욱 풍성해졌다. 10대 후반임에도 현재까지 출연한 작품이 20편이 넘는 다작 배우 이재인. 작품의 풍성함에 더해 그가 맡은 배역의 다양함은 성인이 될 이재인의 다음 연기 여정을 기대하게 만든다.

-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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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장재현
출연
이정재, 박정민, 이재인, 유지태
개봉
2019.02.20.
‘삭발’이라는 키워드에 이들을 떠올렸다면.. 당신은 최소 40대!
‘삭발’ 하면 어쩔 수 없이 제일 먼저 원빈이 떠오르지만, 사실 ‘삭발 연기의 시초’는 고 강수연이다. 고 강수연은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 인간의 세속적 불안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불도에 귀의하는 여성의 삶을 그리며 삭발을 단행한다. “주인공이 비구니니까 당연히 삭발을 해야 했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라며 “다만, 촬영 이후 머리카락이 없어 6개월 정도 활동을 할 수 없었다”라고 당시의 고충을 털어놓기도 한 강수연. 그는 이 영화로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김정은은 신인 시절이던 역시 1998년 드라마 ‘해바라기’에서 사랑스럽지만 아픔이 있는 정신병동 입원 환자 역을 맡아 역시 머리를 삭발한 바 있다. 당시 공중파에서 여자 배우의 삭발은 굉장한 파격이라 많은 화제를 모았다.

- 아제 아제 바라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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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임권택
출연
강수연, 진영미
개봉
1989.03.03.

-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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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이진석
출연
안재욱, 김희선, 추상미, 한재석, 안정훈, 차태현, 김정은
방송
1998, MBC
삭발 투혼에는 국경이 없다. 할리우드 편
<브이 포 벤데타>에서 나탈리 포트먼은 파시스트 정부에 대응하기 위해 혁명에 나선 의문의 남자 ‘브이’와 손을 잡고 혁명의 전사로 태어나게 되는 강인한 여성 ‘아비’ 역을 맡았다. 극중 의문의 인물에게 끌려가 고문을 당하게 되는 장면에서 나탈리 포트먼은 탐스러운 긴 머리를 아낌없이 잘라 눈길을 끌었다.

- 브이 포 벤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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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제임스 맥티그
출연
나탈리 포트만, 휴고 위빙
개봉
2006.03.16.
2022.11.02. 재개봉
한국에 고 강수연이 있다면, 할리우드에는 데미 무어가 있다. 데미 무어는 삭발 연기로 변신을 꾀한 대표적 ‘삭발’의 아이콘이다. 데미 무어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지. 아이. 제인>을 통해 특전대 네이비 씰에 들어간 여군 제인으로 분한다. 삭발에 가깝게 머리를 밀고 군복과 군화를 착용한 제인은 ‘강한 여성의 전형’으로 아직도 많은 이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 지. 아이.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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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데미 무어
개봉
1997.10.18.
샤를리즈 테론 또한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맡은 배역에 어울리는 이미지를 소화하기 위해 삭발을 선택했다. 조지 밀러 감독의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액션 영화로 드물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 후보에 오르고, 6개 부분을 수상한 작품. 톰 하디, 니콜라스 홀트 등의 연기도 뛰어났지만,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퓨리오사’ 캐릭터는 단연 눈에 띈다. 매드 맥스의 퓨리오사를 보고 온 삭발 뽐뿌를 잠재우기 위해 노력했다는 많은 여성들의 웃픈 증언이 뒤따를 만큼 극 중 삭발은 퓨리오사의 ‘걸크러쉬’ 면모를 한층 더 부각시켜 준 중요한 설정 중 하나였다.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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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조지 밀러
출연
톰 하디, 샤를리즈 테론, 니콜라스 홀트
개봉
2015.05.14.
2020.06.04. 재개봉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