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3일(이하 현지시각) 제75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리코리쉬 피자>를 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이 각본상을 받았다.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은 감독의 부탁으로 두 뮤지션이 무대에 올랐다. 밴드 하임의 멤버이자 영화의 주인공인 알라나 하임과 음악감독 조니 그린우드다. “폴은 뛰어난 감독이고 각본가예요. 노래를 당나귀처럼 하지만 않았어도 음악도 했을 거예요.”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둘은 짧고 재치 있는 대리 수상 만담을 하고는 무대를 달아났다.
같은 날 음악상은 <듄>의 한스 짐머가 받았고, 3월 27일 있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미친 과학자 같은 집요함으로 사막 행성 아라키스를 선율화한 그에게 돌아갈 확률이 높지만. 지난 한 해 크게 주목받은 세 편의 영화음악을 만든 조니 그린우드의 활약은 분명 눈여겨볼 만하다. 조니 그린우드의 <리코리쉬 피자> 대리 수상을 기념하며(?) 그와 폴 토마스 앤더슨, 그리고 그린우드의 전임자 존 브라이언의 인연과 음악을 돌아본다. 이 글에 영상을 첨부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꼭 듣기를 추천하는 곡 목록도 더한다.
조니 그린우드
한 사람당 한 편의 엔트리만 가능하게 한 오스카의 방침에 따라 조니 그린우드는 <파워 오브 도그>로 2022년 아카데미 시상식 음악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지만 <리코리쉬 피자>와 <스펜서>의 음악도 만들었다. <스펜서>의 음악은 다이애나비(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이혼을 결심한 크리스마스 휴가 3일을 유려한 피아노 솔로 선율로 이루어진 하나의 메인 테마로 집약시키고, 다이애나 마음에 이는 불안의 진폭에 따라 다른 악기들을 동원해 약간씩만 변주하는 식에 가깝지만, 사운드의 섬세한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재밌다. <파워 오브 도그>의 피치카토로 울리는 묵직한 스트링과 높은 음역대를 불안하게 질주하는 스트링의 아름다운 부조화는 영화의 서늘함을 고조시키며, 이는 음악에 문외한인 기자가 들어도 경이롭다.
전설적인 영국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인 그를 영화음악계로 본격적으로 불러들인 건 폴 토마스 앤더슨이다. 그가 밴드 기타리스트가 아닌, 음악 이론을 정통으로 배운 작곡가로서 홀로 참여한 첫 작품은 200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바디송>이었다. <바디송>에서 그는 기타, 재즈, 클래식 음악을 아우르는 다양한 음악을 선보였고, 이를 인상 깊게 본 폴 토마스 앤더슨은 그에게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음악을 부탁한다. 그의 첫 번째 극영화 음악이었던 <데어 윌 비 블러드> 이후 줄곧 조니 그린우드는 폴 토마스 앤더슨과 협업해왔다. <마스터>, <인히어런트 바이스>, 다큐멘터리 <주눈>, <팬텀 스레드>, 그리고 <리코리쉬 피자>까지 15년 동안 6편을 함께했다.
‘씨네플레이’의 ‘영화음악감상실’을 담당하는 필자 사운드트랙스의 말을 인용한다. “실험적이고 모험적인 사운드 구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조니 그린우드의 색채는 인간의 심원으로 파고들어가는 철학적이고 심오한 폴 토마스 앤더슨의 영화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우러진다.” 감독의 무거운 전작들과 비교해 <리코리쉬 피자>는 가벼웠던 <펀치 드렁크 러브>와 종종 비교되며, 따라가기 쉬운 서사를 가졌다고들 한다. 첫 롱테이크 장면부터 황홀경을 선사하는 완벽하고 빽빽한 연출이 보여주듯, 스토리가 쉬어간다고 해서 영화의 다른 장치가 느슨해진 건 결코 아니다. 대부분의 관객이 살아보지도 않은 1980년대 캘리포니아 샌 페르난도 밸리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데에는 ‘리코리쉬 피자’(Licorice Pizza) 등 조니 그린우드의 스코어 덕이 크다. 아주 최근 들어 그린우드가 폴 토마스 앤더슨이 아닌 감독과 협업하는 빈도가 늘어가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넓은 세계의 영화음악을 보여줄지 궁금해진다.
<리코리쉬 피자> ‘Licorice Pizza’
<팬텀 스레드> ‘House of Woodcock’
<팬텀 스레드> ‘For the Hungry Boy’
추천 플레이리스트
존 브라이언
조니 그린우드를 만나기 전의 폴 토마스 앤더슨은 존 브라이언과 함께였다.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리노의 도박사>부터 <매그놀리아>, <펀치 드렁크 러브>에 참여했다. 그가 음악을 쓰지 않은 <부기 나이트>에는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메인 테마인 ‘펀치 드렁크 멜로디’(Punch Drunk Melody)로 대표되는 <펀치 드렁크 러브> 음악은 이따금씩 영화를 휘감는 붉고 푸른 몽환적인 빛처럼 아름답다. 특히 ‘핸즈 앤드 피트’(Hands and Feet) 속 문법을 거부하는 통통 튀는 퍼커션의 향연은 언제 들어도 재밌다.
대중음악 프로듀서로 활약하던 존 브라이언을 영화음악 세계로 초대한 것 역시 폴 토마스 앤더슨이었지만, 사실 감독이 처음부터 존 브라이언을 원했던 건 아니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숀 펜의 형인 뮤지션 마이클 펜에게 <리노의 도박사> 음악을 부탁했다. 영화음악에 관심이 없었던 마이클 펜은 같이 일해보고 싶었던 뮤지션이 있다며 그와 같이한다면 맡아 보겠다고 감독에 제안했고, 그 뮤지션이 존 브라이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폴 토마스 앤더슨은 어떤 분야에서든 하이브리드라는 개념을 사랑하는 듯하다. 과거를 떠올리는 풍성한 오케스트라와, 모던하고 미니멀한 기계음과, 쨍한 오르간으로 <펀치 드렁크 러브> 음악의 내러티브를 구성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다른 분야의 뮤지션을 스코어 작곡가로, 심지어 배우로(<리코리쉬 피자> 알라나 하임) 설득해 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
존 브라이언을 <레이디 버드>, <이터널 선샤인>의 곡을 쓴 음악감독으로 먼저 알고 있는 이들에겐 이색 이력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그는 힙합의 아이콘인 예(Ye, 칸예 웨스트)를 프로듀싱한 적이 있다. 프로듀싱을 먼저 시작했으니 굳이 따지자면 실은 본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의 곡을 맡은 건 2005년 즈음의 일이지만 지금도 꾸준히 프로듀서로 활동한다. 맥 밀러의 유작이 된 앨범 <서클즈>(Circles)도 그의 터치로 마무리됐고 프랭크 오션의 명반 <블론드>(Blonde)에도 참여했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프로듀싱하지만 힙합신을 종종 찾는다는 것은, 그가 만든 영화음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서정적인 것과 대비되어 재밌는데. 찾아들어보면 그의 손길이 닿은 음악은 힙합이더라도, 경쾌한 리듬감이 곡을 끌어간다기보다 차분한 느낌이 강하다. 어쨌든 스펙트럼 넓은 음악감독임은 분명하다.
<펀치 드렁크 러브> ‘Here We Go’
<레이디 버드> ‘Lady Bird’
<이터널 선샤인> ‘Theme’
추천 플레이리스트
씨네플레이 이지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