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메이커> 설경구 “정치의 외피를 썼지만 그냥 사람 이야기다”

설경구

설경구가 인터뷰 도중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영화 속 한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이 배우의 연기를 아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스크린에서 느껴지는 것 이상의 에너지, 기운, 아우라(aura)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 <킹메이커>에는 배우 설경구가 가진 이런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다. 그가 연기한 김운범이라는 캐릭터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에서 이어진 감독과 스태프들의 끈끈한 연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킹메이커>

배우 인터뷰에서 자주 하는 질문이지만 출연을 결심한 계기가 궁금하다. <킹메이커>는 좀 더 특별한 이유가 필요했을 것 같다.

<불한당> 시나리오 받을 때 <킹메이커>도 같이 받았다. 그때는 눈에 안 들어왔다. 배역 이름이 김대중이어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당장 찍어야 할 <불한당>도 있어서. <불한당>을 변성현 감독과 한번 해보고 나니까 1969~70년대 배경의 이야기를 올드하지 않게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증은 하되 스타일은 버리지 말자고 했다. <불한당>하면서 믿음이 확 생긴 거다. 그리고 배역 이름을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불한당>의 스태프가 <킹메이커> 때 다시 모였다고 들었다.

<불한당> 팀이 모여서 한 작품을 더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기억이 좋아서. <불한당> 때 변성현 감독도 이제 두 번째 상업영화 연출이었고, <4등>에 참여했던 조형래 촬영감독이나 한아름 미술감독도 그렇게 경력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 팀이 다시 모이면 뭔가 시너지가 있겠다 싶었다. 미술감독은 스케줄을 비우고 기다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경우가 흔한 케이스인가.

흔치 않다. 스틸 작가까지 그대로 모였으니까. 우리 분장팀은 완전히 그대로 <킹메이커>에 다시 참여했다.

분장팀 이야기를 하니까 궁금해졌다. 1960년대에서 <킹메이커>가 시작하는데 김운범의 모습이 <불한당> 때보다 더 젊어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분장의 힘인가.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사용한 건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웃음) 얼굴 CG까지는 할 여력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김운범이 연설을 시작할 때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하는 대사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생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육성이 떠올랐다. 연설 신을 어떻게 준비했나.

1960년대 그 당시 연설 장면을 담은 동영상은 찾지 못했다. 연설문은 남아 있다. 김운범으로 이름을 바꾸고 나니 그분과 같아야 한다는 부담이 적어졌다. 목포 사투리도 준비를 했는데 감독님 앞에서 해보고 합의 하에 걷어내고 느낌만 남기기로 했다. 캐릭터에 막 다가가기보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으로부터 좀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분 행동을 흉내내려고 하지 말고 내 식으로 그냥 만들자, 그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사(模寫)를 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오히려 더 유치해지고 방해가 될 수가 있다.

함께 영화를 본 20대 기자들은 김운범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을 모르더라.

모른다. 그 부분이 좀 걱정이기도 하다. 서창대(이선균)의 모티브가 됐든 엄창록에 대해서는 나도 몰랐다. 1971년도 대선이 치열했다는 것 정도 알고 있었고 그 내막을 이번에 영화 찍으면서 알았으니까 그분들이 어떻게 아시겠나. 이 영화는 겉으로라도 내용을 숙지하고 보면 더 재밌을 거다.

<1984 최동원>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연출한 조은성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분이 197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연설 육성 녹음을 디지털로 변환하는 일을 했는데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달변가라고 하더라.

원고 없이도 연설을 하셨다. 우리 영화에서도 이렇게 연설문을 펴다가 덮어놓고 그냥 즉흥 연설하는 장면이 있다.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막는 무제한 토론인)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5시간 넘게 할 정도의 달변가시기도 하다.

부담이 되지 않을 수가 없겠다.

그렇다. 어마어마한 부담을 가졌다. 특히 연설 장면 같은 경우는 뭐 암담했다. 톤을 어떻게 잡아야 될지도 모르겠고, 일상적인 연기의 대화처럼 주고받는 것도 아니고, 혼자 대중들을 상대로 해야 됐고, 장충체육관 연설 같은 경우는 세트에서 촬영하고 합성시키는 거라 더 힘들었다. 혼자서 어마어마한 관중 앞에서 연설을 한다고 상상해야 했다.

장충체육관의 그 연설도 인상적이었지만 서창대와 서재에서 독대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촬영할 때 서창대는 자리를 딱 잡았고 내 자리를 못 잡고 있었다. 어떤 포즈로 시작을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책상에 앉아도 보고 기대도 보고 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런 식으로 삐딱하게 서서 연기를 시작했다.

당시 상황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실 줄은 몰랐다.

(웃음) 그렇게 시작이 된 신이다. 보통은 편집 과정에서 컷을 잘라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장면은 오히려 더 늘렸다고 하더라. 시간을 조금 더 늘리는 작업을 할 정도로 호흡도 중요했고 둘이 말을 안 하더라도 이렇게 눈빛으로 오고 가는 것도 중요했던 장면이다. 촬영할 때도 되게 공을 많이 들였고 집중했다.

이선균 배우와의 호흡인 빛나는 장면이다. 이선균 배우를 변성현 감독에게 추천했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이유였나.

나는 이미 출연하기로 돼 있었고 서창대가 고민이었다. 이선균 배우와는 같이 했음직한데 한 번도 같이 호흡을 맞춰본 적이 없었다. <자산어보> 때 변요한 씨를 추천할 때도 그랬는데 그냥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이러이러 해서 이 배우가 잘 맞을 거라는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침 이선균이 출연한 <나의 아저씨>가 방송 중이었는데 종영을 앞두고 있어서 감독님한테 전화를 한 거다.

<나의 아저씨>를 재밌게 봤나 보다.

재밌게 봤다. 그리고 백상예술대상 시상식 때 (이선균의 아내) 전혜진 씨를 만났다. “책(시나리오) 읽었대?”라고 물어봤다. “지금 촬영 막바지라 바빠. 곧 읽을 거야. 근데 하지 않겠어”라고 하더라. 그래서 조금 안도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 다행히 하겠다고 했다.

거의 영화 프로듀서 역할까지 한 것 같다.

프로듀서까지는 아니고 그래도 툭툭 던져보는 거지. (웃음)

<킹메이커> 촬영 중에 <기생충>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도 재밌다.

그래서 난리가 났다. 부산에서 촬영할 때였는데 촬영 빨리 끝내고 축하주를 마셔야 된다고. 비가 철철 내리고 문 닫는 데도 많아서 부둣가에서 한참 찾아간 곳에서 해뜰 때까지 술을 먹었던 것 같다. 황금종려상의 기운이 여기까지 왔을 거라고 그랬다. (웃음)

앞서 변성현 감독 및 스태프들이 다시 <킹메이커>에 모였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불한당>의 그림자가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스타일, 톤 앤 매너(Tone & Manner) 측면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그 스타일 때문에 <킹메이커>가 또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한당>과는 또 다른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불한당>은 어떤 색감이 들어갔고 <킹메이커>는 색감을 좀 빼고 흑백이 들어간 느낌이다. 또 이 영화가 1960년대 70년대 이야기라고 해서 올드하거나 그렇지 않다. 소품은 거의 고증을 했고 미술 같은 경우는 조금 창의적인 부분을 넣어서 오픈 세트를 만들었다. 그래서 또 다른 스타일리시한 영화가 나왔다, 신선한 영화가 나왔다라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레트로(Retro) 감성에 딱 맞는다고 생각한다. 또 눈에 띄는 게 역시 의상, 소위 말하는 ‘수트빨’이다. <불한당>과 이어지는 접점이 아닐까 한다.

영화에 나오는 수트는 고증을 많이 한 거다. <불한당> 때처럼 허리 라인을 넣지 않은 ‘통짜’ 디자인이다. 이 디자인도 멋있다. 이선균 씨를 비롯해 조우진 씨도 그렇고 유재명 씨도 그렇고 다들 멋진 수트빨을 보여줬다.

정말 멋있더라. 영화 보면서 저 정장을 어디서 맞췄을까, 나도 살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웃음)

아마 개인적으로 다 맞췄을 거다.

수트 말고 <불한당>의 정말 중요한 키워드는 브로맨스였다. <킹메이커>에서 의도한 지점이 있었나.

그런 건 없다. 그런데 찍고 나니까 이것도 사랑 얘기 같다는 생각은 했다. 서창대가 먼저 김운범에게 다가왔고 뭔가를 하나 이뤘는데 김운범이 조금 밀어낸다. 다시 필요해서 불렀고 또 좋은 성과를 냈는데 또 안 맞아서 틀어지는 과정이 영화에 담겨 있다. 또 다시 서창대가 상처 받았을 때 또 다가가서 김운범이 위로해 주었으나 더 이상은 같이 가지 못하는 관계가 그려진다. <킹메이커>는 정치의 외피를 썼지만 그냥 사람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스포일러의 우려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영화의 마지막 엔딩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다.

관객들에게 해석의 여지를 좀 남겨놓은 거라고 할 수 있다.

연기를 오래 하고 잘하는 배우들은 보면 늘 궁금하다. 저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어디서 나오나.

감사하다. (웃음) 에너지는 혼자 끌어내는 게 아니다. 같이 같이 하는 거다. 영화 속의 공화당 쪽과는 같이 촬영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신민당 쪽, 나와 보좌관 역을 한 배우들은 촬영 외적으로도 많이 어울렸고 팀웍이 좋았다.

현장을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설경구라는 대배우는 대기 시간에도 캐릭터 몰입하고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은 가보다.

신민당 전당대회 촬영 할 때는 카메라 밖에 나오면 전배수라는 배우 주변에 모였다. 별명이 복덕방이다. 거기 다 둘러앉아서 ‘누구 들어오세요’ 하면 촬영하러 가고 그랬다. 그런 게 카레마 앵글 속에 들어가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개인적으로 가까워져야 한다. 서로 뻘쭘하게 있다가 연기 시작하면 힘들다. <킹메이커>에서 김운범과 보좌관들은 한 팀이니까 더 그렇다.

역시 영화는 팀이 만드는 건가.

당연하다. 개인기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굳이 대답을 안 하셔도 되는데 지금까지 연기한 굵직한 작품의 감독님들 중에 누가 제일 잘 맞고 안 맞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다 안 맞다. 서로 맞춰가는 거다. 잘 맞춰지면 좋은 거고 끝까지 안 맞는 감독도 있다. 인터뷰 기사에서는 “좋았어요”라고 하지만 다 그런 거 아니다. 아, 그렇다고 이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좋았다’고 하는 건 아니다. (웃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느 감독이 맞고 어느 감독은 안 맞았다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대사 한 줄에 대해서도 서로 생각이 다를 수가 있다. 그 간극을 좁혀가고 맞춰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불한당> 팀은 그 과정이 잘 맞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또 다시 모인 것 아니겠나.

그래서 그런지 이번에 홍보를 정말 열심히 하는 것 같다.

난리 났다. 방구석인가 뭔가(JTBC <방구석 1열>)도 나가고. 코로나 상황이 엄중하다 보니까 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선균 씨도 지금 지방에서 촬영하는데 라디오 나가고 다 열심히 하고 있다.


글 ·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

사진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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