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이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이상한 단어다. 얼핏 봐서는 간파하기 힘든 중의성이 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화까지만 해도 정명석에게 우영우는 ‘이상한(strange)’한 변호사였다. 그는 장애를 가진 우영우가 변호사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심하며 “그냥 보통 변호사도 어려운 일이야”라는 차별의 말도 툭 던진다. 하지만 드라마의 마지막 화, 변호사가 가지는 딜레마를 고민하며 정명석의 의견을 구하는 우영우에게 그는 당신은 ‘보통 변호사’가 아니니 자신의 신념에 따른 결정을 하라 조언한다.
1화와 16화 모두에서 우영우는 ‘보통 변호사’가 아닌 ‘이상한 변호사’로 존재하지만, ‘이상한’의 의미는 아주 다르게 쓰인다. 16화의 시간이 쌓이는 동안 정명석에게 우영우는 이상한 변호사(strange attorney)에서 이상한 변호사(extraordinary attorney*)로 변모한다. (*실제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영문 제목은 <Extraordinary Attorney Woo>이다.)
심달기 배우를 <페르소나-키스가 죄>로 처음 만났던 2019년부터 지금까지 내 감정의 흐름도 이와 비슷하다. 때론 흐리멍덩해서 속을 알 수 없고, 가끔은 날이 바짝 서있어서 베일 것 같다. 어리숙한 것 같지만, 꽤 단단해 보인다. 백지같이 속을 다 내어 보이다가도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는 말투를 한다.
그녀, ‘보통 연기자’가 아닌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연기한 강렬하고 독특한 캐릭터에서 나온 일시적 후광 효과인지 아니면 ‘심달기’라는 이름이 주는 단순한 낯섦 때문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그 의구심은 <소년심판>, <우리들의 블루스>, 그리고 <말아>로 이어진 그녀의 최근작들을 보며 말끔히 떨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국 영화계에 ‘이상한 연기자(extraordinary actress)’가 출현했다고.
<페르소나-키스가 죄> ‘혜복’ 역
2019년, 넷플릭스
<페르소나>에서 심달기는 쥐 파먹은 머리와 어눌한 말투로 무장하고 상처와 성장이 덧대어진 캐릭터 ‘혜복’을 성공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다 가만 안 둬’.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폭력에 노출된 친구 혜복(심달기)을 대신해 복수를 꾸미기 시작하며 뱉어 낸 한나(이지은)의 이 한 마디는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다. 키스 마크를 이유로 혜복의 머리를 산발로 잘라 놓고 학교도 보내지 않는 그의 아버지는 가정폭력범이다.
이에 한나와 혜복은 복수를 위해 욕실 바닥에 비누도 칠해보고, 의자 다리를 살짝 잘라 아버지가 앉아 넘어질 날만 기다리지만, 어찌 된 일인지 혜복의 아버지는 그들의 복수를 요리조리 피해 간다. 결국 고등학생 신분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복수라는 건 숨어서 담배나 피우는 것. 복수를 포기한 그들은 무심코 던진 꽁초가 어떤 파장을 불러올지 모른 채 유쾌하게 바다를 향해 뛴다.
가정 폭력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뤘지만, 두 친구의 케미가 해맑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페르소나-키스가 죄>. 영화는 복수라는 축 맞은편에 위치한 한나와 혜복의 미묘한 관계 또한 섬세하게 포착한다. ‘스트레스 받았어? 그럼 바다 갈래?’라며 혜복을 팔을 끌어 잡고 바다로 이끄는 한나의 미소는 사랑하는 연인에게만 내보이는 그것이다. 집이 불에 타는 마지막 장면과 관습을 깬 듯한 둘의 모습은 가부장제 전복의 짜릿함을 충실히 전달한다. 24분 남짓의 짧은 단편으로 <소공녀>의 전고운 감독이 연출했다.
<소년심판> ‘서유리’ 역
2022년, 넷플릭스
심달기는 <소년심판>에서 소년범이자 가정폭력의 희생자 ‘서유리’를 연기한다. 전작 <페르소나>에서 ‘혜복’이 가정 폭력에도 해맑음을 잃지 않은 엉뚱한 소녀였다면, <소년심판>의 ‘서유리’는 절도 및 성매매 특별법 위반 죄로 장기 보호관찰 처분을 받은 소년범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양면의 얼굴을 한 좀 더 복잡한 인물이다.
<소년심판>은 소년범죄의 현주소를 보여주고 어른과 사회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는 드라마다. 드라마가 공개됐을 때 김혜수, 김무열 등 베테랑 배우들 사이에서 강렬한 존재감 각인시키며 등장한 신인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많은 화제를 모았다. 특히 출구 없는 폭력적 상황에 노출된 ‘서유리’로 분한 심달기의 연기는 절박한 청소년의 감정을 세밀하게 포착해 많은 이의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 냈다.
소년범을 혐오하는 판사 ‘심은석’으로 분한 갓혜수 김혜수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충격적이다 싶을 정도로 놀랍고 신선했다”라며 그의 연기를 극찬하기도. 소년범이자,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서유리. 심달기가 그려내는 양면의 얼굴을 가진 인물이 궁금하다면 당장 <소년심판> 앞으로 가라. 뛰어난 몰입감, 극적 재미 그리고 사회에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는 덤이다.
<우리들의 블루스> ‘정은희'(이정은) 아역
2022년, tvN
<소년판사>에서 부장판사 역을 맡은 배우 이정은은 알았을까? 심달기가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자신이 연기할 ‘정은희’의 어린 시절을 연기할 줄은? 심달기는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엉뚱하지만 통통 튀고 당찬,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정은희’의 고등학생 시절을 연기한다.
한수(차승원)의 고등학교 시절을 연기한 장신 배우 김재원 옆에 서서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해볼까?’라든지 ‘나 너 좋아! 나 가져, 아님 널 주든가’라고 고백하며 까치발로 기습 뽀뽀하는 장면은 전작에서 볼 수 없던 심달기의 사랑스러움을 극대화한다. 특히 한수와 일대일로 마주치는 농구장 장면은 단연 <우리들의 블루스> 2화의 하이라이트! 자신이 기습 뽀뽀한 사실이 전교생 앞에서 들켜 망신 당할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표현하는 불규칙적인 호흡, 흔들리는 동공, 땀으로 떡진 앞머리, 쓰러지는 순간 입가에 드리우는 옅은 미소까지. 비슷비슷한 첫사랑 연기 홍수 속, <우리들의 블루스>를 통해 배우 자체가 장르가 돼버린 심달기의 연기에 그렇게 더 깊이 빠져버렸다.
영화 <말아> ‘주리’역
2022년, 감독: 곽민승
2022년 8월 심달기가 원톱 주연 영화 <말아>로 돌아왔다. 과거 작품에서 그는 악에 받쳐 있거나, 폭력에 노출된 채 폭력을 행사하는 세상에 등 돌린 청소년을 주로 연기했다. 하지만 <말아>에서 심달기는 그간 맡아온 ‘센’ 캐릭터의 개성을 조금 다듬고 평범하지만 공감 어린 김밥집 딸 ‘주리’로 분한다.
단무지 알레르기가 있지만 하루에 한 번씩 꼭 김밥을 먹으러 오는 취준생, 한 달 용돈을 모아 가게에 오는 꼬마, 산악회 회장 아저씨까지. 엄마의 부탁으로 갑작스레 김밥집을 운영하게 된 청년 백수 주리는 김밥이 아니었으며 불가능했을 다양한 관계를 맺는다. 코로나19 시대를 배경으로 꿈도 희망도 없던 청년 백수 주리가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겪는 소소한 변화를 영화는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전작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심달기가 마음먹고 사랑스러운 척을 한다면 우리들은 속절없이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웠다. <말아>에서 드디어 제 나이대에 맞는 연기를 하며 더 자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심달기. 백수가 이렇게 사랑스러울 일이야? 그가 연기하는 새로운 얼굴을 새삼 감탄하며 보게된다. 일본 영화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를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말아>, 강추한다!
문화기획자 하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