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태,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줘요
“박진영(GOT7)이 27년 후에 유지태가 되는 건가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드라마군요!” 1990년대와 현재를 오가는 tvN 드라마 <화양연화 –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이하 <화양연화>)을 보고 누군가가 한 말이다. <화양연화>는 대학 시절 첫사랑이었던 재현(박진영/유지태)과 지수(전소니/이보영)가 중년이 되어 재회하면서 겪는 이야기. 이러한 반응을 미리 예견했는지, 연출을 맡은 손정현 피디가 “우리 드라마의 치명적 결함은 유지태와 박진영 두 사람의 키 차이”라고 제작발표회에서 농을 쳤는데, 알고 보니 자신감의 일환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2인 1역을 연기한 진영과 유지태의 이미지 차이는 ‘치명적 결함’은커녕, 단점 축에도 못 낀다. 오히려 두 배우의 서로 다른 개성이,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되는 이 드라마를 즐기는 또 하나의 재미로 작용한달까.
<화양연화>가 추억하게 하는 것은 90년대 시절만이 아니다. 잠시 잊고 있었던 유지태의 멜로 감성도 이 드라마는 연신 불러세운다. <봄날은 간다>에서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항변하던 유지태(상우 역)는 <화양연화>에서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시간을 이기는 사랑은 얼마 없다. 시간은 영원을 약속한 남녀의 믿음에 실금을 내고, 시간은 설렘을 권태로 돌리고, 시간은 달콤한 키스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사랑 안에선 시간을 더 오래 견디는 자가 약자다. “우리, 이제 헤어져.” 변심한 상대의 벼락같은 통보 앞에서, 변하지 않은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때 그 시절, 상우는 꺼억꺼억 울었고, 그런 상우를 보는 우리도 울었다.
그러나 재현의 사투는 외롭지 않다. 매몰차게 돌아섰던 은수(이영애)와 달리, <화양연화> 지수(이보영)의 사랑은 대쪽 같다. 27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에게 재현은 여전히 “신념이고 세상”이다. 모른 척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밟히는 얼굴이고, 가닿고 싶은 풍경이다. 그런 지수의 마음을 알아챈 이 남자 재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더라도 이 사랑을 지킬 참이다. 아니, 지키고 싶단다. 흔하디흔한 첫사랑 이야기를 숨죽이며 보게 되는 건, 배우의 힘이라 할밖에. 여러모로, 유지태 입장에서 <화양연화>는 다시 찾아온 봄날이다.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에 정말 라면만 먹고 가려 했던 어리숙했던 청춘은 이제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어른이 됐다.
패션모델로 데뷔한 유지태의 연기자로서의 출발선은 <바이 준>이다. 최호 감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영감받은 <바이 준>을 만들면서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청춘을 연기할 새로운 얼굴을 찾았다. 187cm의 큰 키에 무용으로 단련된 길고 곧은 육체, 쓸쓸함을 머금은 듯한 얼굴. 세기말 청춘 도기 역할을 맡기기에 유지태는 더없이 좋은 도화지였다. 왕가위 풍의 이미지에 이미 익숙해진 한국 관객들에게 <바이 준>은 너무 늦게 도착한 편지였지만, 유지태는 제때 도착한 알림음이었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김상진 감독은 유지태의 그런 이미지를 한 번 더 활용해 귄위와 시대에 저항하는 ‘뻬인뜨’를 맡겼다. 그리고 2000년 밀레니엄에 개봉한 <동감>은 유지태를 ‘N세대 스타’의 꼭대기 위치로 올려놓았다.
유행에 가장 민감한 자본주의의 총아인 CF들이 그를 찾았다. 충무로 시나리오도 줄을 섰다. 그러나 그는 N세대 청년 이미지로 과잉소비 되는 스스로를 엄격히 검열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혹독했다. 변덕스러운 대중의 취향이나 스타 산업의 구속으로부터도 탈주하고 싶어 한 그의 바람은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올드보이>의 박찬욱, <여자는 남자는 미래다>의 홍상수 등 자기만의 아이덴티티를 확보한 감독들과의 작업을 통해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세 작품 모두 유지태의 배우로서의 면모는 물론 스타성도 강화시켰다는 점에서, 유지태에게 특기할만한 시기였다.
그러나 작품 운과 노력이 늘 함께 하는 것은 아니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그가 출연한 작품들은 이전과 같은 파급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의 화양연화는 끝난 것인가. 매스미디어의 집중포화가 따르는 스타라는 위치가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다는 인상을 내뿜어 온 배우가 들으면 섭섭할 소리일 테다. 그에게 없었던 것은 인기 유효기간을 늘리기 위해 대중과 적당히 타협하려는 자세. 반면 한도 초과해서 지니고 있는 것은 완벽주의자로서 갖는 자학적 태도와 꾸준함, 그리고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투신하는 우직함이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연기할 때뿐 아니라, 연기 밖의 활동에서 더욱 강화됐다.
그는 자본의 힘이 닿지 않는 독립영화의 후견인을 자처해 오고 있고, ‘유지태와 함께 독립영화 보기’ 캠페인을 2012년부터 사비를 들여 펼치고 있으며, 독립영화와 관련된 섭외 요청이 있을 땐 흔쾌히 달려가 힘을 보태고 있다. 감독으로서의 그는 자신의 비전과 취향을 더욱 깊이 드러내기로 유명하다. 첫 장편 연출작 <마이 라띠마>에선 불법 이주노동자의 현실에 관심을 가졌다. 준비 중인 차기작 <안까이>에서는 탈북여성의 삶을 다룰 예정이다. 월드비전 홍보 대사로도 활동 중인 그는 어릴 적 꿈인 사회복지사를 이루기 위해 2006년 사회복지 대학원에 진학하기도 했다.
‘이거, 좀 비현실적인 캐릭터’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빈틈없는 이러한 모습이 ‘배우 유지태’를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어머니로부터 “너무 겸손하지 말라고, 그게 너의 아킬레스건”(‘GQ’ 인터뷰)이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니 잘못된 감상평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유지태에겐 그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게 하는 힘이 있다. 그는 처음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열광한 이미지를 과감히 잘라내며 끊임없이 변주해 왔듯, 스타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본의 논리를 좇지 않아 왔듯, 또 그가 어디로 발걸음을 옮길지, 누구도 알 길이 없다. 유지태는 미스터리한 얼굴로, 묵묵히 걸을 뿐이다.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